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미녀의 돌직구 "한국 정말 성형 많이해요?"

[팔팔한 팔라완 기행 17] 미스 쿠요논, 떨어져도 슬퍼 말아요

등록 2015.03.03 20:26수정 2015.03.03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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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미인들
필리핀 미인들강은경

이름이 쥬디라고 했다. 키가 아담한 긴 머리 아가씨였다. 짧은 흰색 원피스 위에 분홍색 카디건을 걸쳤다. 이마와 양 볼에 여드름이 자잘하게 솟아 있었다. 인상이 순박해 보이는 미인이었다. 이름을 물었을 뿐인데, 그녀는 입술을 바르르 떨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관련기사 : 죽음, 그 뻔한 결말 신경 쓰지마... 하고 싶은 일 해).

긴장 가득... "그럼 내게 질문해 봐요"


"미인 대회에 나온 이유가 뭐예요?"
"저는... 어..."

그녀는 긴장한 나머지 울상을 지은 채 말을 더듬었다. 이 상황이 당혹스럽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좀 전에 나는 코코넛야자나무 아래에서 만난 젊은 남자를 따라 얼떨결에 여기까지 왔다. 미인 대회에 출전한 아가씨들이 모인 합숙소.

미인들과 마주앉게 됐다. '미스 쿠요논(Miss Cuyunon)' 대회에 출전한 11명의 아가씨들을 인터뷰하는 자리. 한 명씩 아가씨들이 내 앞에 놓인 의자에 불려나와 앉을 때마다, 나는 서너 가지 질문들을 아가씨들에게 던져야 했다.

 미스 쿠요논 미인들의 합숙소
미스 쿠요논 미인들의 합숙소강은경

미인 대회 행사 위원인 마이클이 옆에 앉아 메모를 하고 있었다. 그는 아가씨들의 태도와 순발력, 언변 등을 놓고 점수를 매겼다. 나는 아무 준비 없이 얼떨결에 앉은 자리라, 뭘 질문해야 할지 난감했다.

"미인 대회에 왜 출전했냐? 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필리핀 사람들은 한결같이 '가족'이라고 대답한다)"처럼 일차원적인 뻔한 질문들만 할 수도 없고. 아가씨들의 '대답'만 순발력과 창의력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엘니도의 시발탄(Sibaltan) 바랑가이에서는 지금 '피스타(Fiesta)', 즉 마을 축제 기간이었다. 축제 행사 중에 하나인 미인 대회는 이번이 2회째라고 했다. 출전자들의 나이는 16살부터 22살. 엘니도 바랑가이(마을) 곳곳에서 마을을 대표해 온 미인들이었다.

조부모와 부모가 '쿠요논 부족'의 순수 혈통이어야만 참가 자격이 있다고 했다. 쿠요논 부족은 팔라완 본 섬에서 배로 12시간쯤 걸리는 북동부 바다. 쿠요 제도에서 엘니도로 오래 전 건너온 후손들이었다. 그 뿌리는 말레이시아라고 했다. 여기서 뽑힌 아가씨들은 쿠요논의 전통 문화를 알리는 역할을 하게 된다.


미인들의 피부는 대부분 짙은 갈색이고, 얼굴이 둥근 편이었다. 키는 나보다 한 뼘쯤 작았다.(참고로 내 키는 165cm) 그 중 두 명이 나랑 키가 엇비슷했다. 얼굴형이 갸름하니 피부색도 하얀 편이었다. 모두 평상복 차림에 옅은 화장을 하고 있었다. 쥬디는 움츠린 어깨를 바르르 떨며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미인 대회에 참가한 아가씨들과 인터뷰 자리
미인 대회에 참가한 아가씨들과 인터뷰 자리강은경

"어쩌나... 긴장 풀어요. 아, 그래요! 역할을 바꿔보죠. 쥬디가 나를 인터뷰하는 거예요. 내게 궁금한 거, 뭐든 물어봐요!"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듯 시선을 내리깔고 있더니, 반짝거리는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한국 여자들은 정말 성형 수술 많이 해요? 성형 수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뭐라 대답해야 하나. '외모지상주의, 미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 미에 대한 인간의 욕망, 서구화된 미의 기준, 여성의 상품화...' 같은 주제로 논쟁할 자리도 아니고.

"네, 내 조카도 고등학교 졸업하고 쌍꺼풀 수술을 했더라고요. 솔직히 내 눈에는 별로 예뻐 보이지 않았어요. 뭐랄까, 눈코입 조화롭던 균형이 깨져 보인다고나 할까요. 나요? 성형수술 안 했어요.

돈도 없고, 으~ 무서워서 못해요. 아니, 난 화장도 안하는 사람인데요. 뭐든 자연스러운 게 더 예쁘잖아요? 내 눈에는 수술한 얼굴이나, 화장한 얼굴보다 민낯이 더 예뻐 보이거든요."

