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골문으로 보는 임신과 출산, 볼수록 놀랍네

[서평] 사라진 암호에서 21세기의 도형문자까지 <한자의 탄생>

등록 2015.02.06 14:31수정 2015.02.06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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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는 모양을 닮게 쓴 상형(象形)문자라고 합니다. 산 모양을 닮은 뫼산(山), 입 모양을 닮은 입구(口), 달 모양을 닮은 달월(月)등을 보면 딱 그렇습니다. 그런데 모든 한자가 모양을 닮아 있는 건 아닙니다.

맞습니다. 산이나 달처럼 모양을 본떠서 만든 상형글자도 있지만, 상하(上下)처럼 점이나 선을 이용해 위나 아래를 나타내는 지사(指事)문자도 있습니다. 믿을 신(信: 亻+言)이나 청할 청(請: 言+靑)처럼 두 개 이상의 문자를 합성해서 만드는 '회의(會意)문자'도 있고 '형성(形聲)문자'라는 것도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락(樂)'이라는 글자 하나가 '향락(享樂)'에서는 '즐거울 락'으로, 음악(音樂)이나 악보(樂報)에서는 '음악(악)'으로, 한약(韓藥)이나 약첩(藥捷)에서는 '약초(약)'으로 쓰이는 전주(轉注)문자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시아(Asia)를 '亞世亞'(아세아)로 쓰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별다른 뜻 없이 음만을 빌려 쓰는 '가차(假借)문자'도 있습니다. 한자에서는 이 여섯 종류를 육서라고 합니다.

그러함에도 밝을 명(明: 日+月)자나 청할 청(請: 言+靑)자에서 볼 수 있듯이 그것이 회의문자이건 형성문자이건 대개의 한자들은 모양을 닮게 쓴 상형문자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상형문자 중에는 뫼산(山)처럼 글자와 모양이 딱 떨어지게 닮은 게 하면, 사람인(人)처럼 어떤 설명을 듣고 그 변천사를 떠올려야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한자들도 없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해와 달, 산과 내처럼 일정한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 정형적인 것들이야 그 모양을 본떠 만들면 되었겠지만, 어떤 광경이나 동작, 그림으로는 표현하기 곤란한 어떤 상황이나 분위기 등을 애초에는 어떻게 표현했을지가 사뭇 궁금합니다.

한자 연대기 <한자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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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의 탄생> (지은이 탕누어 / 옮긴이 김태성 / 펴낸곳 김영사 / 2015년 1월 17일 / 값 1만 5000원) ⓒ 김영사

<한자의 탄생>(지은이 탕누어, 옮긴이 김태성, 펴낸곳 김영사)은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한자의 바탕을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는 갑골문의 발견에서부터, 상형자가 도형문으로 부활하기까지 한자의 역사에 스며있는 중국문화의 정수를 찬란한 연대기로 엮어내고 있습니다. 

갑골문은 청淸 광서제 25년(1899년)에 국자감 좨주祭酒였던 왕의영王懿榮이 말라리아에 걸린 친척을 치료하기 위한 약재로 용골龍骨을 구하는 과정에서 처음 발견됐다. 용은 가상의 동물이기 때문에 용골이 존재한다는 것은 허구일 수밖에 없었고, 사실은 흙 속에서 캐낸 동물의 오래된 뼈에 다름이 아니었다.

왕의영은 북경 시내에 있는 달인당達人堂이라는 한약방에서 이런 뼈를 사다가 달이는 과정에서 우연히 날카로운 칼로 새긴 듯한 기호들을 발견하게 됐고, 이것을 계기로 더 많은 용골을 사들여 고문자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연구에 몰두했다. 그 결과, 그 기호들이 거북의 껍질이나 짐승의 뼈에 점복의 기록을 새긴 중요한 사료이자 한자의 초기 자체字體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렇게 출토된 거북의 껍질과 짐승의 뼈는 10만 점이 넘었고, 문자의 수는 4,000여 개에 달했다. -<한자의 탄생> 338쪽-

갑골문은 아주 우연한 계기로 발견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종이가 발견되기 전, 중국에서는 대나무 등을 이용한 죽간 형태로 기록을 했습니다. 그보다 훨씬 이전에는 갑골, 거북의 등껍질이나 동물의 뼈에 새겨 놓았던 것이, 약재로 사용할 용골을 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갑골문을 통해서 확인 할 수 있는 상형자는 실물을 스케치해 놓은 것만큼이나 사실적입니다. 사람 인(人)자만 봐도 현재 사용되고 글자와는 많이 다릅니다. 사람을 나타내고 있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사실적입니다. 

