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극과 함석헌 역사관 차이... '악마 편집' 때문?

[함석헌 탄생 114주년] 김교신이 본 함석헌

등록 2015.03.03 14:07수정 2015.03.05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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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과 김교신 등 ⓒ 함석헌기념사업회


오는 3월 13일은 한국인 최초 노벨평화상 후보자인 함석헌(1901-1989)이 태어난 지 114주년이 된다. 함석헌은 누구일까? 그를 '기독교사상가', '민주화운동가', '독립운동가', '역사가', '언론인' 등으로 보는 이들이 있다. 반면, 김종필은 그를 '정신분열증에 걸린 노인네'로 보았고, '패배주의자'나 '독설가'로 보는 이들도 있다. 물론 민주사회에서 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각자가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역사와 사물을 보는 입장은 최소한 두 가지 시각이 있다고 믿는다. 하나는 권력자 입장에서 보는 시각이고, 또 다른 하나는 씨알(민초) 입장에서 보는 시각이다. 내가 아는 함석헌은 역사와 사물을 권력자가 아닌 씨알 입장에서 보았다. 그리고 씨알의 입장에서 가해자와 권력자에 맞서서 온 삶으로 저항했다. 그래서 일제강점기는 물론 그 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시기에 함석헌과 그 가족은 고난에 찬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지난해 '문창극 파동'이 있었을 때, 문창극씨의 역사관과 친일발언이 함석헌의 고난사관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평소 나는 <동아일보>를 잘 보지 않는다. 그런데 지난해 6월 23일자 <동아일보> '[송평인 칼럼] 함석헌을 문창극처럼 편집하면'이라는 글이 눈에 띄었다.

이 칼럼에서 송씨는 "문창극 총리 후보자에 대해 저질러진 것"은 '악마의 편집' 때문이라며 문씨의 친일발언과 역사관을 언론(KBS 노조)의 잘못된 편집 탓으로 돌리고 문씨를 적극 변호했다.

송씨의 칼럼을 읽고 든 생각은 "과연 단지 '악마의 편집' 때문에 문씨의 본심이 국민에게 잘못 전달된 것일까?"라는 것이다. 물론 나는 이런 송평인씨의 시각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그 예로 민중(씨알)에 대한 문창극과 함석헌의 관점을 한번 비교해 보자.

"언론이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를 비판하는 언론학자들이 이상한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작동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이유는 대다수의 민중이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대중은 우매하고 선동, 조작되기 쉬우므로 엘리트들이 여론을 이끌어야 합니다." - 문창극 전 <중앙일보> 주필의 2013년 고려대 강의 중

"씨알 여러분, 아무리 괴로워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그럴 듯하게 말해도 속지 마십시오. 벼슬아치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젠 신문도 못 믿습니다. 신문이 우리 사정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들이 씨알 편에 섰을 때 혹독한 일본 제국주의의 칼을 가지고도 그들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마는, 그들은 이제 돈에 팔려 씨알을 저버렸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금(古今)에 씨알을 저버리고 강했던 놈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믿을 것은 우리들 자신밖에 없습니다." - 함석헌 <씨알의 소리> 1971년 8월호 중


'악마의 편집' 때문이 아니라 문창극씨는 분명하게 한국 민중을 무지, 우매하다고 평가했다. 그래서 한국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도 잘못된 정치인 때문이 아니라 민중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문씨는 언론인은 당연히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문씨는 뚜렷하게 권력자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이런 문씨를 국민과의 소통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박 대통령이 총리후보자로 추천한 것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함석헌은 "돈에 팔려 씨알을 저버린 언론인"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제 믿을 것은 권력자가 아닌 우리들 자신인 "씨알 밖에 없다"며 자신을 씨알과 동일시하며 그 씨알을 위로하고 있다. 그러니 유신독재시절 박정희가 눈에 가시 같은 함석헌이 만든 잡지 <씨알의 소리>를 폐간시키려고 한 것도 전혀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런데도 송평인 논설위원은 이렇게 역사, 언론, 씨알에 대하여 전혀 상반된 관점을 갖고 아주 다른 삶을 살아온 함석헌, 문창극 두 인물에 대해 단지 '악마의 편집' 때문에 문씨가 마치 억울하게 피해를 당한 것처럼 그의 칼럼에서 묘사하고 있다.