오십 평생 넘게 살면서 화장을 다섯 번이나 했을까. 지금이야 '민낯'이라는 단어를 예사로 쓰지만, 내가 젊었을 땐 '예의가 없다, 게으르다, 예쁘다고 잘난 척하냐...' 별별 비난을 다 들었는데. 화장을 안 한다는 이유 하나로. 그러고 보면 내가 이상한 사람인지, 내가 사는 사회가 이상한 건지 살면서 헷갈릴 때가 참 많았다.

마침내 11명의 아가씨들의 인터뷰가 다 끝났다. 두 시간 쯤 걸렸다. 명랑하게 말을 잘 하는 아가씨도 있었고, 영어가 서툴러 마이클이 통역을 해준 아가씨도 있었다. 너무 떨어 정말 안쓰러워 보이는 아가씨도 있었다. 대부분 수줍음이 많아 보였다. 팔라완의 주도인 푸에르토 프린세사에서 대학을 다닌다는 아가씨는 당차고 자신만만해 보였다. 도시물을 먹은 티가 났다.

"어떤 아가씨가 훌륭했나요?"

인터뷰를 잘한 아가씨 한 명을 뽑아야 한다며 마이클이 내게 물었다. 곤란한 질문이었다. 젊고 건강한 아가씨들이 나는 다 예뻐 보이는데... 얼굴도 말도. 나로서는 우열을 가린다는 게 탐탁지 않았다. 나는 대답하고 싶지 않아 우물거리다가 꽁무니를 뺐다. 

"다 예쁘고 다... 아, 모르겠어요!"

마이클이 뽑은 아가씨는 샤롤이라는 아가씨였다. 생글생글 웃으며 모델이 되는 게 꿈이라고 말했던. 샤롤은 환호성을 지르며 팔짝팔짝 뛰었다. 나머지 아가씨들의 표정은 순간 어두워졌다. 곧바로 아가씨들은 나랑 두 번째 테스트를 받기 위해 바랑가이 박물관으로 이동했다.

마이클, 나를 이 자리에 데리고 온 젊은 남자 필립, 그리고 아리얼이 아가씨들과 나를 인솔했다. 아리얼은 긴 머리를 치렁치렁 늘어트린 덩치 큰 바끌라(게이)였다. 필리핀의 모든 미인 대회에서는 바끌라의 역할이 크단다. 참가자들의 장기 자랑, 안무, 화장, 의상 등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단다. 미적 감각과 창의력이 뛰어나 그럴까. 콧방울 옆에 큰 점이 있는 필립은, 필리핀어와 문화를 가르치는 고등학교 교사라고 했다.

우리가 박물관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미인들에게 쏠렸다. 아시아 나라 중에서 '미스 인터내셔널', '미스 월드' 같은 국제 미인 대회에서 입상자가 가장 많은 나라가 필리핀이란다. 또한 국내 미인 대회가 가장 많은 나라. 미인 대회를 주체하는 곳은 학교, 회사, 호텔, 바랑가이, 시, 주, 등 다양하다고.

필리핀 여자의 최고 무기는 명문 대학의 졸업장이 아니라 '미모'라니. 미인 대회 입상 경력이 구직부터 사회활동을 할 때, 일종의 '스펙'으로 활용된다. 수천 켤레 호화 '구두광'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이멜다 마르코스(필리핀 제10대 대통령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부인)도 미인 대회 출신이었다.

박물관으로 가는 동안, 긴장이 풀린 아가씨들이 내게 이것저것 물어왔다. 나이, 직업, 가족, 등 나의 신상에 대해, 그리고 팔라완 배낭 여행에 대해. 작은 마을이라 박물관에 금방 도착했다.

쿠요논 부족 살림살이 모인 소박한 박물관

 쿠요논 박물관의 가이드 빌리온
쿠요논 박물관의 가이드 빌리온강은경

쿠요논 박물관은 시발탄 바랑가이 남쪽 해변, 코코넛 야자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었다. 사실 나는 어제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박물관부터 방문했다. 바다 바로 앞에 허브를 심은 작은 마당과 니파 헛(필리핀 전통 가옥) 오두막집 두 채. 박물관이 맞나 싶게 작고 조용했다. 아무도 없는 마당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젊은 청년이 스쿠터를 타고 나타났다. 박물관 가이드, 이름이 빌리온 이라고 했다.

그는 니파 헛 안으로 나를 안내해 집 구조와 전시물을 하나하나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전통 가옥에 살림살이들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박물관이었다. 방과 부엌에서 쓰는 의식주와 관련된 물건들과 어업용 도구, 악기, 쏭까 라는 전통 놀이용 도구 등 아이들의 장난감도 있었다. 몇 가지 쇠붙이 작살과 코코넛 오일 유리병, 물 항아리 빼고는 모두 대나무, 야자나무 이파리, 코코넛 껍질 같은 것으로 만들어졌다. 

마당 한쪽에는 대나무 장대와 절구통이 있었다. 대나무 장대는 한 쪽은 뾰족했고, 반대쪽 끝은 두 뼘쯤 몇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농기구였다. 동시에 악기였다. 뾰족한 끝으로 땅을 파며 곡식을 파종했단다.

