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운동=무능'? 이런 도식은 용납할 수 없어"

[손병관의 인물현대사⑤] 새정치 전대 출마하는 박우섭 인천 남구청장

등록 2015.01.16 15:51수정 2015.01.16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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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우섭 인천남구청장. ⓒ 권우성


박우섭은 2월 8일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 경선에 출마한 8명 중 1명이다.

경쟁자들은 모두 여의도 국회에 사무실을 둔 국회의원이지만 그는 현역 구청장(인천 남구)이다.

지난 4일에는 당 소속 기초단체장 81명 중 77명이 대전역에 모여 그를 후보로 추대하는 퍼포먼스도 벌였다. 뭔가 특별한 게 있어보였다. 인물현대사가 13일 그를 만난 이유다.

1955년 7월 22일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당진에서 자란 박 구청장은 1972년 서울대 미생물학과에 입학했다. 시인 김정환(영문과)과 황지우(미학과), 전 국무총리 이해찬(사회학과), 민주당 전 대통령후보 정동영(국사학과) 등이 그의 동기다.

그는 대학에 들어가기 전부터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생명의 신비, 특히 창조론을 과학적으로 입증해보겠다는 야심찬 꿈이 있었다.

그러나 신입생 박우섭을 사로잡은 것은 문리대 서클 '연극회'였고, 당대의 많은 대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이곳에서 '문화'뿐만 아니라 '사회'를 배웠다. 1학년 가을 '10월 유신'으로 국회가 해산되고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권을 부여하는 헌법이 제정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다.

서울 도심 한복판인 혜화동에서 크고 작은 시위로 박 대통령의 신경을 건드렸던 서울대는 1975년 1월 20일 남쪽의 관악산 골짜기로 옮겨졌고, 학교 입구에는 학생 시위를 막기 위한 목적으로 '동양 최대' 규모의 관악파출소가 들어섰다.


그해 4월 3일 오후 1시로 예정된 학내 시위는 관악산으로 이전한 후에도 서울대 학생운동의 전통이 끊어지지 않았음을 박정희정권에 보여주는 '선전포고'의 장이었다. 그에게 이날의 '현장 지휘' 임무가 부여됐다. 시위가 끝나면 엄한 학사징계와 감옥행을 감수해야하는 일이었다.

"이제 4학년이니 졸업하려면 공부를 해야 하는데 연극반 동기 박인배(물리학과 72학번, 세종문화회관 사장)가 '사람을 모아달라'고 부탁해서 내가 나서게 됐다"라는 게 박 구청장의 설명. 2000여 명이 시위에 참여하고 700~800여 명이 봉천동 고개까지 진출했다. 시위 현장에서 붙잡힌 125명 중에는 훗날 이명박 정부의 기획재정부 장관이 된 박재완 교수(성균관대 행정학과)도 있었다. 그는 이로 인해 '구류 29일'의 값비싼 댓가를 치렀다.

8일 뒤 서울대 농대 집회에서 축산학과 김상진씨가 시국선언문을 낭독한 뒤 할복자살하며 4·3 시위의 사회적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시위를 주동하고 달아난 박우섭으로 인해 가장 곤란해진 사람은 그의 아버지(2005년 별세)였다. 아버지는 정년 퇴임을 앞둔 베테랑 경사였다.

"아버지를 내세워 자수를 설득하는 통에 경찰서에 자진출두할 수밖에 없었다. 곧바로 징집됐다(중이염 판정으로 1년 6개월 단기사병 복무). 아버지는 처음에 내가 하는 일에 가장 강하게 반대했지만, 훗날 충남 당진에서 <한겨레> 지국장을 맡을 정도로 내 편에 서 주셨다."

'학원 소요사태' 수배자 명단에 오르다

1976년 가을 전역한 그는 갈 곳이 없었다. 서울대는 그가 징집될 무렵 그를 퇴학시켰다. 운 좋게도 그는 대한항공 고졸사업 공채에 응시해 합격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회사원 생활은 생계의 어려움은 덜어줬지만 그가 정말로 하고싶은 일은 아니었다. 진짜 보람은 대학시절 연극회의 연장이었던 연우무대에서 나왔다. 1977년 창단된 연우무대는 동일방직이나 청계피복노조 증 노동현장을 소재로 하거나 현실풍자적인 작품들을 내놔 우리나라 공연 문화의 흐름을 바꿔놨다.

