▲ 당동리 또아리 굴 전경당동리에서 바라본 대강터널(또아리굴) 전경. 이 계곡 사이로 ‘소백산자락길’ 4구간이 지난다.
김경진
아마도 역사와 마방과 주점들이 늘어서 있고, 감나무와 밤나무, 초가집과 기와집, 돌담이 나지막이 조화를 이룬 마을이었으리라. 그리고 수많은 길손들이 말을 타거나 봇짐을 지고 이곳을 지났을 것이다. 그랬던 이 마을이 최근 수 십 년 사이에 이렇게 바뀐 것이다.
나는 이 잔인한 문명의 현장 앞에서 그만 말을 잊고 만다. 나는 이곳 폐광사택 앞 언덕에 서서, 한때 이 고장에 머물렀던 역사적인 인물,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 떠올렸다. 동학의 경전을 간행하여 교리를 확립하고 교단의 조직을 크게 확대한 인물이다.
그는 한 동안 이곳 죽령천의 갈래인 남조천의 한 계곡마을(대강면 남천리 샘골)에 사는 여규덕(몽양 여운형의 큰할아버지)의 집에 은신하면서 동학의 경전 '용담유사'를 간행하여 전국에 퍼뜨렸다. '용담유사'는 최제우가 지은 포교 가사집으로 1881년 6월 최시형이 이곳에서 맨 처음 간행한 것이다.
당시 대원군 치하의 조정은 동학을 서학(천주교)과 마찬가지로 반체제 집단으로 보고 최시형의 행방을 좇았다. 이에 최시형은 줄곧 도망자로 지내야 했다. 조정은 그를 붙잡아 1대 교주 최제우와 마찬가지로 참형에 처하려 했었다. 전국 유림 또한 유교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그를 없애려고 틈틈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궁지에 몰리면서 그의 의지는 더욱 강해졌고, 숨어서도 교세를 확장해나갔다. 그는 하늘님 아래 모든 사람이 평등한 새로운 나라를 만들자며 후천개벽론을 설파했고, 이에 수많은 민초들이 그가 유토피아를 열어줄 등불 같은 존재로 생각했다.
그는 부패한 조선왕조에 항거해 '백성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드디어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라'는 '사인여천' 사상을 펼친다. 이는 곧 인간평등사상이었다. 이 사상은 후일 인내천 사상으로 발전한다,
이 인간평등사상은 전봉준으로 하여금 동학혁명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동학혁명은 조선 후기, 외세를 몰아내고 부패한 관리를 몰아내는 농민운동이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 초유의 농민 자치기구인 집강소가 설치된다. 당시 집강소에서 시행했던 사민평등(모든 백성의 평등)을 지향한 폐정 개혁운동은 우리나라 민주화의 실질적인 단초가 된다.
그는 1894년 전봉준이 동학혁명을 일으키자 교주로서 그도 북쪽 각지의 지역 교구장들에게 총궐기를 명령해 10여 만 명의 병력을 동원한다. 그러나 관군・일본군의 연합군과 싸워 참패하고 만다. 그가 정신적인 지주로 고군분투했던 동학혁명이 실패로 끝난 그해 7월 그는 처형된다.
나는 오늘 폐광촌 언덕에서 서서, 이곳에 머물렀던 한 의인의 환영을 본다. 그는 백성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꿨다. 조선의 백성들을 일깨우고 외세의 침략을 막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내던졌다. 그는 이 땅의 민족이 자유와 평등을 얻고 주체적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의연하게 자신의 몸을 내던졌다.나는 오늘 민족의 별 하나를 본다. 한 영혼의 목소리를 듣는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공유하기
유토피아 꿈꾼 이가 머무른 곳... 죽령에 가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