정형적인 것을 그린 상형자만이 아니라 어떤 상황을 표현한 글자들을 보면 가장 상징적인 순간을 포착해 그린 애니메이션 한 장면만큼이나 입체적이면서도 사실적입니다.

갑골문으로 보는 임신과 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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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과정을 타나 낸 갑골문 -<한자의 탄생> 197쪽- ⓒ 김영사

임신과 관련된 갑골문 중에는 더 명백하고 논쟁의 여지가 없는 첫 번째 사진 형태의 글자도 있고, 혹은 더욱 요점을 찌르는 두 번째 사진도 있다. 초음파 검사로 태아가 완벽하게 형태를 갖췄음을 분명하게 확인하고 있는(하지만 남자 아이인지 여자 아이인지는 분간할 수 없고)것 같은 이 글자가 '잉孕(임신하다)'자 이다.

게다가 이런 글자들은 과일이 익으면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순조로운 임신 과정을 기록한 중요한 실록이기도 하다. 갑골문 중에는 형태가 정교하고 대동소이한 글자들이 한 무더기나 더 있다. 사진 중 세 번째 글자는 갓난아이가 어머니의 둔부 아래쪽에서 빠져나오는 출산 과정을 소박하게 묘사하고 있고, 사진 네 번째 글자는 놀랍게도 그 과정에서 핏방울이 떨어지는 모습까지 표현하고 있다.

사진 다섯 번째 글자는 어머니의 자궁이 열리면서 조산원이 두 손으로 아기를 받아 드는 장면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자세히 기록하고 있고, 사진 여섯 번째 글자는 국부(局部)를 부분적으로 클로즈업하고 있다. 앞의 세 글자는 나중에 '육毓(기르다)'자로 발전하게 되고 클로즈업한 글자는 '육育(기르다)'자로 발전하게 된다. 이 두 글자는 원래 똑같이 출산 과정을 표현한 것으로 미약하게나마 소리의 인접성을 보존하고 있어 오늘날 같은 독음으로 발음된다. -<한자의 탄생> 197쪽-

오늘날 오줌 뇨(尿)자 된 갑골문은 오줌 누는 상황을 그린 캐리커처만큼이나 비슷하고, '시屎(똥)'자의 갑골문 역시 똥을 누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을 만큼 상징적입니다.

질(疾, 병 질), 병(病, 병 병)자 또한 몸이 아파 병실(침상)에 누워있는 환자의 모습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진 문자도 있고, 달라지거나 변형된 문자도 분명 있습니다. 문자가 달라지고 변형되는 과정들은 중국역사의 변천사이며 중국문화에 반영된 가치의 변화입니다.

갑골문(상형자)은 옛날 옛적 중국에서나 통용되던 글자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또다른 형태의 상형자는 현재도 존재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사용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도로에 세워져 있는 각종 안내판에 들어있는 이런저런 도형이나 기호들 또한 무엇인가를 표현하거나 상징하고자 하는 현대판 상형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자의 탄생>을 읽으며 상상력을 조금 보탠다면 복잡하고 어렵다고만 생각되는 한자, 한자를 낳은 갑골문에 스며있는 그 시절 그 사람들이 갑골문으로 기록하고자 했던 어떤 표현과 상징까지가 연상 돼 만화보다도 더 재미있게 읽으며 한자를 새길 수 있을 거라 기대됩니다.
덧붙이는 글 <한자의 탄생> (지은이 탕누어 / 옮긴이 김태성 / 펴낸곳 김영사 / 2015년 1월 17일 / 값 1만 5000원)

한자의 탄생 - 사라진 암호에서 21세기의 도형문까지 처음 만나는 문자 이야기

탕누어 지음, 김태성 옮김,
김영사, 2015


#한자의 탄생 #김태성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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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좋아하는 거 다 좋아하는 두 딸 아빠. 살아 가는 날 만큼 살아 갈 날이 줄어든다는 것 정도는 자각하고 있는 사람.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是'란 말을 자주 중얼 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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