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추도식을 마치고 경춘국도를 행진하는 참가자들
민종덕
분향 순서를 끝으로 비장한 추도식이 끝났다. 추도식을 마친 참석자 모두는 공터에 빙 둘러앉아 어묵과 막걸리로 허기와 추위를 달랬다. 풍물패들은 장단을 치고 춤을 추며 흥을 돋았다. 촌극 순서에서는 청계 노동자들이 노조 강제해산 이후 더욱 열악해진 노동현실을 재미있게 풍자했다.
촌극을 끝내고 모두 한 덩어리가 되어 춤을 추었다. 이소선도 풍물 장단에 맞춰 참가자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한참 춤을 추다 보니 추위는 물론 그동안의 시름까지도 싹 가시는 것 같았다. 이소선은 참으로 오랜만에 이렇게 많은 노동자들과 함께 어울려 신나게 노니 마냥 즐겁고 흐뭇했다.
춤의 행렬은 1971년 영등포 한영섬유에서 노조설립을 하려다가 회사 측의 사주를 받은 깡패들한테 드라이버에 머리를 찍혀 죽은 김진수 묘소를 한 바퀴 돌았다.
해가 어스름 기울어질 무렵 대열은 산에서 내려와 버스가 있는 주차장까지 내려왔다. 모두들 버스에 올라탔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다. 버스 운전기사들은 버스 운임비를 미리 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갈 수가 없다고 버티는 것이다.
이것 또한 정보기관의 압력이 들어간 것이다. 정보기관은 4대의 버스가 서울 한곳에 도착해서 참석자들이 한꺼번에 내리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버스를 분산 도착 시킬 꼼수로 버스 운임을 미리 달라고 압력을 넣은 것이다. 이에 추도위원회는 서울에 도착하면 운임을 주겠다고 했다. 이 문제로 주최 측과 운전사들 사이에 실랑이를 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이소선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모두들 차에서 내려라. 그냥 서울까지 걸어서 가자!"이소선이 큰 소리로 각 버스를 향해 소리쳤다.
"운전사들이 돈을 먼저 돌라고 하는데 보나마나 뻔할 뻔자라고. 돈 주면 서울 들어가는 입구 아무데나 우리를 내팽개치라고 기관원들이 압력을 넣으니까 저러는 건데, 우리가 뭐 벽창혼 줄 아나. 안간 다카니까 우리 모두 내려서 서울까지 걸어가자고. 차안에 둔 짐들 다해봐야 버스비도 안 되니께."그러면서 이소선이 앞장서서 걸어갔다. 이어 참석자 모두가 따라 내렸다. 그리고 풍물패가 나오고 플래카드가 다시 선두에 서고 참석자들은 삼삼오오 어께동무를 하고 열을 지어 모란공원을 빠져 나와 경춘국도에 들어섰다. 자연스럽게 시위대열이 형성이 되었다. 시위대는 농민가, 정의가, 흔들리지 않게, 해방가 등을 부르면서 행진했다. 지나가던 차들이 갑자기 나타난 시위대열에 놀라서 주춤주춤 지나갔다.
이렇게 경춘국도를 한참 가는데 추도객을 태우고 왔던 관광차들이 대열 앞에 멈춰 서더니 이번에는 문을 열어놓고 타라고 사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춘국도를 노래 부르면서 신나게 뛰다가 걷다가 해방감을 만끽하면서 지나가는 참가자들이 타지 않고 계속 행진했다.
행진 대열은 이렇게 마석역까지 왔다. 이미 해는 져서 어두워졌다. 마석역에서 서울로 가는 방향의 길목에는 전투복 차림을 하고 헬멧과 방패를 든 전투 경찰들이 페퍼포그를 앞세우고 철통같이 막아서고 있다. 대열은 멈춰 섰다. 국도는 완전히 막히고 구경꾼들은 모여들어 주위 건물 옥상에까지 빽빽하게 들어섰다.
추도식 참석자들은 마석역 앞에서 즉석 집회를 열고 농성하다가 버스에 올라타기로 결정을 내렸다. 모두들 노동자 만세, 노동운동 만세, 민주주의 만세를 외치고 버스에 올라탔다.
이날의 추도식 행사는 이소선은 물론 1970년대 민주노동운동가, 해고자, 민주인사 등 그 동안 신군부의 폭압에 억눌렸던 울분을 토하고, 아울러 패배감을 떨쳐내고 자신감과 새로운 힘을 불어 넣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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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공원서 마석역까지 행진... 즉석 집회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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