1979년 10월 17~18일 창작소극장에서 무대에 올린 <한줌의 흙>은 1977년 4월 20일 광주 무등산에서 구청 철거반원들을 살해한 '무등산 타잔' 박흥숙 사건을 다룬 재판극이었다. 그는 이 작품의 대본을 쓰고, 검사 역을 맡았다. 이듬해 3월 그와 김명곤 전 문화부 장관이 출연한 <장산곶매>(황석영 원작 이상우 연출)는 연우무대 스스로도 초기 대표작으로 꼽는 작품이다.

그는 연우무대 활동을 위해 오후 6시 퇴근해서 밤새 극 연습을 하고 아침에 출근하는 일상을 반복했다. 훗날 치른 고역을 생각하면, 이런 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1978년 9월 13일 서울대 교내 시위를 기획한 후배 이우재, 성욱에게 도피처를 제공했다가 같은 해 11월 경찰에 체포됐다. 한 달간 구치소 신세를 진 뒤 풀려났을 때 그는 이미 대한항공에서 쫓겨난 신세였다.

지난해 12월 12일 박 구청장에게도 낯익은 얼굴이 TV에 나왔다. '땅콩 리턴' 사건의 장본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을 수행한 한진의 서용원 대표이사가 그의 회사 직속상관이었다. 박 구청장이 그때 후배들을 숨겨주지 않았다면 그 또한 회사에 잘 적응해 더 높은 지위에 올랐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한편으로 대한항공 퇴사는 연우무대 등 문화 운동에 전념할 계기였지만 1980년 '서울의 봄'이 끝나자 그는 다시 '학원 소요사태' 수배자 명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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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18일 계엄령 확대 후 배포된 수배전단 속의 박우섭 구청장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전두환의 신군부는 그를 용산고 1년 선배이자 서울대 동기인 이해찬과 서울대 총학생회의 '연결 고리'로 지목했다.

그는 긴 잠행에 들어가면서 연극 무대와도 영영 이별하게 됐다. 인생에서 큰 의지처가 된 부인 이미영씨와 결혼한 것은 이 무렵의 일이다.

이씨는 1970년대 민주노조 운동의 싹이 튼 반도상사의 노동자 출신으로 결혼 당시에는 직장 폐쇄로 마땅히 다닐 곳이 없는 상태였다.

학생운동 출신 수배자와 노동운동 출신 해고자는 그렇게 사랑 하나로 맺어졌다. 이들의 혼배성사(1982년 8월 25일 인천 주안2동 성당)에는 김근태·인재근 의원 부부가 증인으로 참석했다.

1982년 수배자들이 모여 일을 하나 꾸몄다. 소준섭(국회도서관 조사관)이 쓴 글을 인천 구월동의 작은 아파트에서 민종덕이 타이핑하고 박우섭이 등사했다.

42쪽 분량의 팜플릿에는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린다는 의미에서 '광주백서'라는 이름이 붙었다.

'광주백서'는 황석영이 이를 다듬어 1985년 5월에 내놓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일명 '넘어넘어')로 더욱 유명해졌다.

일체의 언론 보도가 통제된 상황에서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던 광주의 진실도 기록으로서의 생명을 얻게 됐다.

30억 쓰고도 패한 선거... "그런 보궐선거는 처음"

전두환 정권의 유화책으로 수배가 풀린 뒤에도 그에게는 민청련 운영위원장(1986)이나 민통련 사무차장(1987), 전민련 대변인(1990) 등 '민'자가 많이 들어가는 재야단체들의 실무자 자리가 돌아갔다.

1991년 김대중의 신민당과 이기택의 민주당이 합당한 후 그에게도 직업정치인으로서 '당직'이라는 게 생겼다. 9월 18일 김부겸 전 의원, 윤재걸 전 <한겨레> 기자와 함께 민주당 부대변인으로 임명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당시 대변인)이나 박지원 의원(수석부대변인) 등 1년 8개월의 부대변인 생활 동안 모신 정치인들도 많았다.

"재야단체 시절에는 신문에 우리 얘기 한 줄 실리는 게 너무 어려웠는데, 정당에 들어가서도 야당 입장이 많이 보도 안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내가 쓴 논평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게 되는 것에 큰 자부심이 있었다. 정치인은 과격한 말이라도 써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말의 수위보다도 품격을 유지하는 게 문제 아닌가?"

그러나 다른 정치인들처럼 선출직 공무원의 길, 특히 공천을 받는 것은 큰 어려움이었다.

