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참 좋은 시절> 중 한장면.
KBS 2TV
저는 그때까지 단 한 번도 모르는 사람과 큰소리를 내며 싸운 적이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저보다 더 큰 남자애랑 싸우는 건 상상도 못해 본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저는 큰소리를 쳤습니다. 동생들과 맞잡은 손을 더욱 꼭 잡고 말이죠.
"너야? 네가 내 동생들한테 물총 쐈어? 너도 물총 맞아 볼래? 쪼그만 애들을 왜 괴롭혀?"그러면서 저는 점점 그 남자애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러자 오히려 놀란 남자애가 뒷걸음질을 칩니다. 자기보다 더 자그마한 여자애가 큰소리치는 모습에 적잖이 당황한 듯했습니다. 네, 그건 분명 무서워서가 아니라 놀래서였습니다. 그 아이는 급기야 뛰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질세라 저도 그 아이 뒤를 쫓아 뛰었습니다.
그 아이와 저는 거의 30분간 추격전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멈추지 않자 결국은 자기 집으로 뛰어들어가버렸습니다. 그러면 끝날 거라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저 스스로도 생각지 못한 행동을 했습니다.
"야, 너 나와! 비겁하게 도망치냐?" 용기에서 자존심까지저는 그 남자애 집 대문을 두드리며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안에서 무슨 일이냐고 묻는 어른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무슨 사연인지 대문을 열지는 않아서 저는 대문을 사이에 두고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잠깐의 정적 후, 아주머니는 미안하다며 자신이 아들을 혼낼테니 이만 돌아가라며 사과했습니다. 이후 아들을 혼내는 엄마의 성난 목소리를 배경 삼아 저는 동생들 손을 잡고 의기양양하게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부모님께 그 일을 얘기했습니다. 아니, 아마 자랑했다는 게 더 솔직한 표현일 겁니다. 부모님은 잘했다고 하시면서도,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느냐고 하셨습니다. 아마 동생들 잘 돌보라고 하셨지 않느냐며 웃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물론 그 웃음은 부모님께 칭찬 받은 게 기분 좋아서였습니다.
지금에 와 생각해보니 그건 용기라기보다는, 제 인생 최초의 '자존심'이었던 것 같습니다. 누나가 자기들을 지켜줄 거라고 믿는 동생들 앞에서 기죽을 수 없었던, 누나로서의 또 엄마가 말씀하신 '어른'으로서의 자존심 말입니다.
그날 그렇게 자존심이 뭔지도 잘 모르면서 지켜낸(?) 자존심 덕분에, 동생들은 아직도 엄마로부터 그날의 그 추격전 에피소드와 함께 누나한테 잘하라는 당부를 들었습니다. 그땐 미처 알지도 못하고 지켰던 자존심이, 지금은 저보다 더 훌쩍 커버린 동생들 앞에서 여전히 저를 든든한 누나로 만들어줘서 다시 한 번 어깨가 으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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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나쁜 형이 물총 쐈어"... 이런 용기 어디서 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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