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고 싶을 만큼 좋았던 것도 잠시... 억장이 무너졌다"

[박도 실록소설 ‘들꽃’ (28)] # 제7장 들꽃을 찾아가다 ①

등록 2015.01.09 19:40수정 2015.01.10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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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해제
'들꽃'은 일제강점기에 황량한 만주벌판에서 나라를 되찾고자 일제 침략자들과 싸운 항일 독립전사들을 말한다. 이 작품은 필자가 이역에서 불꽃처럼 이름도 없이 산화한 독립전사들의 전투지와 순국한 곳을 찾아가는 여정(旅程)으로, 그분들의 희생비를 찾아가 한 아름 들꽃을 바치고 돌아온 이야기다. - 작가의 말

 부용꽃으로 꽃말은 '정숙한 여인' 등 아름다운 여인을 상징한다(2014. 가을 원주 치악산에서 촬영).
부용꽃으로 꽃말은 '정숙한 여인' 등 아름다운 여인을 상징한다(2014. 가을 원주 치악산에서 촬영).박도

항일유적지 답사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생이라고 한다. 또 사람은 살아가면서 누구를 만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사실 나는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여 중고교 국어교사로 살아왔다. 초중고 재학시절 국사를 배웠지만 맨 끝부분 근현대사 특히 독립운동사는 거의 배우지 못했다.


그런 탓인지 근현대사, 특히 독립운동사에 관해서는 까막눈이었다. 그런 가운데 나는 늘그막에 만난 한 독지가와 인연으로 얼치기 역사학도가 되어 십 수년째 국내외 항일유적지를 더듬으며 꽤 여러 편의 책도 펴냈다.

1999년 6월 어느 날, 서초동 이영기 변호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나는 그분의 막내아드님을 20년 전에 담임했는데, 그 아드님이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작가와 독자로, 특히 그분은 내 작품의 후원자로 크게 도움을 받아왔다. 그날 전화한 요지는 느닷없이 나의 중국방문 의사를 물으면서 토요일 오후, 퇴근길에 당신 사무실에 꼭 들러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약속한 날 사무실로 들르자 이 변호사는 낯선 두 분을 소개했다. 한 분은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선생 증손 이항증(李恒曾, 현 광복회 경북지부장) 선생이었고, 또 다른 한 분은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무장투쟁의 선봉장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선생 손자 김중생(金中生) 선생이었다. 두 분은 같은 경북 안동 출신으로 고명하신 독립지사의 후손이었다.

그 해 연초, 이 변호사는 당신이 중국대륙의 항일유적지를 둘러보며 원로 독립지사를 만나보니까 느끼는 것도, 기록하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당신은 필력이 부족하다고, 나에게 중국대륙의 항일유적지 답사한 뒤 2세들을 위해 쉬운 독립운동사를 쓸 것을 권유했다.

그러면서 작가는 견문이 많아야 하고, 나라와 겨레에 대한 바른 이해와 민족애가 바탕이 되어 있어야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다는 말씀도 했다. 그때 나는 그 말씀에 공감하면서도, 어디 중국이 대전이나 대구처럼 가까운 곳도 아닌데다 언어도, 지리도 모를 뿐더러, 그 경비도 수월치 않을 것 같아 주뼛한 적이 있었다.


이 변호사는 고성이씨 족친(族親, 일가붙이)인 이항증 선생에게도 당신이 경비를 지원할 터이니, 이 참에 박도 작가와 동행하여 중국대륙 항일유적지를 답사하라고 권유하신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이항증 선생 증조할아버지 석주 이상룡 선생을 비롯한 안동의 유림들이 만주로 간 후의 행적도 더듬어 보고, 베이징에 사는 아흔의 독립운동가 원로 이태형(李泰衡) 선생도 만나 그분의 인생역정도 들어보고 오라고도 이르신 모양이었다.

 동작동국립묘지 임정 국무령 이상룡 선생 묘역에서 고유제를 지낸 뒤(왼쪽부터 김중생, 이항증 선생, 그리고 필자. 1999년 7월 중국대륙 항일우적지 답사를 앞두고.)
동작동국립묘지 임정 국무령 이상룡 선생 묘역에서 고유제를 지낸 뒤(왼쪽부터 김중생, 이항증 선생, 그리고 필자. 1999년 7월 중국대륙 항일우적지 답사를 앞두고.) 박도

든든한 안내자


이항증 선생도 역시 중국어와 중국지리는 까막눈이라 김중생 선생을 길안내자로 모셨다고 했다. 김중생 선생은 1993년에 중국 하얼빈에서 태어나 한때 조선 의용군으로, 조선인민군으로 입대하여 제대한 뒤 가목사(佳木斯)사범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다. 이후 아성현 중학교 역사교사로 근무하다가 어머니와 함께 수년 전에 귀국했다고 한다.

두 분 선대 석주 선생과 일송 선생은 안동 유림으로 망국 후 만주로 가서 함께 독립운동을 한데다가 유류상종으로 세교가 깊은 사이였다. 그날 나와 만나기 전에 세 분은 이미 답사에 합의한 바라, 그날 최종 나의 의사를 묻고 의향이 있다면 답사일정을 조정하기 위해 모였다고 했다.

