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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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나 소설가들은 전혀 허무맹랑한 얘기는 쓰지 않는다. 어떤 작품이건 대부분 그 배경인물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허형식을 알게 된 1999년 이후 여러 증인들을 만났다. 그분들은 한결같이 허형식은 키가 크고 무척 잘 생겼으며, 북만주에서 늘 백마를 타고 다녔다고 말했다.
많은 여성들이 허형식의 인물과 인품, 그의 전투력과 용맹성에 반해 그를 흠모하며 따랐다는 일화도 전해 주었다.
일제강점기 1930년대 말, 만주 여행을 하던 이육사는 독립운동 자금책으로 활약한 외삼촌 허규(許珪)와 함께 동북항일연군 허형식 장군을 만주 전구에서 만났다. 이육사는 인척이기 이전에 한 독립군 전사로서, 백마를 탄 허형식의 인품에 매료되어 그를 흠모한 나머지 시 <광야>를 읊었다. 이 시에서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허형식 장군으로, 그가 조국에 광복을 가져다 달라고 노래했을 것이다.
마침내 군장이 되다1939년 4월 12일, 중공당 북만성위는 제2차 확대회의를 열고, 김책을 서기로 선출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새로운 정세에 대비코자 동북항일연군 제3군, 6군, 9군, 11군을 기초로 제3로군을 만들었다. 제3로군은 총지휘 장수전(이조린), 정치위원 풍중운, 참모장 허형식으로 편성했다. 곧 조상지가 소련에서 돌아오지 못하게 되자, 마침내 허형식은 제3군장을 겸하게 되었다.
1940년 봄, 허형식 군장은 소부대를 거느리고 풍락진을 습격하여 경찰들을 무장 해제시키고, 진장(鎭長, 한국의 면장에 해당)을 생포하였다. 허형식 부대원들은 은행과 창고를 털어 물자와 양식을 몰수한 뒤 그곳 인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1941년 여름, 일제는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관동군을 40만 명에서 76만 명으로 급속히 증가시키고 만주에 전시상태를 선포했다. 그런 뒤 후방치안을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또 다시 항일연군을 대대적으로 토벌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항일연군의 활동은 극도로 곤란에 빠지며 희생자와 투항자는 더욱 늘어났다. 이런 상황에 이르자 제3군 부대원 대부분은 장수전, 풍중운 지휘 하에 소련 경내로 들어갔다.
이 어려운 시기에 허형식 군장은 중공당 북만성 서기 최용건과 함께 계속 동북에 남아 항일연군 제9, 12지대에 남은 동지들을 지휘하며 동북의 전구를 지켰다. 허 군장은 적들의 토벌을 피하기 위하여 제3로군을 소부대로 나누어 각지에서 독립적으로 활동케 하였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 전구의 여러 소부대를 순시하며 지도하였다.
1942년 7월말, 허형식 군장은 경위원 진운상을 데리고 파언, 목란, 동흥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소부대 사업을 지도하기 위해 떠났다. 그는 소부대 책임자 장서린이 두도하자, 이도하자 등지에서 숯구이를 하는 노동자들 속에서 비밀리에 항일구국회를 조직하고, 100여 명의 회원으로 발전시킨데 대한 보고를 받았다. 허 군장은 그 보고를 매우 만족스럽게 듣고 그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격려했다.
1942년 8월 2일, 허형식 군장과 경위원 진운상은 정서린이 보내준 왕조경 경위원의 안내를 받으며 그곳을 떠나 철려 후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날이 저물어 소릉하 기슭에서 노숙케 되었다.
한편, 괴뢰 만주국 경안현 경찰서 경좌인 국장유는 이런 정보를 입수한 뒤 30여 명(일부 기록에는 300명)으로 토벌대를 편성하여 밤새 허형식 군장을 추적하고 있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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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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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의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이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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