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옥 검사가 지난 1987년 1월 20일 고문경찰관 강진규 경사를 신문하고 남긴 조서 중 일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박 후보자는 사흘 뒤인 1월 23일 강 경사를 대상으로 두 번째 신문에 나섰지만 그 내용에서 1차 신문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연행 당시 박종철 열사의 행색, 담당업무, 신문 내용, 폭행과 사망 경위 등 1차 신문에서 물었던 것을 되풀이했다. 다만 강 경사가 사건 직후 처음 조사받은 시기와 전기고문 여부 등을 '처음으로' 추궁해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두 차례의 신문을 통틀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축소·은폐와 윗선 보고 등을 캐묻는 질문은 없었다. 1차 신문에서는 강 경사의 직속 상급자를 물었고, 그가 강민창 치안본부장과 박처원 5처장(치안감) 등을 언급했지만, 이들에게 사건을 '언제', '어떻게', '무엇'을 보고했는지 등은 물어보지 않았다. 2차 신문에서도 "피의자 소속 계장이나 과장, 부장 등 상급자는 왜 박종철이 사망하였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고 있었나?"라고 추궁하는 데 그쳤다.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박종철 열사가 사망한 직후인 지난 1987년 1월 15일 오후 3시께 "조사경찰관이 박군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책상을 '꽝' 치니 박군이 '억' 하며 쓰러져 심장쇼크로 사망하였다"라고 사망경위를 발표했다. 하지만 나흘 뒤인 1월 19일에는 결국 '고문치사'를 인정했다. '심장쇼크사'로 사건을 축소·은폐하다가 결국 '고문치사'를 인정한 것이다.
수사를 지휘하고 있던 검찰이 이러한 상황을 모를 리 없었다. 경찰이 고문치사를 인정하기 전에 최환 당시 서울지검 공안2부장이 고문치사 가능성을 검찰 안에서 제기한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후보자는 두 차례에 걸친 강진규 경사 피의자 신문에서 사망 원인 축소·은폐와 윗선 보고 등을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 특히 박 후보자는 나중에 2차 수사(1987년 5월 18일 이후)로 구속됐던 황정웅 경위와 반금곤 경장도 1차 수사에서 조사했지만, 물고문 가담 여부나 축소·은폐와 윗선보고 과정을 확인하거나 추궁하지 않았다.
수사팀 막내검사라 잘 모른다고? 한편 박 후보자는 1·2차 수사 때 물고문에 가담한 것으로 드러났던 강진규 경사 ·황정웅 경위·반금곤 경정뿐만 아니라 정아무개 경정, 박종철 열사의 하숙방 여주인과 그의 장남, 서울대 선․후배(2명) 등 수명을 조사했다. 사건의 핵심 관련자들과 주변인들을 두루 수사한 셈이다. "수사팀 막내검사라 사건을 잘 모른다"라는 일각의 주장을 무색하게 하는 대목이다.
김학규 박종철 열사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박 후보자가 수사팀 막내검사가 맞긴 하지만 4년차 검사로서 강진규 수사를 담당하는 등 아주 중요한 검사였다"라며 "박 후보자에게 나중에 공소유지까지 맡겼다는 것은 그만큼 이 사건수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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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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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관 후보 박상옥 검사는 '윗선' 추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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