사실 나로서도 매우 고맙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견문과 사고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귀중한 중국대륙 답사 기행이라 흔쾌히 승낙했다. 더욱이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큰 자취를 남기신 두 독립지사 집안 후손의 안내를 받는 최상의 답사여행이 아닌가.

그래서 그날 모임에서 여름방학 기간 중 약 2주간 동안 중국대륙의 항일유적지를 답사키로 결정했다. 사실 역사탐방에서 든든한 안내자처럼 소중한 것은 없다. 애써 역사현장에 찾아가도 안내자가 없으면 뭔지도 모른 채 발길을 돌리기 마련이다. "아는 만큼 본다"는 말은 답사자에게 금언이다.

그날 이후 이항증 선생은 나에게 참고도서로 중국 동포 강용권 선생이 쓴 <죽은 자의 숨결, 산 자의 발길>, 한국독립유공자협회가 엮은 <중국 동북지역 한국독립운동사>, 허은 구술, 변창애 기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 소리가> 등의 책을 건네주셨다. 그래서 나는 그 책을 틈틈이 읽어가며 독립운동사를 머리에 입력시키고, 우리가 가야 할 곳에 대한 사전정보를 살펴보았다.

우리 세 사람은 답사에 앞서 먼저 국립묘지 임정 묘역을 찾아 여러 선열에게 고유 인사를 올렸다. 나는 그때 선열들의 발자취를 백 분의 일이나마 제대로 보고, 바로 쓸 수 있게 해달라고 땅에 엎드려 마음 속으로 빌었다. 우리나라가 분단되지 않았다면, 당시 우리 조상들의 망명길을 따라 서울에서 경의선 열차를 타고 신의주로, 압록강을 건너 중국 동삼성(만주)로 가는 게 바른 길이지만만, 조국 분단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항공편으로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거기서 상하이(上海)로, 동북 삼성으로 다니면서 그 일대에 흩어져 있는 항일 유적지를 돌아보기로 했다. 그러면서 이역 땅에서 일제와 맞서 이름도 없이 산화한 독립전사들의 희생지를 찾아 고국 고향에서 가져간 순곡 안동 소주로 잔을 채워 순국지나 기념비에 헌작(獻爵, 술잔을 올림)키로 했다.

 베이징 교외의 만리장성
베이징 교외의 만리장성박도

베이징으로 가다

1999년 8월 1일(일) 마침내 우리 세 사람은 항일 유적지 답사 길에 올랐다. 우리 일행이 첫 기착지를 베이징(北京)으로 삼은 것은 그곳이 중국으로 가는 교통 요충지일 뿐 아니라, 독립운동 원로 이태형(李泰衡) 선생을 먼저 찾아뵙고 독립운동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듣고자 함이었다.

서울 발 베이징행 여객기는 김포공항을 이륙한 지 불과 두 시간 만에 베이징공항에 닿았다. 그날 오후 베이징 시내 빈관에 여장을 풀고 곧장 베이징 교외에 있는 만리장성과 명13릉을 다녀왔다.

 천안문의 마오(毛) 주석
천안문의 마오(毛) 주석 박도
이튿날 아침, 우리 일행은 베이징시 해정구에 있는 이태형 선생이 사시는 아파트로 찾아갔다. 그 아파트는 10여 층 고층으로 서울의 아파트보다는 좀 칙칙했지만, 그곳에서는 고급아파트로 상류층이 산다고 했다.

이태형 선생의 아들 이대만(李大万)씨가 중국 정부의 고위층으로 정년퇴직하였기에, 그들 가족은 편안한 노후 생활을 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이 그 댁에 이르자 온 식구가 문 앞에 나와 반갑게 맞아 주었다. 4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제 집안으로, 어린아이부터 아흔 살 노인까지 함께 살고 있었다.

손자까지는 우리말로 인사를 했지만 4대 증손들은 중국말로 인사했다. 아랫대로 내려갈수록 어쩔 수 없이 중국에 더욱 동화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한 집안에서 4대가 오순도순 사는 대가족제의 전형을 보아 못내 흐뭇했다. 이태형 선생은 아흔의 나이답지 않게 정정했고 깨끔했다. 왕년에 만주 벌판을 누비던 독립투사의 모습이라기보다 인정 많고 덕이 높은 곱살한 노인의 풍모였다. 이미 마련된 과일과 차를 들고는 소파로 가서 대담을 나눴다.

독립지사 이태형 선생

"요즘에는 가는 귀도 먹고 기억력도 쇠퇴하여 인명이나 지명도 오락가락하여 별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산 귀신이나 다름없디. 왜정 때 내가 한 일이라고는 석주 선생을 비롯한 어른들 일하시는데 먹줄 잡는 심부름 정도밖에 한 일이 없다."

