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싶은 음식 상상하며... 귀양 간 허균의 '찌질'한 면모

[오래된 마을 옛담을 찾아⑨] 익산 함라마을 가는 길①

등록 2015.01.15 11:05수정 2015.01.15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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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라마을 정경 기찻길이 함라마을을 빗겨 생기는 바람에 변화의 물결을 타지 않아 옛마을의 모습을 간직하게 되었다. 하나를 내주었으니 하나를 얻은 게다. 인심 후하다는 함열은 이제 줄 것보다 보여줄 게 많은 마을이 되었다 ⓒ 김정봉


인심은 함열(咸悅)이요, 풍속은 화순(和順)이라 했다. 50여 호남고을을 노래한 <호남가>에 나오는 대목이다. 지금은 익산에 들어가 힘 못쓰고 있지만 함열은 <호남가>에서 어엿하게 한 가락 차지한 고을이었다. 함열은 익산 안의 함열이 아니라 익산과 대등한 함열이었다.

정치·행정 중심지였던 함열


삼한시대 마한 54소국 중 함열은 함해국(咸奚國), 익산은 건마국(乾馬國)으로 불렸다. 백제 때는 고도익산(古都益山)인 금마·왕궁면이 금마저였고 함열은 감물아현, 조선 때 함열현이었다. 현재 함라면, 황등면, 함열읍, 웅포면, 성당면, 용안면을 아우르는 곳이다. 고도익산이 익산 동남의 정치·행정 중심지였다면 함열은 서북의 중심지였다.

예전 함열의 중심지는 오늘날 함열읍이 아니라 그 서쪽, 함라마을이 있는 곳이었다. 함열읍은 역이 들어서기까지 한적한 시골마을이었다. 함라마을 만석꾼들이 마을에 기차가 들어오는 것을 극구 반대해 함열읍에 역이 생긴 것이다. 역이 생긴 후 함열읍은 번영을 누린 반면 함라마을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하나를 잃으면 얻는 것도 있다. 기찻길이 함라를 비켜서는 바람에 함라는 옛 마을의 모습을 간직하게 되었다. 인심이 좋아 베풀기 좋아하던 함라는 이제 내어줄 것은 없어도 보여줄 게 많은 마을이 되었다. 보여줄 게 많은 오래된 마을, 지금 함라를 보러 가고 있는 것이다.

함라마을 가는 길 성당에서 함라로 가는 길에 만난 갈산정미소. 기름진 땅, 함열답게 키 작은 마을에 정미소가 우뚝 솟아 있고 누가 모를까봐 담에 성당초등학교를 알리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 김정봉


함라의 길목, 성당포(聖堂浦)

함라마을은 강경을 거쳐 들어간다. 부여를 적신 금강 물은 강경, 성당, 웅포 곁을 흘러 군산으로 흘러간다. 강경 물을 제일 먼저 손 내밀며 환영한 곳이 함열 성당포다. 고려부터 조선 후기까지 인근 8개 읍 세곡을 관장하던 성당창(聖堂倉)이 있던 곳이다.


성당포구 정경 할 일 없이 갈 길 잃어 포구에 발 묶인 몇 척 배는 강태공들의 ‘멋 동무’가 되고 있다 ⓒ 김정봉


허균이 쓴 <함열현객사대청중건기>에는 '함열 고을은 외떨어져 호남의 바닷가에 있다'라 돼 있고, 조선의 문신 임종선은 함열 용안을 두고 '기름진 들녘이 바다에 잇닿아 있다'라 했다. 모두 함열을 두고 바다를 얘기하고 있다.

금강은 지금의 물줄기와 비교도 안 될 만큼 넓어 거의 바다와 같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 때 성당포는 60여 척의 조운선을 보유했다고 하니 과연 그럴 만도 하겠다. 참고로 예전 강경포구 사진을 보면 마치 바닷가 항구처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강경포구의 옛날 조선 3대시장이었던 강경시장을 배경으로 크게 번성했던 포구다. 생선잡고 해초 뜯을 때는 비린내가 온 마을을 뒤덮었다하고 큰 배, 작은 배는 밤낮으로 포구에 담처럼 벌여있다 했다. 어느 바닷가 풍경을 얘기하는 것처럼 들린다(2005년, 강경 어느 음식점 사진 재촬영) ⓒ 김정봉


이제 이것도 옛말이다. 예전 포구의 모습은 사라졌다. 할 일 없어진 몇 안 되는 배는 갈 길을 잃었고 조창은 온데간데 없고 언덕 위 500년 묵은 느티나무와 포구 길 옆 은행나무가 옛 일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성당포 느티나무 포구를 만나기 400미터 전에 금줄 두르고 서있는 언덕 위 느티나무, 이제 조운선(漕運船)의 무사운항 대신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빌고 있다. 언덕 아래 은행나무와 함께 옛 일을 나누어 기억하고 있다 ⓒ 김정봉


옛 함열의 중심지, 함라마을

성당포에서 함열관아가 있던 함라마을까지는 20리 길이다. 성당창에 모인 곡식을 잘 관리하고 운반하는 일은 함열현감의 중요 업무 중에 하나였다. 함열관아는 '함라어린이집' 근처에 있었다 하는데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어린이집 아래 널따란 공터 한편에 관광안내판마냥 관아터를 알리는 팻말이 박혀 있다. 다만 600여 년 전에 문을 연 함열향교가 북쪽 언덕에 남아 마을을 빛내고 있다.
   