함석헌 탄생 114주년을 맞아 함석헌의 '절친' 김교신(1901-1945)의 눈을 통해 함석헌을 되돌아보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부패하고 불의한 권력자가 정권을 잡고 있고 그 권력자에 아부하는 언론인들이 넘쳐나는 오늘 한국에서 함석헌을 되돌아보는 일은 오늘 우리가 서있는 자리와 지향해야 할 바를 성찰하는데도 꼭 필요한 일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묻힐 뻔한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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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 함석헌기념사업회

1965년 발간된 함석헌의 대표저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원래 1933년 12월 31일부터 1934년 1월 4일까지 함석헌이 5일간 20여 명의<성서조선>독자들에게 한 강연원고를 기초로 하고 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함석헌의 한국역사 강연원고는 원래 세상에 공개 되지 않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1934년 1월 5일 김교신은 <성서조선>의 한 "지방 독자로부터 집회(함석헌 역사 강의 관련)의 상세한 기록을 보고하기를 요청함이 간절"하기에 "함석헌씨의 조선역사"의 "친필로 된 원고를 금월 호부터 (<성서조선>에)연속 게재하기로" 마음먹었다고 밝혔다.

결국, <성서조선>의 한 지방 독자의 간절한 요청 때문에, 함석헌은 <성서조선>에 1934년 2월부터 1935년 12월까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한국사 강연원고를 연재하게 된다. 결국, 지금은 누구인지도 전혀 알지 못하는 1934년 <성서조선>한 독자의 간절한 요청 덕에 세상에 그냥 묻힐 뻔한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당시 <성서조선>은 김교신이 주간으로 발행했고 발행부수는 200여부에 불과했다. 김교신은 당시 이 잡지에 함석헌의 한국사강연에 대한 감회를 이렇게 적었다.

"1933년 12월 31일 저녁 7시부터 함석헌씨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제 1강. 역사 이해, 사관과 성서적 사관, 세계사의 윤곽 등 제항에 걸쳐 만 3시간의 연속 강연이었으나 강사와 청중이 모두 일순간을 보낸 것처럼 시간의 흐름을 애석하였다. 조선역사 반만년에 역사도 길었거니와 사가도 많았다. 마는 조선 역사 반만년에 사관을 준 이가 없었다. 이날에 '전인미답(全人未踏)'의 영역에 일보를 내디디어 반만년사의 사관을 제시하였건만 2천만 중에 이것을 들은 자 20명 미만이고, 이것을 읽을자 200인 에 미급하니 무슨 췌언(贅言, 쓸데없는 군더더기 말)을 첨서 할 필요가 있으랴. 오직 일이 기이함을 심비(心碑)에 명기할 뿐이었다."

김교신은 함석헌을 1923년 일본유학시절부터 가까이 아는 사이였다. 그런데도 김교신이 이토록 함석헌의 한국역사 강연에 감탄하는 것을 보면 함석헌이 1923년부터 1933년까지의 지난 10년간 평소 김교신에게 자신의 역사관을 거의 이야기 하지 않은 듯하다. 김교신은 <성서조선>에 계속하여 자신의 독후감을 이렇게 적는다.  

"1934년 1일 1일 오후 7시부터 조선역사의 제 2강으로 단군사에서 신라통일까지의 대강을 듣다. 고구려의 말년이 마치 장년의 졸도와 같은 비장한 전사였다는 장에 이르러서는 졸부라도 주먹에 땀을 쥐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학교로부터 20년 가까운 교육을 받았어도 1시간의 조선사를 배울 수 없었던 신세를 한하여 왔으나 이제 조선 제일의 조선사. 따라서 세계 제일의 조선역사 강좌에 참석할 수 있는 기운을 두려움으로써 감사하다. -(중략)-

기독교의 빛이 반도를 비춘지 반세기에 비로소 반도의 진상을 드러냈도다. 반만년에 감추어 있던 오의(奧義: 깊은 뜻)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중략)- 반도의 반만년사라는 것이 전 세계와 또 전 우주적 상관에 있어서 이렇게도 의의가 있구나. 이렇게도 줄기가 있구나 하는 것을 밝히 깨닫게 되는 것만은 사실이다."

친구 함석헌의 강연을 들으며 김교신은 "주먹에 땀을 쥐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또 함석헌의 강연을 "조선 제일의 조선사. 따라서 세계 제일의 조선역사 강좌에 참석할 수 있는 기운을 두려움으로써 감사하다"로 자신의 벅차오른 심정을 밝히고 있다.