첫 마디부터 당신은 별로 한 일이 없다고 겸손하게 말씀했다(동행 이항증 선생은 이태형 선생은 젊은 날 남만주에서 열혈한 독립전사였다고 증언했다). 당신의 손자뻘 되는 나는 돋보기를 끼고 기록하는데 춘추 93세인 당신은 안경을 끼지 않은 채, 내가 한자를 더듬거리면 곁에서 보완해 주셨다.

그날 오전 9시부터 11시 30분까지 두 시간 남짓 이태형 선생의 인생 역정을 들었다. 그분은 1907년 경북 안동 용상동에서 태어나 만 6세 되던 1913년에 당신 가족(부모, 조모) 네 식구는 고향을 떠나 만주로 왔다. 그때부터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되기까지 30여 년의 가시밭길 얘기를 들었다(이야기 내용은 생략, 박도의 '항일유적답사기'에 수록) .

 1999년 당시 93세의 독립지사 1세대인 이태형 선생(2003년 97세로 베이징에서 작고)
1999년 당시 93세의 독립지사 1세대인 이태형 선생(2003년 97세로 베이징에서 작고)박도
일제가 패망한 때의 심경을 물었다.

"처음에는 해방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간악한 일본이 거꾸러져서 얼마나 시원하고 통쾌한 지 그저 춤을 추고 싶도록 좋았다. 우리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해서 나라를 세울 줄 알았는데, 미군 당국이 임시정부를 인정치 않고, 그들의 귀국도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그때 심정을 어찌 말로 할 수 있겠는가? 얼마 가지 않아 미·소 두 나라가 조선반도를 시루떡 자르듯 38선을 만들었고, 남조선에서는 이승만씨가 단정을 주장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이승만씨는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재직하면서, 조선을 미국에 위임 통치 하에 둘 것을 청원하다가 당시에 임시정부 의정원으로부터 불신임 탄핵을 받아 물러난 인물이라 대단히 우려했다. 곧 그 우려가 30년 후 사실로 드러났다.

해방이 되면 중국 땅에 살았던 우리 동포들은 으레 고국 땅을 밟을 줄 알았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귀국코자 이곳 베이징에 왔다가 끝내 귀국도 못하고 여기에서 정착한 것이다. 해방 50년이 되던 해 소감을 써둔 게 있다."

조국 통일 승리 만세!
― 해방 쉰 돌을 맞으며

오늘은 해방 쉰 돌이 되는 날이다.
참으로 화살같이 빠른 것이 세월이다.

어른들은 진정한 해방 고개를 넘는다고 오르고 오르다가 기진맥진
원한과 한 가닥 희망을 품은 채 저 먼 곳으로 가시고
새로 태어난 아이들은 조국이 두 동강난 줄도 모른 채
자라고 있다.

본 세기의 8월(1910년, 1945년)은 우리 겨레에게 비희극(悲喜劇)을 갖다 주었다.
강대국들이 자국의 이해에 따라 17선, 38선을
칼로 시루떡 나눠먹듯 지리상에 금을 그어놓고
화약 폭발 도화선으로 백분 이용만 하였다.

이 무슨 노름판의 장난이더냐?
이족(異族)에게 짓밟혔다가 이름만이라도 해방을 얻었으니
산 좋고 물 맑은 살기 좋은 강산에서 오순도순 살아야 할
같은 말 같은 글 함께 쓰는 골육 동포들이
왜 송아지 제 형 보듯 뿔 머리 맞대고 밀었다 당겼다 하듯
서로 욕설을 퍼붓고 물고 차고 쥐어뜯고 싸우고 지지고 죽이고 뒹굴기만 하느냐?

그 지긋지긋한 몸서리칠 왜정 36년 세월의 피눈물과 한숨
골고루 다 맛보며 당하고 찢기고도 모자라서
이 얼빠진 노름판에, 무슨 악마의 장단에 춤을 추고 있는가?
깨어나야 한다. 뼈저리게 뉘우쳐야 한다.


왜, 남과 북이 마주 서서 서로 눈 흘기며  발걸음도 없느냐?
잘되었든 못되었든 월남의 17선, 독일의 베를린 장벽은 이미 없어졌지만
내 나라 38선 장벽은 아직도 그대로 가로놓여 있는 채
분단의 대명사로 쓰이느냐?

우리나라 주변 강대국들은 모두 무엇을 좀 얻어먹으려고
우리의 통일을 바라지도 않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겁도 주고 훼방도 놓고 별의별 연극을 다 벌이며 몰아친다.
제 일은 자기가 해야지 남의 힘 믿겠나?
지난 쉰 해 동안 별의별 그 숨 막힐 일들을 회상해 보라.
꿈을 깨고 정신을 차리자.

통일이 좋은 줄 알기는 쉬워도
그것을 행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 무슨 '네 잘못했네, 내 잘 했네'라는 책임 전가와
요행이나 외세에 의존하려는 사대 근성은
이제 다 선을 그어 밀어 던지고
쉽고 작은 일부터 시작하자.


민족 단결의 새 깃발을 휘두르며
조국 통일 승리 만세!
우렁차게 외치는 소리에 발맞추어
씩씩하고 힘차게 나아가자!
조국 통일 만세!
최후의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들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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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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