1992년 14대 총선에서는 인천 북을 지역구 공천에서 이기택 계의 후보에게 밀렸다. 부대변인을 함께한 김부겸 전 의원이 공천에서 처음 물을 먹은 것도 이때였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는 김대중의 국민회의에 합류해 인천 남구갑 공천을 따냈지만, 민주자유당 심정구 의원에게 1083표 차이로 석패했다. 국민회의와 민주당의 분열로 야권 표가 나뉜 게 가장 큰 패인이었다.

박 구청장이 선대본부장을 맡았던 1999년 3월 30일 안양시장 보궐선거는 정치인으로서 회의를 느끼게 한 사건이었다. 당시 집권당이었던 국민회의는 안양에만 30억 원 이상의 선거자금을 뿌리고도 패배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선거 후에 보고를 받고 '왜 그렇게 돈을 많이 썼냐?'며 화를 냈다는 기사가 5월 26일 <한겨레>에 나가자 국민회의 지도부는 신문사를 명예훼손 고소했다가 두 달 뒤 슬그머니 취하해버린다.

"예전에도 총선과 대선 몇 번 치렀지만 그런 보선은 처음이었다. 중앙당에서 돈이 많이 풀렸다는 얘기가 돌자 '돈 좀 주면 조직을 움직여주겠다'는 요청이 정말 많았다. 그걸 거절하기 힘들었다. 지금은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하지만…."

그가 민주당을 떠난 이유

민주당 계열 야당과의 인연은 그가 2000년 16대 총선에서 무소속 출마해 낙선하면서 5년 가까이 끊어졌다. 그때 당선된 한나라당 민봉기 의원의 영입 제안으로 2년 뒤 민선 3기 지방선거에서는 한나라당 후보로 남구청장에 당선됐다. 그러나 그가 민주당을 떠난 데에도 나름의 이유는 있다.

"2000년 총선에서 나 대신 관료 출신을 전략공천했다. 그런데 그 논리가 '주류세력 표 얻으려면 (재야 출신보다) 관료가 낫다'는 것이다. 나도 민주화운동 안 하고 회사 다니면서 체제에 순응했으면 그분보다 (경력이) 못할 게 없었다. 그런데 그런 것 다 포기하고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무능하다고 치부하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세 번의 도전 끝에 얻은 첫 승리였지만, 그에게 한나라당은 '썩 잘 어울리는 옷'이 아니었던 것 같다. 김근태 의원 등 그의 오랜 동지들은 2003년 출범한 열린우리당에 훨씬 많았다. 그는 2004년 12월 23일 열린우리당에 입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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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6월 30일 김천교도소에서 출소한 김근태 전 의원의 환영행사에 참석한 박우섭 구청장 (오른쪽 끝)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열린우리당 후보로 출마한 2006년 구청장 선거에 낙선한 뒤 그는 2010년과 2014년 구청장 선거 때 민주당 후보로 내리 당선됐다. 그는 "그것(2000년대 중반의 당적 변경)이 내게 핸디캡인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한 행위에 비해 우리 당 사람들이 관용적인 편"이라고 말했다.

올해 2월 전당대회는 그에게는 또 한 번의 도전이다. 그의 롤모델은 8년간 프랑스 중부의 튈 시장과 사회당 대표를 겸임한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다. 지역에서의 정치실험들이 중앙에 성공적으로 접목돼야 나라의 정치 문화도 바뀔 수 있다는 주장이다.

선거 때마다 공천으로 폭발하는 야당의 고질적인 계파 갈등에 대해서도 그는 지방의 시각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2012년 총선과 작년 7·30 재보선 모두 공천을 썩 잘하지 못해서 선거 패배로 이어졌는데 각 시도당에 공천권을 나눠주는 게 합당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중앙당은 지역 사정을 잘 모르는데, 인천시에서 보면 사람에 대한 평판이 어떤 지 알 수 있다. 중앙당은 지역당보다 덜 부패하고 더 유능하고 합리적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 지역 정치는 영영 중앙에 종속되는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다가 지역에서 금품이든 자질이든 문제 터지면 전체 선거판에 문제가 될 수 있는데'라는 질문에 그는 "문제가 터지면 시도당이 책임져야죠, 당장은 그게 전국의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만…"이라고 답했다.

그는 '대학 동기' 정동영 전 의원의 탈당에 대해서는 "자기 신념에 따라 정치적 결단을 내린 것은 뭐라 할 수 없다"라면서도 "다만, 사익을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본인은 물론, 국가에도 별 도움이 안된다"라고 잘라 말했다.
#박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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