"1934년 1월 3일 밤 9시 20분부터 함석헌씨의 조선역사 결론을 듣다. -(중략)- 소원으로 말하라면 이번 4회에 걸쳐 들은 조선역사의 정수를 액화하여 이 약으로써 2300대의 주사를 놓아주었으면 고갈하였던 초목이 회춘의 영을 누리는 것을 보는 것과 같은 기쁨을 이 강산 위에 볼 것이다."

김교신은 함석헌의 역사 강의의 정수를 액화하여 이 액화된 약으로써 식민지 한국인들에게 주사를 놓아주면 일제강점기 고갈하였던 한국인들이 "회춘의 영을 누리는 것을 보는 것과 같은 기쁨을 이 강산 위에 볼 것이다"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성서조선>에 실린 함석헌의 조선역사에 대한 글을 보고 이런 뜨거운 감동을 받은 것은 김교신만이 아니었다. 김교신은 1934년 5월 17일 함석헌의 글을 읽은 한 '목포 독자'가 보낸 글을 이 잡지에 소개하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함석헌 선생의 조선역사는 더욱 새 진리의 세계로 끌어감을 느끼나이다."

이 '목포 독자'의 독후감에 덧붙여 김교신은 자신의 느낌도 이렇게 적는다.

"함 선생의 조선역사를 그 진가대로 참으로 인식함은 필경 후대 사함들의 임무인가 싶다. -(중략)- 만일 기독교 전래 50년 만에 기독교적 견지에서 본 조선역사를 쓴 사람이 출현치 않았다면 그는 얼마나 적적한 일이었을까."

1880년대 기독교가 한반도에 소개된 지 50년 만인 1930년대 함석헌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쓰지 않았다면 "얼마나 적적한 일이었을까"로 김교신은 자신의 벅차오르는 감회를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성서조선>1934년 10월 21일에 김교신은 또 다른 독자가 보내온 독후감을 싣는다.

"함선생의 조선역사를 읽고 평하는 이의 말에 '그것은 문사의 필체로 된 글도 아니요, 또한 소위 사가의 사료를 안배 한 문서도 아니요, 실상 현대문으로 쓰인 예언서 이니라'라고. 필경 가장깊이 음미한 이의 고백일 것이다."

한 독자가 함석헌의 글을 '예언서'로 평가한 것에 대해 김교신은 함석헌의 글을 "가장깊이 음미한 이의 고백"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글에서 곧 '피가 나올 듯하여'

1934년 10월 22일자로 김교신은 또<성서조선>에 이렇게 적고 있다.

"본 호 함선생의 조선역사가 8면에 달하므로 지시대로 2회에 분재할까 하였으나 끊으면 피가 나올 듯하여 3분의 1의 지면을 그대로 드리었고 –(중략)-"

함석헌의 글이 길어서 글의 일부를 잘라서 잡지 다음 호에 실으려고 마음먹었지만 글을 자르면 글에서 곧 '피가 나올 듯하여' 자를 수 없었다고 김교신은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1934년 12월 16일 <성서조선>지에 김교신은 한 좌익학생의 독후감도 싣는다. 

"중학 시대에 공산주의 학생의 두령으로 지목받아 이 학교 저 학교로 쫓겨 다니던 청년으로부터 '함석헌씨의 조선역사는 일찍 학교시대에는 듣지도 못한 새로운 취미를 끄집어내고야 맙니다. 계속하여 읽어 보았으면 합니다.' 함 선생의 조선역사가 '일찍 학교 시대에는 듣지도 못하던 것이라' 고 함은 허심 평탄한 마음을 소유한 조선인에게는 누구를 막론하고 간취(看取, 보아서 알아차리게)되어야 할 일이다. 오직 교파심에 경화된 마음만이 진주를 보아도 돌덩이라고 멸시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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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조선 ⓒ 함석헌기념사업회


함석헌의 한국역사에 대한 글이 좌우이념을 떠나서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에게 보편적 감동을 주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 글이다.

아래 글은 1934년 12월 29일 기독교인 독자가 <성서조선>에 보낸 독후감이다.

"인천에서(부득이한 사정으로 집회 중도에 퇴거한 형제) '제일 저의 기억에 아직 사라지지 않는 것은 함 선생님의 역사 뒷자리에는 생명의 주님께서 앉으신 것을 극히 평화로운 안색으로 증거 하시는 광경이외다.'"

