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안진 조선족 낡은 초가집
박도
그밖에도 일대의 호룡산(虎龍山), 빈안교(賓安橋) 등도 항일전투지였다고 말했다. 유적지 답사가 끝나자 왕일 진장은 빈안진 여러 곳을 보여주면서 공장 건설에 아주 적합한 곳이라며, 나에게 투자유치를 권유했다. 아마도 내가 남조선에서 온 대단한 유력자로 보인 모양이었다. 나는 속으로 쓴 웃음을 지우며 그의 말에 고개만 끄덕였다.
오후 2시 40분에 빈안진을 출발했다. 김 기사는 돌아오는 길은 오전과는 달리 아성(阿城)을 경유, 그곳의 명소를 둘러본 뒤 오후 5시 30분에 약속장소인 하얼빈 시내 중앙대가 모던호텔에 도착했다. 그 시간에 맞추어 막 도착한 서명훈·김우종 선생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김우종 선생은 다음날 경성현 허형식 장군 희생지는 멀기에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한다고 하기에 나는 그 자리에서 김 기사를 돌려보냈다.
그런 뒤 우리 세 사람은 중국 고전음악이 은은히 흐르는 찻집 외진 곳에서 허형식 장군의 행적 이야기를 나눴다. 두 분 선생은 그새 관련 서류 복사물을 나에게 건네면서 허 장군의 항일투쟁사를 들려줬다.
일본영사관 습격사건허형식이 북만에서 항일 명장으로 떠오르게 된 계기는 '1930년 5월 1일 하얼빈 일본영사관 습격사건' 또는 하얼빈 '5·1절 반일시위사건' 때문이었다. 중공당 만주성위원회에서는 1930년 5월 1일, 즉 메이데이(May day)를 앞두고 중공당 만주순시원 임중단(林仲丹, 중국인 본명 張浩)을 통하여 붉은 5월 투쟁계획을 세울 것을 당 조직에 하달하였다.
이 과업을 부여받은 이극화(조선인 李克和, 원명 洪南杓)는 아성에 있는 조선족소학교에서 비밀회의를 소집하여 1930년 5월 1일 '5·1절' 시위와 함께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관 앞에서 항의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허형식은 황산주자 일대의 군중을 동원하고, 취원창 일대의 군중은 박만주 동지가 책임지고 동원키로 했다.
4월 30일 허형식은 황산저자 일대의 청년 수십 명을 데리고 하얼빈에 갔다. 이날 하얼빈에 모인 농민들과 청년당원들은 2백여 명이나 되었는데, 인근 아성, 해구, 평방, 황산저자 등지에서 온 이들이었다.
그런데 막상 5월 1일 오전에 비가 내린 데다가 애초 참여키로 한 하얼빈시 청년학생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자 지방에서 올라온 일부 청년 및 농민들은 불만을 터뜨린 뒤 100여 명만 남게 되었다. 이들은 각기 분산하여 남강로 추림상점 앞에 모여 거기서 10시 정각에 항의 시위키로 하였다. 허형식은 그날 현장에서 시위 책임자로 선출되었다. 허형식은 조선공산당 선전부장 양환준(梁煥俊)과 상의한 결과 하얼빈 일본총영사관 앞에서 시위한 뒤 곧장 영사관을 습격하기로 계획을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