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상-보상 구분 못한 대법원... 헌법재판소 때문?

"민주화보상법 문제없다" 기습 판결... 헌재 내란사건 결정에 선제대응했나

등록 2015.01.23 17:36수정 2015.01.23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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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는 과거사 청산 문제에서 철저히 '국가의 편'에 서기로 한 것일까.

지난 22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고영한 대법관)는 1974년 국군 보안사령부가 조작한 '문인간첩단'사건 피해자들의 국가배상책임을 인정한 하급심 판결을 취소하고 직접 판결을 내렸다(파기자판). 피해자들이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민주화보상법)' 18조 2항에 따라 보상을 받았다면 국가와 화해한 셈이므로,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은 없다는 것이었다.

민주화보상법 18조 2항은 '이 법으로 보상받는 경우 재판상 화해가 성립된 것으로 본다'고 돼 있다. 지난 2014년 3월 대법원 3부(주심 민일영 대법관)는 민주화운동 관련자인 '동일방직' 전 노조원 22명의 국가배상금 소송에서 이 조항을 근거로 민주화운동 보상금을 받았다면 국가가 따로 배상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보상은 국가의 합법행위로, 배상은 국가의 불법으로 발생한 손실을 보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둘의 개념은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최고법원은 민주화보상법에서만큼은 보상과 배상이 같다며 교통정리는커녕 논란만 키웠다. 결국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19부(부장판사 오재성)는 지난해 6월 "이 조항은 합리적인 이유 없이 국가배상청구권을 제한한다고 의심할 상당한 이유가 있다"며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했다(관련 기사 : 민주화운동 국가배상청구 막은 대법원... 헌재는?).

대법원의 기습... '민주화보상법 18조 2항 문제없다'

그런데 22일 대법원은 헌재 판단이 나오기도 전에 민주화보상법 18조 2항을 둘러싼 논쟁에 종지부를 찍어버렸다.

다수의견을 낸 양승태 대법원장과 신영철, 민일영, 이인복, 박보영, 김신, 조희대, 권순일 대법관은 '민주화운동 보상금=국가배상금'이라며 보상과 배상의 경계를 없애 버렸다. ▲ 민주화보상법의 입법취지나 관련 내용, ▲ '보상금을 받은 때에는 그 사건에 관해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다시는 (보상금 등을) 청구하지 않을 것을 서약한다'는 보상결정서 양식 등을 볼 때 민주화운동 관련자가 입은 모든 피해를 두고 국가가 지급하는 것이 민주화운동 보상금이라는 이유였다.


다수의견의 다른 근거 역시 형식논리만 따진 결과물이었다. 8명의 대법관은 민주화보상법 2조 2호가 '민주화운동을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은 자'를 보상 대상자로 정했을 뿐 '어떻게 유죄 판결을 받았는가'를 따지지 않는 점에 주목했다.

이들은 판결문에서 "민주화보상법이 유죄판결에 이르게 된 경위를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적법한 형사절차에 따라 유죄 판결을 받은 경우뿐만 아니라 수사기관의 불법행위로 유죄 판결을 받은 경우도 생활지원금 지급 대상이 된다"며 "이 역시 18조 2항의 사례에 해당한다"고 했다. 또 재심으로 국가의 불법행위가 명백히 드러났다 해도 민주화운동 보상금을 받았다면 그 손해를 충분히 배상받은 셈이라고 덧붙였다.


이상훈, 김용덕, 고영한, 김창석, 김소영 대법관은 이 다수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재심 무죄 판결은 법원이 과거 사건의 수사부터 판결에 이르는 과정에 불법행위가 있었다고 인정하는 것으로 절차에 문제 없이 유죄 판결이 나온 사안과 법적 의미가 다르다. 그만큼 피해자가 느낄 억울함의 정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민주화운동 보상금은 당사자가 얼마나 억울하느냐를 떠나 정해진 기준대로 지급된다. 정신적 손해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셈이다.

소수의견은 피해자들이 보상금 신청 당시 재심 무죄 판결로 국가배상금을 청구할 길이 열릴 줄 예상하지 못한 점도 인정했다. 민주화보상법은 2000년에 만들어졌지만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 제정으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가 세워진 뒤에야 진실 규명과 재심 청구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5명의 대법관은 또 대법원이 그동안 과거사 사건에서 국가의 책임을 폭넓게 인정해 왔는데도 민주화보상법을 이유로 피해자들의 국가배상금청구권을 제한하는 것은 공평하지도, 정의하지도 않다고 지적했다.

꾸준히 거꾸로 가는 사법부의 과거청산

민주화보상법 18조 2항 위헌법률심판제청신청을 진행한 이영기 변호사는 23일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대법원이 헌법재판소의 존재와 위헌법률심판 제청 절차 자체를 무시하는 초헌법적인 판결을 내렸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소수의견이 지적한 법리 문제도 있지만, 더 큰 문제는 생활이 어려워 민주화운동 보상금을 받은 분들이 이 때문에 국가배상금을 못 받는 역차별을 당하게 생겼다"고 우려했다. 이어 "이건 법리적으로나 일반 상식에 비춰 봐도 말이 안 되는 일인데, 대법원은 형식적이고 기계적인 판결을 내렸다"며 "헌재가 내란사건 전에 정당해산 결정을 하니까 이번엔 대법원이 먼저 기습 판결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황당해했다.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긴급조치 피해자 변호인단에 참여하고 있는 조영선 변호사 역시 이번 판결을 대법원의 메시지라고 해석했다. 그는 "지금 하급심 법원에서 이 사건 조항을 두고 헌재가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 기다리고 있다"며 "대법원은 '무슨 헌재 결정을 기다리냐, 우리가 최고법원으로서 전원재판부에서 판단했으니 빨리 재판하라'고 한 것"이라고 했다.

결국 피해는 고스란히 과거사 피해자들에게 돌아간다. 조 변호사는 현재 국가배상금 소송을 진행 중인 과거사 피해자들 상당수가 민주화운동 보상금을 받은 만큼, 이들이 패소할 가능성이 높다고 걱정했다. 또 "대법원에서 어떻게 보상과 배상을 구분 못했겠냐, 이건 정말 아니라고 하기 위해 법 논리를 세운 것이다"이라며 "사회정의에 부합하지 않는 지극히 정치적인 판결"이라고 비판했다.
#대법원 #과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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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정치부. sost38@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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