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은 가고 짱돌만이 남아도둑이 왔다간 방 안은 온통 난장판이었다. 이리저리 튄 유리 파편과 바닥에 굴러다니는 커다란 짱돌(사진), 모조리 다 열려 있는 옷장 서랍들…. 성인 남성의 주먹 두 개만한 이 돌은, 나중에 경찰 과학수사대에 엄연한 '증거'로 제시됐다.
유성애
잊고 살던 중 찾아온 '검거' 소식... "생계 어려워져 범행"사건일로부터 한 달여가 지나 사건이 잊힐 즈음인 2월 1일, 전과 같은 번호로 문자가 왔다. "피의자 이동경로를 수사해 교통카드 사용사실을 확인했고, 승·하차지점에서 잠복 수사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2월 5일, 이번엔 형사가 전화해 "피의자를 체포했다"라고 알려줬다. 수사 절차는 이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경찰이 피해자들에게 진행상황에 대해 문자와 전화 등으로 알려준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그리고 지난 16일, 사건을 담당했던 서대문경찰서 강력계 형사와 만났다. 책과 신문 외엔 별로 가져갈 것도 없는 사회초년생 원룸에, 방범창을 끊고 잠겨진 이중창을 깨면서까지 들어와 별 소득(?) 없이 돌아간 범인. 경찰 말대로 정말 나를 잘 아는 사람은 아닐지 두려웠지만, 형사는 '우연한 범행'이라며 기자를 안심시켰다.
"한 마디로 전형적인 '생계형 범죄'였어요. 자영업하면서 가족들 데리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는데, 지난해부터 경제적으로 많이 힘든 상황이 됐고 가정에 우환도 겹치면서 범행을 결심한 것 같더라고요."범인은 40대 초반 남성이었다. 형사 말에 의하면 그는 10년 전쯤에도 동일한 전력으로 검거됐다 풀려났는데, 범인 말로는 자신도 과거 비슷한 피해를 당한 게 절도수법을 배운 계기였다고 했단다. 당시 집행유예로 나와 마음을 다잡고 살다가, 지난해 말 생활이 어려워져 다시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 그는 지난 반년 남짓 동안 20여 개 집을 털었고, 피해자들 주장에 따르면 피해액은 약 1500만 원이라고 한다.
변변한 CCTV도 없는 상황에서 형사들은 범인을 대체 어떻게 잡은 걸까. 해당 형사는 동료와 함께 근처 CCTV 영상을 약 10시간 넘게 돌려봤다고 했다. 그런 식으로 용의자(범죄 혐의가 뚜렷하지는 않지만 조사 대상인 사람)로 추정되는 사람을 파악하고, 그의 동선을 파악했다. 그리고 그가 주로 가는 장소에서 잠복하고 있다가 체포했다는 것. 이후 경찰서로 끌려온 피의자(혐의가 인정돼 입건된 사람)는 "뉘우치는 기색"으로 자신의 범행을 순순히 자백했다고 한다.
담당 형사는 내게 "일하다 보면 제 얼굴을 빤히 보면서도 거짓말을 하는 용의자도 있다"라면서 "이 사람은 이걸 생업으로 해 먹고 사는 '빵(감방)돌이'는 아니었다, 저지른 짓은 벌을 받아야겠지만 앞으로 충분히 갱생할 수 있는 사람 같았다"라고 덧붙였다. 이어 "이번 경우엔 우연히 기자님 집 근처를 지나가다, 밖에서 보기엔 깨끗한 빌라니까 한 번 들어가 본 것"이라며 "집 창문이 잠겨있어서 고민 했다더라"고 말했다.
"불 꺼진 집, 범행대상 1순위"... 설 연휴 빈집털이 예방하려면 형사는 조사 과정에서 들은 피의자의 말을 내게 전했다. 그의 절도 경험에서 나왔을 실질적 '조언'인 셈이었다. 형사는 또 설 연휴를 앞두고 주의해야 할 빈집털이와 관련해, 유의해야 할 점들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일단 해가 떨어졌는데 불이 꺼져있으면 (빈집털이 대상) 1순위래요. 또 밖에서 문을 여는데 시간이 걸리면 심리적으로 불안해지니까, 범행하기가 싫다고 하더라고요. 창문도 밖에서 보면 잠금장치가 돼 있는지 아닌지 거의 다 보이는데, 기자님 집 경우에는 창문이 잠겨있어서 고민을 했대요. 왜냐면 창문을 깨면 소리가 나서 걸릴 가능성이 커지니까. 어쨌든 대부분의 절도는 집 안에 사람이 있으면 안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집을 비우더라도 안에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해두는 게 기본이고요. 두 번째로는 집 주변을 미리 깨끗하게 잘 치워둬야 해요. 용의자들은 나무가 있거나 박스 등이 쌓여있는 칙칙한 골목, 한 마디로 사람들 눈에 안 띄는 곳에 주로 접근하거든요." 생각해보니 우리 집 앞에 정원에도 나무가 곳곳에 심어져 있었다. 정원은 높이 약 60cm인 작은 문을 지나야 들어갈 수 있는데, 범인은 이걸 아예 뛰어 넘어간 것이다. 평소 햇볕이 잘 들고 풍경이 예뻐 좋아했던 정원이건만, 이곳이 '밤손님(밤도둑)' 통로로 쓰일 줄은 몰랐다. 소식을 들은 지인들은 "다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나를 위로했다. 실제로 경찰 말에 따르면, 절도범이 예상치 못한 경우 사람을 만나게 되면 당황한 나머지 사람을 폭행·협박하는 강도로 돌변하기도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