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용꽃으로 꽃말은 '정숙한 여인' 등 아름다운 여인을 상징한다(2014. 가을 원주 치악산에서 촬영).
박도
항일유적지 답사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생이라고 한다. 또 사람은 살아가면서 누구를 만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사실 나는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여 중고교 국어교사로 살아왔다. 초중고 재학시절 국사를 배웠지만 맨 끝부분 근현대사 특히 독립운동사는 거의 배우지 못했다.
그런 탓인지 근현대사, 특히 독립운동사에 관해서는 까막눈이었다. 그런 가운데 나는 늘그막에 만난 한 독지가와 인연으로 얼치기 역사학도가 되어 십 수년째 국내외 항일유적지를 더듬으며 꽤 여러 편의 책도 펴냈다.
1999년 6월 어느 날, 서초동 이영기 변호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나는 그분의 막내아드님을 20년 전에 담임했는데, 그 아드님이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작가와 독자로, 특히 그분은 내 작품의 후원자로 크게 도움을 받아왔다. 그날 전화한 요지는 느닷없이 나의 중국방문 의사를 물으면서 토요일 오후, 퇴근길에 당신 사무실에 꼭 들러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약속한 날 사무실로 들르자 이 변호사는 낯선 두 분을 소개했다. 한 분은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선생 증손 이항증(李恒曾, 현 광복회 경북지부장) 선생이었고, 또 다른 한 분은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무장투쟁의 선봉장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선생 손자 김중생(金中生) 선생이었다. 두 분은 같은 경북 안동 출신으로 고명하신 독립지사의 후손이었다.
그 해 연초, 이 변호사는 당신이 중국대륙의 항일유적지를 둘러보며 원로 독립지사를 만나보니까 느끼는 것도, 기록하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당신은 필력이 부족하다고, 나에게 중국대륙의 항일유적지 답사한 뒤 2세들을 위해 쉬운 독립운동사를 쓸 것을 권유했다.
그러면서 작가는 견문이 많아야 하고, 나라와 겨레에 대한 바른 이해와 민족애가 바탕이 되어 있어야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다는 말씀도 했다. 그때 나는 그 말씀에 공감하면서도, 어디 중국이 대전이나 대구처럼 가까운 곳도 아닌데다 언어도, 지리도 모를 뿐더러, 그 경비도 수월치 않을 것 같아 주뼛한 적이 있었다.
이 변호사는 고성이씨 족친(族親, 일가붙이)인 이항증 선생에게도 당신이 경비를 지원할 터이니, 이 참에 박도 작가와 동행하여 중국대륙 항일유적지를 답사하라고 권유하신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이항증 선생 증조할아버지 석주 이상룡 선생을 비롯한 안동의 유림들이 만주로 간 후의 행적도 더듬어 보고, 베이징에 사는 아흔의 독립운동가 원로 이태형(李泰衡) 선생도 만나 그분의 인생역정도 들어보고 오라고도 이르신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