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체협약 갱신체결 투쟁... 장기전으로 가다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81]11. 서울의 봄

등록 2015.02.06 10:18수정 2015.02.06 10:18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위대한 어머니 김봉준 작. 이소선 어머니 서거 추모그림 ⓒ 김봉준


10·26 이후 계엄하에서 정국은 '안개정국'으로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이에 민주세력은 민주화 일정을 밝히라고 요구하고, 대학에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마침내 1979년 11월 24일 민주세력은 YWCA 위장 결혼식을 통해 계엄철폐와 유신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반대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신군부는 오히려 민주세력을 탄압하고 마침내는 12·12 쿠테타로 권력을 찬탈하게 되었다. 신군부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의 요구는 날이 갈수록 더욱 더 거세어졌다. 1980년 새 봄. 대학가에서는 유신철폐, 계엄해제를 요구하는 시위가 이어졌고, 노동자들의 생존권 요구도 그치지 않았다.

이런 정세 속에서 청계피복노조도 매년 갱신 체결되는 단체협상을 그해 4월 초부터 시작했다. 단체협약 갱신 체결의 중요 내용은 임금인상과 퇴직금 전면실시다. 임금인상은 노동자들이 열악한 작업 환경에서 장시간 저임금으로 시달리며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도 어려운 형편을 개선하기 위한 요구였다.

퇴직금 전면실시는, 청계천 피복제조공장과 같은 영세 업체는 수십 년간 일을 하다가 퇴직을 해도 퇴직금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퇴직 이후에는 최소한의 생활조차도 어렵게 되어있다. 즉 당시 근로기준법상 퇴직금제도는 30인 이상 업체만 적용되다가 14인 이상 업체까지 적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용주들은 그것도 회피하기 위해 상시근로자의 숫자를 편법적으로 줄이는 등 온갖 수단을 쓰고 있었다.  이에 노조에서는 모든 사업장에 퇴직금을 적용하라는 요구를 내세운 것이다.

단체협약 갱신체결을 위한 노사협의회가 4월 초부터 계속 진행됐지만 사업주 측에서 성의를 보이지 않고 회의를 유회시키면서 노조 측의 힘을 뺐다.

이소선은 날마다 노조사무실에서 노사교섭 결과를 기다리며 좋은 소식이 전해지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나 기도와는 달리 매번 빈손으로 돌아오는 조합 간부들을 보면서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4월 7일, 이날 노조 측 교섭위원들은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노사회의장인 동화시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날도 마라톤 회의를 했지만 타결의 기미는 없고 시간이 지나자 사용주 측 교섭위원들은 하나둘씩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이에 노조 측 교섭위원들은 그 자리에서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로 철야 농성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노조간부들이 노사협의회 회의장에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조합원들은 작업을 마치고 농성장에 올라오려다 상가 경비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중견간부와 조합원들은 이날 저녁 도봉구 쌍문동 이소선의 집에 모였다. 이소선과 이들 조합원들은 투쟁을 통해서 요구를 관철시킬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8일 오후 1시부터 평화시장 옥상에 있는 노조사무실에서 농성할 것을 결의했다.

8일 오전 20여 명의 조합원들은 '노조간부 7명 단식농성에 돌입하다'라는 전단과 함께, 임금인상에 무성의한 사용주를 규탄하고 우리가 요구한 임금인상 등을 수락할 것을 요구했다. 아울러 정부에 대해서는 영세기업의 과중한 납세로 그 부담이 노동자한테 돌아와 영세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는 저임금과 실업이 늘어나고 있으므로 영세기업에 조세감면을 해 줄 것과 노동 3권보장, 노동자의 복직·복권을 조속히 단행하라는 내용의 격문을 상가 각 공장에 배포하고 오후 1시까지 노조사무실로 모일 것을 호소했다.

4월 8일 오후 1시, 이소선을 비롯 약 2백여 명의 조합원이 7.5평밖에 안 되는 노조사무실에 빽빽이 들어가 바리케이트를 치고 농성에 돌입하였다. 사무실 집기를 다 갖다가 문앞에다 바리케이트 치니 움직일 틈도 없이 농성장은 꽉 찼다.  이들 중에는 나이 어린 시다에서부터 임신한 아주머니도 있었다.

7.5평 노조사무실에 꽉 들어찬 노동자들은 서로의 살과 살을 맞대고 '무릎을 꿇고 사느니 보다는 서서 죽기를 원한다'는 '정의파' 노래를 불렀다. 노예이기를 거부하는 뜨거운 열기에 땀을 뻘뻘 흘리며 농성에 돌입했다. 평화시장 옥상 곳곳에 '임금인상하라!', '퇴직금을 전면실시하라!', '노동3권 완전 보장하라!', '노동자의 복직·복권 단행하라!' 등의 플래카드가 나붙기 시작했다.
 
