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의 남자, 김기춘
이젠 '정권부담'? 그가 남긴 것

[청와대 일기 18] 반토막 지지율 뒤로하고 청와대 떠나는 '왕실장'

등록 2015.02.18 16:22수정 2015.03.07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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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 결국 사의를 표명했습니다. 그가 청와대를 떠나게 되면 지난 2013년 8월 5일에 들어왔으니 1년 6개월만입니다. 김 실장이 76세의 고령인 점을 감안하면 '청와대 비서실장'이라는 직함이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부터 이어지던 그의 공직 경력의 마지막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잘 알려진 대로 김 실장은 2013년 8월 '저도의 추억'과 함께 공직에 복귀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후 처음 떠난 여름 휴가지에서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한 '저도의 추억'을 떠올렸고, 청와대로 돌아와 김기춘 실장을 발탁했습니다.

검사 시절 유신헌법 초안 작성에 발을 담갔고, 1970년대 말에는 청와대 법무비서관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보좌했던 '3공화국 인물'은 그렇게 박정희의 딸 박 대통령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올드보이의 귀환과 공안통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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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춘 신임 대통령 비서실장이 2013년 8월 8일 청와대에서 열린 비서실장 및 수석비서관 임명장 수여식에서 박근혜 대통령에게 고개숙여 인사하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그가 청와대에 입성한 후 정국은 요동쳤습니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운영 기조는 '공안통치'로 회귀했습니다. 김 실장 취임 23일 만에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의 내란음모죄 사건이 터져 나온 것은 그 상징적 장면이라고 할 수 있겠죠. 내란음모죄가 적용된 수사는 33년 만이었으니까요.

1970~1980년대 숱한 공안수사를 주도하며 '공안의 달인'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김 실장이 청와대에 들어오면서 충분히 예견됐던 일이기도 했습니다.

청와대를 곤혹스럽게 했던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을 둘러싼 여야 대치 정국은 삽시간에 공안 국면으로 전환됐습니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김 실장이 청와대에 들어오고 난 이후부터 여권이 전열을 재정비하고 (국정원의 대선개입 사건에 대한) 야권의 공세에도 일사불란한 대응이 이루어진 측면이 있다"라며 "허태열 실장을 4개월 만에 교체한 것은 그만큼 청와대가 다급했던 것 아니었겠느냐"라고 말했다.

정권의 기대대로 '공안으로 물타기라'는 그의 익숙한 장기는 이번에도 정권의 위기를 덮는데 공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쫓겨난 검찰수장... 권력의 검찰 길들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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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국조특위 출석한 김기춘 비서실장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이 지난해 7월 10일 국회에서 열린 세월호 침몰사고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기관보고에 출석해 곤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 ⓒ 남소연


김 실장이 부통령으로 불리며 여권의 총사령관이 된 후, 국정원의 대선개입 사건 수사에 의욕을 보였던 검찰수장이 쫓겨난 것도 우연의 일치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검찰의 국정원 선거 개입 사건 수사를 제대로 '마사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곽상도 전임 민정수석이 물러난 만큼, 법무장관까지 역임한 검찰 대선배인 김 실장이 임명된 후 검찰 길들이기가 시작될 것이라는 예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졌습니다.

청와대 입장에서 '앓던 이' 같았던 채 전 총장을 뽑아낸 의미는 분명했습니다. 채 전 총장이 사퇴한 날 저와 통화한 한 일선 검사는 술에 잔뜩 취한 목소리로 "청와대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총장이 정권에 찍혀 날아간 마당에 앞으로 어떤 검사가 눈치 안보고 제대로 수사할 수 있겠느냐"라고 울분을 토하더군요.

검찰 수사의 독립성 위축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실종 및 유출 사건, 정윤회 비선개입 문건 사건에서 검찰이 정권의 가이드라인에 충실했다는 비판이 이어졌죠.

인사 참사와 비선실세의 국정농단 의혹

김 실장이 떠나며 남기게 된 유산(물론 마이너스 유산입니다) 중에 가장 덩어리가 큰 것은 인사 참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집권 2년 동안 총리·장관 후보자만 따져도 9명이나 낙마한데서 알 수 있듯이 박근혜 정부는 인사 실패로 스스로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박 대통령의 수첩에 의존해 점찍는 소수 인맥 중심의 인사에 고장난 청와대의 검증시스템은 참사라고 불러도 모자란 '인사 실패'입니다. 책임론이 거셌지만 청와대 인사위원장을 맡았던 김 실장은 건재했고 고장난 인사시스템도 보완이 이뤄지지 않았죠. 김 실장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이완구 총리도 다들 보셨다시피 상처투성이로 임명장을 받았습니다.

거듭된 실패에도 공적인 책임 원리가 적용되지 않자 비선에 대한 의구심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집권 2년차에 불과한 박근혜 정부의 심장부에서 비선 실세의 국정농단 의혹, 권력 암투에 내부 문건 유출이라는 기강해이가 터져 나온 것은 필연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김 실장은 이해 못할 행동을 합니다. 문건 내용이 사실이라면 정권을 흔들 내용이었는데도 보고받고도 제대로 진상조사를 하지 않고 오히려 보고서 작성자를 문책하는데 그쳤습니다. 문건이 유출됐지만 제대로 된 진상 규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권의 부담으로 돌아온 무리수들

정권이 입은 타격은 심각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을 것이라던 '집토끼'마저 대거 이탈해 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최저 20%대까지 추락했습니다.

지지율만 문제가 아닙니다. 김 실장 등장 이후 청와대가 뒀던 무리수들은 당시엔 정권의 위기를 덮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이제는 정권의 부담으로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정국을 뒤흔들었던 내란음모죄라는 무시무시한 혐의는 법원에서 인정되지 않았고, 검찰의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초본 삭제 혐의 수사는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해 야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을 흠집내기 위한 정치적 기소였다는 비판이 일고 있습니다. 그렇게 검찰 수사를 방해하려고 했지만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결국 선거 개입 혐의가 인정돼 유죄를 선고 받았죠. 

당·청 관계는 어떻습니까. 김무성 대표마저 김 실장을 겨냥해 "당에 과하게 간섭하고 지시하고 있다"라고 할 정도로 당을 장악하고 통제하려던 청와대였지만, 박 대통령 임기 반환점을 돌기도 전에 여당엔 비박(비박근혜)·비주류 지도부가 들어섰습니다.

윗분의 심기만 살폈던 승지... 그가 남긴 부채

김 실장은 자신의 역할을 '승지'에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2013년 10월 당·청 핵심인사들을 만나 "나는 대통령의 뜻을 밖에 전하고 바깥 이야기를 대통령에게 전할 뿐"이라면서 "옛날 말로 승지"라고 했었죠.

실제로 김 실장은 박 대통령이 내린 교지를 그대로 받드는 승지의 역할에는 꽤 유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깥 이야기'를 윗분에게 가감 없이 전하는 승지는 아니었습니다. 대통령의 심기만 살피는, 옛날 말로 왕의 눈과 귀를 가린 승지가 남긴 건 대통령의 불통과 독선이었습니다.

김 실장의 18개월 동안 60%를 넘나들던 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반토막이 났습니다. 떠나는 올드보이가 남긴 부채는 이제 남은 자들의 몫이 됐습니다. 
#김기춘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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