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웅배 선생 친필 원고
박도
이들의 말은 조선역사사전에 나온 말을 한 자도 틀리지 않게 말했다.
이에 대해 왕산의 손자(허형식의 큰집조카)인 허웅배(許雄培, 일명 許眞)는 "허형식 동지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충직한 전사"라는 표현은 사실과 다르다고, 그의 저서 <김일성정전> 원고에서 밝혔다. 허형식과 김일성은 "활동지역이 달랐고, 부대계통도 달라 서로 대면한 일이 있을까 의심스럽다"면서 허형식과 김책의 관계는 서로 목숨을 줘도 아깝지 않는 문경지교였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허형식 동지와 김책 동지의 호상관계는 누가 누구의 상관이었느니, 누가 누구의 지도를 받았느니 하는 따위의 문제를 따질 졸렬한 감정이 끼일 자리가 없는 깨끗하고도 숭고한 혁명동지 사이의 리상적인 관계였다. 이것은 그들이 동급의 간부였고, 한 부대에서 함께 사선을 넘어 왔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깨끗하고 장한 인간들이었으며 견실하고, 참된 애국자, 혁명가였던 것이다."두 사람의 관계가 그렇게 순수한 혈맹관계였던 탓인지, 김책은 한국전쟁 직전 서울에 살고 있는 허형식 가족을 자기가 돌보고자 밀사를 보내 허형식의 아들을 월북시켰고, 전쟁 중 9·28 후퇴 때는 딸 하주를 북으로 데려갔다. 아마도 젊은 날 심양감옥에서 두 사람간의 혈맹 약속을 지킨 아름다운 동지애이리라.
허형식 장군의 자녀들2005년 7월 22일 나는 북한 삼지연 공항에서 백두산을 가는 버스 안에서, 또 7월 24일에는 묘향산에서 평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내 담당 안내원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허형식 장군 딸 아들이 평양에 살고 있습니까?""살고 있습니다.""이번 기회에 잠시 만나고 갈 수 있겠습니까?""우리 조선 속담에 있지요. '첫 술에 배부르랴'."나는 그가 하는 말의 뜻을 금세 알아채고 더 이상 보채지 않았다. 그는 내가 건넨 한국전쟁 사진집 탓인지 매우 속 깊은 이야기를 했다. 우리의 대화는 각각 남과 북에서 살아온 탓으로 서로 평행선을 그었지만, 그래도 그 밑바탕에서는 같은 피가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몇 해 후 중국에 사는 한 동포가 메일을 보내왔다.
건강하십니까? 이미 이메일로 몇 차례 연계했던 허광입니다. 선생님의 기사를 꼭꼭 채근하는 독자이기도 하구요. 머지않아 일제가 패망한 지(조선해방) 60돌이 되는 날이기에 항일독립운동역사를 기사화하시는 박도 기자선생님을 떠올리게 되는군요. 이전에 허형식 장군의 글을 잘 보았고, 선생님의 기사를 통해 허 장군의 가계가 일제의 조선침략을 반대하여 투쟁했고, 또 그 후과로 일가가 산산 흩어져 수난을 겪어야 했다는 내용도 알게 되었지요. 저도 허형식 장군의 자식들(허창룡과 그의 누나)에 대해서 알고 싶었고, 알아보기도 했죠. 허형식 장군은 평양의 <대성산열사릉>에 모셔져 있고, 허창룡과 그의 누나는 평양시의 만경대구역이라는 곳에 자식들과 년로한 몸으로 지내고 있다네요. 허창룡이 71살 정도이니 그의 누나는 더 년로하시겠죠. 저에게 소식을 전해주신 분은 허창룡이 이제는 년로하시니 부모님들의 사진이라도 보고 싶어 한답니다. 아버지의 얼굴은 말을 타고 찍으신 사진으로나마 보아왔으나 어머니(성함이 김정숙이라고 함)는 사진도 없다고 하니 … 몹시 괴롭고 마음이 상하시겠지요. 하여 박도 기자 선생님이 알고계시면 허형식과 부인에 대한 사진자료, 또 근친들의 행적(허형식, 김정숙 등의 근친)등을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어떠한 의도는 물론 없고, 북조선과 연계되여 무역거래를 하고 다니니 상기 내용들에 흥미를 가지고 불편해하는 유공자들을 작게나마 돕고자 할뿐입니다. 