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이 눈밭의 오두막집.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눈 천지여서 우리는 눈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장호철
여느 풍경이라면 언덕 위에 선, 그저 볼품 좋은 나무에 지나지 않았을 미루나무나 졸참나무, 떡갈나무 따위가 어울리지 않는 서양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이 언덕이 사계마다 연출하는 풍광 덕분이다. 그리고 이제 이들은 나목이 되어 눈 속에서 홀로 깨어 있는 것이다.
비에이의 사계를 다 만나지 못한 이들은 비에이의 사계를 평가할 자격이 없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스쳐 지나가는 걸음일지라도 여행자에겐 책임 지지 않고도 논평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 나는 비에이의 겨울이 다른 계절보다 훨씬 더 본질적이고 원형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우리의 한갓진 평가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에게 '비에이의 겨울'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방에서 온 여행자 앞에 비에이의 겨울은 아무도 밟지 않은 눈과 때 묻지 않은 새파란 하늘이 연출하는 '경이로운 풍경' 그 자체였다. 그것은 땅과 하늘의 경계를, 혹은 현실과 몽환의 구분을 무화시키는 서늘한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시키고 눈길을 달리면서 나는 현기증 같은 걸 느꼈다. 길가에 이어진 자작나무, 하늘과 땅의 경계에 들어찬 나무와 숲, 눈 덮인 지붕의 오두막집들... 가도 가도 끝없는 눈의 나라, 어디가 어디인지, 헤어날 길 없는 동심원을 맴돌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들곤 했기 때문이다.
바늘 같은 바람을 뚫고 우리는 패치워크 길을 한 바퀴 돌았고 호쿠세이의 언덕에 솟아 있는 전망공원에서 한숨을 돌렸다. 풍경이 자아내는 찬탄은 새롭게 나타나는 풍경에 대한 찬탄에 묻히곤 했다. 눈 속에서 몇 시간을 보내다 보니 나는 종종 광막한 설원에서 길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전망대로 돌아 다시 비에이 역으로 나오는 어느 언덕 아래서 차가 눈밭에 빠져 버렸다. 길가의 공터에서 차를 돌리는데 바퀴가 헛돌기 시작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차는 덩치가 작다. 셋이 뒤에서 밀고 운전대를 돌리며 용을 썼더니 간신히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중간에 두어 차례 한국 관광객들을 만났다. 이들은 대체로 택시를 이용하고 있었다. 이른바 '택시 투어'다. 시간당 5400엔. 비싼 편이지만 겨울 관광에 지불할 수밖에 없는 '비용'이다. 비에이는 엄청 넓은 지역이어서 도보 관광은 어렵기 때문이다. 그걸 확인하고 아이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역시 차를 빌린 건 탁월한 선택이었어요!"눈밭을 순례하다 보니 해는 이내 서편으로 기울어진다. 어두워지기 전에 얼마간 녹은 도로가 다시 얼어붙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 나는 조금 초조해졌다. 아쉽지만 홋카이도의 풍요를 대표하는 비에이의 자연을 담아온 사진가 마에다 신조가 만든 갤러리 다쿠신칸(拓眞館)은 생략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