빌리온이 대나무 장대를 들고 시범을 보여 주었다. 땅을 꼭꼭 찍자 위쪽에서 시원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소리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고. 나무 절구통은 비상시 이웃을 부르는 신호용으로도 쓰였단다. 빌리온이 절굿공이로 세게 내리쳤다. "꽝꽝!" 아뿔싸! 나무로 만든 절굿공이가 쩍 갈라지고 말았다. 난 그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를 놀려대며 웃었다.

"빌리온, 너 이제 큰일 났다. 하지만 걱정 마! 네가 망가트렸다고 일러바치지 않을게! 킬킬킬!"
"벌써 세 번째에요!"

 박물관에서 대나무 장대를 들고 파종 모습을 재현하는 가이드
박물관에서 대나무 장대를 들고 파종 모습을 재현하는 가이드 강은경

그도 킬킬거렸다.

박물관이 문을 연 지 2년 됐다고 했다. 2010년 필리핀의 엘니도 시발탄에서 고고학 연구팀이 조직됐다. 필리핀 연구원들과 워싱턴 대학, 동남 아시아 대학들, 그리고 한국의 대학에서 온 연구원들이 참여했다. 당시 그들은 1500년 전부터 500년 전까지 그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유물을 찾아냈다.

그 발견이 발단이 되어 전통 가옥, 춤, 농업 방법, 어업, 언어 등 사라져가는 쿠요논 부족의 문화를 보존하자는 취지로 쿠요논 박물관(Balay Cuyunon Museum)이 지난 2012년 12월 개장된 것이었다. 빌리온의 말에 따르면 가끔 관광객이 찾아오는데, 프랑스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아무튼 지금까지 내가 본 박물관 중에서 분위기가 가장 소박하고 친근했다. 

 쿠요논 박물관 전통가옥 부엌
쿠요논 박물관 전통가옥 부엌 강은경

드디어 박물관에서 미인들의 테스트가 시작됐다. 11명의 미인들이 박물관 곳곳 지정된 위치에 섰다. 내 역할은 관람객 역이었다. 필기 도구를 든 마이클이 내 옆에 섰다. 어제 만난 박물관 가이드 빌리온도 같이. 우리는 박물관 입구로 들어섰다. 입구에 서 있던 아가씨가 활짝 웃으며 환영 인사를 했다.

두 발짝쯤 걷자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른 아가씨가 마당의 허브 약초들을 소개했다. 대충 이름만 나열하기에, 약효에 대해 내가 물었다. 당황한 아가씨가 빌리온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가 대신 설명했다.

 쿠요논 박물관에서 미인의 설명 들으며...
쿠요논 박물관에서 미인의 설명 들으며...강은경

바다 쪽에 놓인 모형 배 앞에서 또 다른 아가씨가 배의 구조와 쿠요논 부족의 배 생활을 설명했다. 친절하고 명랑한 목소리로. 다음엔 니파 헛으로 올라갔다. 그렇게 미인들이 니파 헛의 거실, 방, 부엌의 살림살이들을 설명했다. 나는 아주 진지한 관람객이었다. 설명을 열심히 귀담아들으며, 질문도 열심히 던졌다. 그렇게 박물관 관람이 끝났다. 마이클이 또 물었다. 어떤 아가씨가 뛰어났냐고.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을 회피했다.

"누가 가장 뛰어났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던 이유

합숙소로 돌아가 저녁을 같이 먹었다. 마이클이 내게 또 정중히 부탁했다. 다음날 개최되는 미인 대회에서 심사위원을 맡아달라고. 나는 사실 내일 시발탄을 떠날까, 하루 더 있을까, 고민 중이었다.

그런데 그 부탁을 듣자마자 내일 떠나기로 마음을 굳혔다. 하루 더 있다가는 그 부탁을 거절하기가 곤란해질 것이었다. 필리핀 미인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나로서는 재미있고, 색다른 경험이지만. 나는 대회에서 떨어진 아가씨들의 슬픈 얼굴을 정말 보고 싶지 않았다. 아쉽지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미스 쿠요논 미인들과 함께 박물관에서
미스 쿠요논 미인들과 함께 박물관에서강은경

저니가 눈이 빠지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오후에 낮잠을 자고 다시 '부우버그 섬'에서 수영을 했단다. 그때 나를 주려고 조개 하나를 잡았다며 보여주었다. 그는 바다에서 고기나 조개를 잡지 않는다고 했는데. 손바닥 둘을 맞대고 펼친 것처럼 커다란 가리비였다. "먹을 수 있느냐" 묻길래 "물론, 아주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저니가 곧바로 가리비를 삶아 내왔다. 저니랑 알빈 호스터 어머니랑 내 앞에 나란히 앉아 나를 지켜보았다. 아주 흐뭇한 표정으로. 아무리 같이 먹자고 권해도 두 분은 막무가내 사양했다. 결론은 내가 맛있게 먹는 것만이 저니의 호의에 대한 감사 표시가 될 것이었다. 

"음~ 정말 정말 맛있어요!"

나는 두 분께 내일 떠난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밤이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팔라완 #필리핀 #엘니도 #배낭여행 #미인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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