해를 넘겨 1935년 3월 10일 <성서조선>에 김교신은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오후에 함석헌형의 원고(수난의 500년<2>)를 받아 읽고 울다. 함형 엽서에 가로되 '평안하십니까. 잡지는 늘 그렇게 말썽이 많아서 염려됩니다. 내일 원고 오늘 발송하였습니다. 이번은 참 신고(辛苦, 어려운 일을 당하여 몹시 애쓰고 고생함)하였습니다.

이번 시대가 시대니 만큼 1개월을 두고 쓴 것이 겨우 그것입니다. 고쳐 시작하기를 아마 20차례나 하여서 되었는데 다 써놓고 보니 맘에 매우 아니 듭니다. 수사(修史, 역사를 엮고 가다듬음)의 일이 어려움을 점점 느낍니다. 왜 시작 했던고 하는 생각이 납니다.'"

함석헌의 글을 읽고 울었다는 김교신! 또 명필가로 알려진 함석헌이지만, 자신의 글을 20차례나 고쳤다는 것을 보면서 사람이 왜 겸손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1935년 3월 31일 전라남도에서 한<성서조선> 독자가 보낸 글을 김교신은 보여준다.

"전남 우수영 단신에 '함 선생님의 조선역사는 '마침내 어찌 될 것 인고' 하고 호를 기다리던 저에게 3월호에서 요동 없는 희망을 주었습니다. 아아, 변할 수 없는 섭리를 보여 준 예언입니다.'"

암울한 일제강점기에도 함석헌의 한국역사에 대한 글이 식민지 한국인 독자에게 '패배주의'가 아닌 '요동 없는 희망'을 주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1935년 4월 5일 <성서조선>지에 실린 김교신이 소개하는 또 다른 글이다.

"천만의외에 소위 위험사상을 가졌다는 청년으로부터. '성조지는 반갑게 받아 '역사'공부를 합니다. <수난의 500년>을 읽고 의인의 피 흔적을 슬퍼하는 동시에 의분강개의 주먹이 쥐어지는 것은 어디다 내 던질는지.'"

김교신이 묘사한 '위험사상을 가졌다는 청년'은 아마도 좌익청년 인 듯싶다. 그리고 이 청년 역시 함석헌의 글을 읽고 '의분강개의 주먹이 쥐어 진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1935년 5월 30일 <성서조선>지에도 김교신은 인쇄소에서 함석헌을 글을 교정하면서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인쇄소에 가서 교정. 함형의 조선역사 수난의 500년(제4회 임진란이 부분)을 교정하면서 자주 눈물을 씻으니, 인탁(隣卓, 옆자리)에서 교정하는 이들이 나를 기이히 보는 모양이나 할 수 없다. 의주까지 피난하면서도 동인 서인의 당쟁만 일삼고, 하나님이 주신 시련의 찬스를 헛되게 유실한 우리조상들의 뿌리 깊은 죄악을 책망 받음은 나의 아침에 지은 죄를 저녁에 견책함과 추호도 다른 것이 없다.

이 망한 백성의 병원(病原)을 깊이 타진하여 그 뇌척수에까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투사하려니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가 있게 된 것이요, 이 강한 빛에 비추어 알고 보니 눈물이다. 출판 허가되는 시각으로 인쇄하기를 부탁하고서 발송하는 날에 지우의 기쁨이 클 것을 상상하면서 활인동으로 향하다."

1935년 8월 3일 영남에 사는 <성서조선>한 독자가 김교신에게 보낸 글이다.

"영남소식에 '조선역사를 쓰시는 함 선생님의 노력을 진심으로 치사불이(致詞不已, 치하해 마지않음) 하나이다. 참으로 우리 독자에게 무상의 유익을 끼치고 계십니다. 나는 우리 함선생 위에 주의축복이 풍성하시옵기를 기구불이(祈求不已) 하나이다."

1935년 10월 11일자로 함경북도에 사는 <성서조선>독자가 김교신에게 보낸 글은 이렇다.

"함북. '성조지 중에서 함 선생님의 역사를 제일로, 그 후 성서통신의 또 선생님의 바늘로 찌르는 듯한 말씀 등을 가장 감명적으로 읽습니다.'"