항일운동의 선구자들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었고, 우리가 있었다고 생각하고, 또 일제를 제일 미워하는 저였기에 힘든 부탁을 선생님께 드립니다. 열열독자 허광 드립니다.나는 그 메일을 받고 허 장군 일가친척에게 허형식 부인 사진을 수소문했으나 유감스럽게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허형식 부인 고향인 본적지 경북 봉화군 물야면으로도 일가들이 사는지 조회해 보았으나 족적을 찾을 수 없었다. 해방과 한국전쟁 공간에서 그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절박한 시기에 사진 한 장조차도 남을 수 없는, 아마도 그때까지 살아남은 가족들이 자기 목숨을 부지하고자 가족사진조차도 불태워 버렸을 우리 현대사의 비정이었을 것이다. 그때의 긴박한 사정을 오늘의 처지로 어찌 설명하겠는가.
연재를 마치면서 지난 2014년 10월 6일 시작한 [박도 실록소설 '들꽃']은 오늘 41회 기사를 끝으로 마무리한다. 호랑이를 그리려다가 고양이를 그린 부끄러움과 함께 1999년부터 쓰려고 하였다가 자료 부족과 나의 무식함, 게으름 등으로 미뤄오던 일을 일단 끝냈다는 점에 마치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듯 시원한 감도 있다. 이 글이 나중에 작가나 역사학자들이 허형식 장군을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한 조각이 될 수 있다면 분외의 영광이겠다. 부족한 이 글을 쓰는 데 도와주신 분이 참으로 많다.
무엇보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장세윤 박사가 가장 많이 도와주셨다. 당신이 소장한 자료들을 아낌없이 지원해 주었을 뿐더러, 내가 글을 쓰다가 의문점이나 막힐 때는 밤낮 가리지 않고 찾아뵙거나 메일로, 전화로 괴롭혔다. 그때마다 싫은 내색 한 번 하시지 않고 일일이 답해주실 뿐 아니라, 미처 챙기지 못한 자료와 일화까지도 속속들이 들려주셨다.
또, 나의 항일유적지 답사 길잡이였던 이항증(광복회경북지부장) 선생은 당신 어머니 허은 여사의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저서를 마음대로 전재케 함은 물론이거니와 틈틈이 집안사 자문에도 흔쾌히 들어주셨다. 서울에 사는 허벽 선생은 허형식 장군의 큰집 손자인데, 온갖 자료, 심지어 임은허씨 족보까지 챙겨주셨다. 하지만 내 필력이 부족하여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치 못함을 깊이 사죄드린다.
좀 더 세월이 흐른 뒤 이 원고를 다시 가다듬어 한 권의 책으로 펴낸 뒤 고향 구미를 찾아가 금오산 아래에다 이 책을 제물로 펼치고 허형식 장군의 명복을 비는 큰 절을 드리고 싶다.
이제 이 글의 마무리로 1928년 중국 혜림진에서 왕산의 손자로 태어나 한때는 북조선 내무성 정치부 소좌로 6·25 전쟁 때 인민군으로 참전하였으나 이후 북한 정권에서 밀려난 후 타쉬겐트 국립대학, 모스크바 군사대학, 문학아카데미에서 40여 년간 교수생활을 하시다가 몇 해 전에 작고하신 허웅배 선생의 망향 2수를 읊으면서 임은허씨들의 망향 설움을 대변해 본다. 나 역시 그분처럼 고향을 그리는 같은 마음이다.
지리산의 사진작가 임소혁 선생에게도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그분의 풋풋한 사진으로 딱딱하고 재미없는 글이 많이 윤색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