이소선은 이 농성 투쟁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들이 굶지 않고 잘 버티려면 먹는 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를 걱정했다. 우선 급한대로 빵과 우유를 사오게 해서 노동자들한테 나눠주었다. 노동자들은 이 빵과 우유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첫날을 지새웠다.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새우잠을 자는 사람, 경비를 서는 사람, 도란도란 얘기하는 사람 등 저마다의 모습이다.

이소선은 이들을 가만히 내려보며 생각했다. 비록 못 배우고 가난한 노동자들이지만 이렇게 함께 싸우고, 함께 굶고, 서로 힘을 모아 외치고 노래함으로써 더 큰 힘이 되고, 의지가 되고, 그래서 서로를 사랑하고 동지적 결속이 다져지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다는 생각을 했다.

4월 9일, 농성소식을 듣고 계속해서 조합원들은 노조사무실로 모여들었다.  새로 모인 조합원들은 사무실 밖에서 연좌농성을 하며 임금인상을 외친다.  같은 시각 동화상가 옥상에서는 오후 3시에 단식하고 있던 노조간부 중 부녀부장 신순애가 졸도해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했다.
 
신순애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15년 가까이 시다부터 시작해 미싱사가 되었다. 1975년 시간단축 투쟁 무렵부터 노동운동을 하다 1977년 9월 9일, 결사투쟁 때 구속되어 1년 가까이 징역을 살고 나왔다. 평소 건강이 아주 좋지 않은 데다 그렇게 단식을 하고서도 졸도를 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했을 것이다.

이날 동화상가 옥상 노사회의장에서는 3시간 동안 회의를 했으나 사용주 측에서는 임금 15~22%만 인상하고 퇴직금, 상여금은 줄 수 없다고 하여 결렬되었다. 다음 날 회의를 하자는 여지는 남기고 끝났다.

4월 10일 오후3시, 6번째로 노사협의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이날도 몇 차례나 회의가 중단되고 타협안이 오갔으나 사용주 측에서는 농성을 풀라는 말만 할뿐 임금인상에 대해서는 의견을 좁힐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전갈이 농성장에 있는 이소선한테 전해져 왔다. 이소선은  "해산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임금인상이 중요한 것인데 사용주들은 임금인상에 왜 성의를 보이지 않는 것이냐?"며 분개했다.

"봐라, 저렇게 좁은 사무실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질식할 것만 같은데... 지들이 하다 지치면 저절로 풀이 껶여 자진 해산하겠지 하는 속셈인가 본데 누가 이기나 해 보자!"

근로감독관은 양측을 오가며 임금 28%인상,상여금 150%의 중재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 중재안은 노사 양측이 모두 거부했다.

사용주 측에서는 조정신청을 내겠다고 하고, 노조 측에서는 보위법을 철폐하고 노동3권을 보장하라고 요구하는 마당에 직권조정이 있어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계속해서 투쟁할 것을 선언하고 회의장을 퇴장했다. 그리고 4일간의 단식농성을 해제하고 노조사무실의 조합원과 합세하였다.

조합사무실에서 농성하고 있는 조합원들은 3일간의 철야농성으로 얼굴이 창백해진 데다 세수도 제대로 하지 못해 얼굴에 때가 묻고 목이 쉬어 있었다.

장기전으로 돌입해야 할 상황에 처했다. 그래서 당장 솥단지를 걸어놓고 쌀을 가마니째 사다가 불을 피워 밥을 짓고, 계속해서 늘어나는 농성참가인원을 사무실 밖에서 떨게 할 수 없기 때문에 평화시장 옥상에 천막을 치고 간단하게 집을 지었다. 이렇게 장기적으로 싸울 채비를 갖추었다.

a

1980년 4월, 단체협약갱신체결을 위한 농성투쟁을 평화시장 옥상에서 벌이고 있는 청계피복노조 원들 ⓒ 청계피복노조


덧붙이는 글 [이소선 평전]은 매일노동뉴스와 함께 연재합니다
#이소선 #전태일 #청계피복노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종영 '수사반장 1958'... 청년층이 호평한 이유
  2. 2 '초보 노인'이 실버아파트에서 경험한 신세계
  3. 3 '동원된' 아이들 데리고 5.18기념식 참가... 인솔 교사의 분노
  4. 4 "개도 만 원짜리 물고 다닌다"던 동네... 충격적인 현재
  5. 5 "4월부터 압록강을 타고 흐르는 것... 장관이에요"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