1935년 11월 7일 추운 만주에서 <성서조선>독자가 보낸 글은 배고픔에 굶주리고 있는 한 동포에게 함석헌의 글이 어떻게 위로가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만주소식 일절에 '사실 집에 나와 보니 금하(今夏) 수재로 한 알의 곡식을 얻지 못한 고로 강냉이를 사다가 그대로 삶아 먹고 근근 연명은 하오며, 그나마도 겨울은 가까워 오는데 옷이 이미 떨어지고 양식을 구할 길도 어렵게 되니 답답함이 여간 아니외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열 번 스무 번 되풀이해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여 성조지에 실린 함 선생님의 본 절 강의를 읽고서야 위안을 얻었나이다.'"

1935년 12월 8일 보낸 <성서조선>한 독자는 마침내 김교신에게 함석헌의 한국역사에 대한 글을 단행본으로 출판해 달라고 까지 요청하기에 이른다.

"출판독촉여하. '귀사에서 발간하는 성서조선 지상에 연재 하옵던 함석헌 선생께서 집필하던<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는 여기 M씨에게서 빌려 봤습니다. 그런데 그 책을 단행본으로 출판하지 않으시렵니까. 꼭 좀 알려 주십시오. 그 책을 단행본으로 출판하시면 꼭 한권 사겠습니다. 미안하지만 좀 알려 주시기를 절망하나이다.' 첫째로 출판 비용이 문제다. 그러나 함 선생이 집필한 대로 전문을 인쇄할 수 있는 세상이라면 아무것을 팔아서라도 출판하련마는."

1936년 8월 15일 <성서조선>의 한 독자는 함석헌의 한국역사에 대한 글을 읽지 못한 자의 불행을 이렇게까지 묘사한다.

"함 선생님의 역사는 초범인(超凡人)하여 선지자적, 예언자적 색체를 포함한 것 같으며, 그것을 읽을 기회를 가지지 못하는 자는 대단히 불행한 자라고 생각합니다."

1937년 7월 5일 <성서조선>지에 보낸 독자는 함석헌의 한국역사에 대한 글이 자신에게 희망과 꿈을 주었다고 한다.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는 역사다운 역사를 읽지 못한 소생에게는 모든 것이 새로운 사실같이 생각되나이다. 희망 잃은 조선청년에게도 오히려 내일의 조선을 꿈꿀 수 있음을 느꼈나이다."

1937년 11월 10일 <성서조선>에서 김교신은 영남에 사는 한 독자는 함석헌의 한국역사에 대한 글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직접 방문했다고 적는다.

"영남서 모씨 내방, 함선생의 조선역사호 전부를 구한다고 하나 반 이상 품절되어서 응치 못하다."

1938년 10월 7일 <성서조선>독자는 아예 함석헌의 역사책을 필사하고 있다는 글을 김교신에게 보내기도 한다.

"전문학교 학생으로부터 학우 간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차례로 돌려가면서 읽을뿐더러 필사(筆寫)하는 중이라는 보고 오다. 대부분 품절된 오늘엔 가장 현명한 방책일 것이다."

1939년 6월 2일<성서조선>한 독자는 김교신에게 함석헌의 한국역사에 대한 글을 보내 달라고 주문하고 있다.

"함석헌씨의 논문은 논리와 역사적 의미를 천명한 명 논문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OO중학의 OO선생도 O부 원한다고 하니 대금은 후에 보내겠습니다. 우선 O책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운운. 과연 예상대로 겉 읽지 않음에 탄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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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 함석헌기념사업회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이렇게 일제강점기 김교신은 물론 그의 글을 읽던 조선인들에게 희망, 꿈, 감탄, 감명, 의분, 위안을 주었다.

함석헌의 글이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이와 같은 영감과 힘을 주었던 것은 김교신의 탁월한 '편집기술' 때문이 아니었다. 함석헌의 한국역사를 보는 혜안, 진지함, 진정성이 그대로 독자들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었다. 

장안에서는 박근혜 정권을 '지록위마' 정권이라고 부른다. 사슴을 말이라고 우기는 정권! 이 점에서는 <동아일보>의 송평근 논설위원도 마찬가지다. 그는 문창극의 역사관이 함석헌의 역사관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민중을 무시하고 부정한 권력에는 아부하며 또 그 권력의 추종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반면에 씨알을 무엇보다 가장 소중히 여기고 부정한 권력에 온 삶으로 저항한 사람이 있었다. 이렇게 확연히 다른 두 사람을 송평근씨는 결코 구분할 수 없는 것인가? 함석헌 탄생 114주년에 묻는다.  
#함석헌 #김성수 #김교신 #송평인 #문창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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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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