함열향교 함열관아는 모두 헐려 사라지고 600여 년 전에 문 연 향교만 남아 함라를 빛내고 있다 ⓒ 김정봉


마을 한가운데에 다른 마을에서는 좀처럼 구경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 함라노소(咸羅老所)다. 요새 노인당쯤 되는 곳인데 예전에는 그게 아니었다. 관아가 공적인 행정기관이었다면 노소는 비공식적인 자율규제, 주민자치통치기관이었다.

함라노소 가는 흙돌담 길 노소는 담 길이 끝나는 곳, 마을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았다 ⓒ 김정봉


이 마을에 부임한 현감은 일종의 신고식으로 노소에 들러 자신의 이름을 남겼고 마을사람들은 유교범절에 어긋난 행동을 하면 노소의 규범에 의해 제재와 벌을 받았다 한다. 1682년에 개설되었으니 350년쯤 되었다. 노소 안에 '300년 기념비'도 세워져 있다. 관아는 사라졌지만 노소는 정원과 함께 그 터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만큼 정신적으로 마을을 지탱해온 소중한 장소였다.

함라노소 푸석해진 했어도 정원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함라마을의 정신을 보는 것 같다 ⓒ 김정봉


허균(許筠, 1569-1618)과 김육(金堉,1580-1658)

함라 어린이 집 어린이집 일대가 함열관아였고 허균 유배지는 함열관아에서 얼마 안 떨어진 현 ‘함라어린이집’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그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 김정봉


함라마을은 허균의 유배지였다. 그의 나이 43세, 1611년 정월에 함열 땅을 밟았다. 유배지는 '함라어린이집'으로 알려지긴 했지만 흔적은 없다. 이곳에서 문집<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를 엮고 <도문대작(屠門大嚼)>을 썼다.

<성소부부고>는 '성소(허균)의 장독대를 덮을 만한 정도의 보잘 것 없는 책'이라는 뜻이고 <도문대작>은 '고깃간 문 앞에서 입 다시는 소리를 크게 내며 고기를 씹어 먹는 시늉을 하는 것'으로 좋아하는 것을 실천하지 못하지만 상상만으로 위안을 삼는다는 의미다. 책 제목이 기발하면서 재미있다.

<도문대작>은 미식가이며 맛 좋은 음식을 많이 먹어본 허균이 유배지에서 전에 먹어보았지만 마음대로 먹지 못하는 좋은 음식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 내려간 책이다. 목민할 마음만 있고 실행할 수 없기 때문에 심서(心書)라 이름 붙인 정약용의 마음이 느껴진다. 

이 마을에 '김육불망비'가 세워진 점이 특이하다. 김육이 누구인가? 대동법하면 떠오르는 인물이다. 호남지역 대동법 실시를 주장하였고 죽어서도 대동법 확대를 왕에게 청하던 그였다. 마을사람들은 그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불망비를 세웠다. 서울 출생, 김육은 함열에 아무런 연고도 없다. 그런데 익산에는 함열과 용안 두 곳에 김육 불망비가 세워져 있다. 모두 조창(漕倉)이 있었던 고을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이 마을 사람들의 김육에 대한 고마움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간다.

허균 유배지에 김육 불망비가 있다는 점이 눈길을 잡는다. 김육은 허균의 10여 년 후대 사람이고 서로 교분은 찾을 수 없지만 둘을 비교하는 글들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허균의 이상과 김육의 현실이 서로 교차되기 때문이다. 허균의 호는 교산(蛟山), 김육의 호는 잠곡(潛谷)이다. 꿈을 이루기 위해 발버둥치는 이무기(蛟), 교산과 끊임없이 자맥질(潛)하며 때를 기다리는 현실론자, 김육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김육불망비 서울출생인 김육, 함열에 아무런 연고가 없다. 함라와 용연 두 곳에 김육불망비가 있다. 이 마을사람들의 김육에 대한 고마움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간다 ⓒ 김정봉


백성은 교화나 양육의 대상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정치적인 힘을 가진 존재로 인식한 허균, <홍길동>의 꿈으로 표현되는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사상을 갖고 있었다. 그에 반해 백성은 안위를 살펴줘야 하는 대상으로 인식하고 민생과 백성의 안위에 중점을 둔 김육은 현실에 충실하며 자기의 생각을 뚝심있게 실천한 사람이었다. 

함열에 허균의 자취는 흔적없이 사라진 반면 아무런 연이 없는 김육은 불망비를 갖고 있다. 역적의 오명을 쓰고 능지처참 당한 허균, 후대사람들은 그의 이름조차 입에 담기조차 꺼렸고 허균과 연을 지우려고 애썼다. 함열에 그의 자취가 남아있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 모르겠다.

그러나 300년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허균의 '이상'은 후대의 '현실'이 되었다. 이상을 꿈꾼 허균이 없었다면 역사는 제자리에 맴돌았을 것이다. 비석이 역사의 평가를 대신하진 않는다.
덧붙이는 글 2014.12.29-30, 익산, 정읍, 담양, 강진에 다녀와 쓴 글입니다.
#함열 #함라마을 #성당포 #허균유배지 #김육불망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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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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