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희끗거리는 3월 들녘의 고추밭

비닐이 나오기 전에는 감자보다 고추를 먼저 심었다

등록 2015.03.09 18:38수정 2015.03.09 18:38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먼 산에는 물론 그늘진 담벼락 밑에는 여전히 하얀 눈이 남아 있다. 하지만 3월이 되면 봄바람이 살랑이면서 만물만상의 생명력을 부추긴다. 꽃샘바람도 불고 난데없이 우박이 쏟아지기도 하는 3월. 어딘가에는 폭설이 내렸다는 뉴스가 심심찮게 나오는 계절이지만 농부들의 일손이 바빠지는 때다.


한 해 가장 먼저 심는 것은?

a

고추 모종키우기 비닐 집에서 고추 모종 키우는 모습 ⓒ 전새날

과수나 비닐하우스 겨울농사를 빼 놓고, 제철농사를 하는 사람들이 매년 가장 먼저 하는 농사일은 십중팔구 감자 농사다. 아직 풀이 깨어나지도 않고, 전년도의 깡마른 줄기를 찰싹 땅바닥에 깔고 있을 때에 밭을 일구는 것은 감자 심을 일 뿐이다. 3월 말부터 심기 시작하는 감자는 모든 제철 농부의 첫 농사일로 굳어져 있다. 하지만 사실 이런 현실은 오래된 것이 아니다.

설 명절을 지내고 정월 대보름 행사가 갓 끝난, 서릿발조차 무서운 2월 말에 심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고추였다. 고추가 농사의 첫 자리를 감자에게 내 준 것은 순전히 묘목을 키워 파는 육묘장 때문이다. 이제 누구도 고추씨를 2월 말에 뿌리는 사람이 없다. 4월 말이나 5월 중순 이후에 육묘장 가서 포기 당 100원 남짓 주고 사다 심는다.

고추 모종을 직접 키우는 사람도 비닐하우스 속에서 키우기 때문에 들에 나가서 감자를 제치고 고추농사부터 시작하는 경우는 없다. 그러니 요즘 고추농사는 유기농이나 자연재배라고 내세운다 해도, 엄밀히 말하면 제대로 된 제철 농사라고 할 수 없는 실정이다. 움이 트고 새싹이 자라는 과정이 인위적인 환경이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고추씨를 물에 불렸다가 아랫목에 헝겊이나 부직포를 깔고 물을 뿌려 가면서 움을 틔우는 농부들이 꽤 있다. 순수 자연재배를 하는 가족농이거나 '터박이 씨앗'(토종종자) 보존 운동을 하는 농부들이다. 손톱 반의 반토막도 안 되는 납작한 고추씨를 물에 불리려고 종류별로 봉투에서 꺼낸다. 그러다보면 봄기운을 맡은 이놈이 어찌나 생기가 넘치는지 방바닥을 데구르르 구르기도 하고 옆 물그릇으로 풍덩 뛰어 들기도 한다. 이렇게 하면 적어도 1주는 걸려 움이 튼다.


늘 따뜻하고 축축하게 해줘야 하는데, 어쩌다가 습도조절에 실패해서 말라버리면 낭패다. 그래서 고추 싹을 틔우기 위해 부화기를 사용하기도 하고, 스티로폼 속에 백열구를 넣어 섭씨 30도 정도 온도를 높이기도 한다. 물에 불렸다가 이렇게 하면 3~4일이면 촉이 난다. 그 다음에는 온상에 씨를 묻는다. 씨를 묻을 때는 촉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직파 농사의 대표주자, 고추 농사


a

고추 씨 농약 처리를 하지 않은 고추씨앗은 노르스름 하다 ⓒ 전새날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따끈따끈한 아랫목에는 고추씨 싹을 틔우기는커녕 주렁주렁한 자식들 누일 자리도 모자랐다. 밭에 직접 씨를 뿌릴 수밖에 없다보니 2월 말이 고추농사 시작이었다. 임진왜란 때 고추가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 보면 350년 동안 이렇게 농사를 지었다고 보인다.

당시에는 씨앗을 어디 가서 돈 주고 산다는 개념이 없었다. 누구 집에나 고추씨는 몇 되박이나 있어서 아낌없이 줄줄 뿌린다. 모자라면 옆집에서 얻어 온다. 씨앗은 요즘처럼 농약으로 소독한 알록달록한 씨앗이 아니고 옅은 노랑색이었다.

대개 줄뿌림을 했는데 쟁기로 한 줄은 깊게 갈고 그 옆줄은 조금 얕게 갈아서 깊게 간 곳에 거름을 넣고 고추씨를 뿌린 다음에 흙으로 덮는다. 얕게 간 골은 사람 다니는 통로가 되고 고추 두둑으로 끌어 올릴 흙을 제공하는 곳이기도 하다. 고추를 심은 뒤에 서리도 오고 눈도 오는지라 발아율은 형편없었다. 어쩌다 날이 가물기라도 하면 싹이 나지 않고 말라 죽는다. 오롯한 제철농사다.

두 달여 뒤에는 많이 올라 온 고추 싹을 뽑아 드문 곳으로 옮겨 준다. 이때는 잡초가 더 자라 있기도 하다. 고추 싹이 손가락 한 마디쯤 자란다. 한 달 반이나 두 달여 걸린 셈이다. 그러니 고추 싹 올라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려야 했다. 싹이 안 나면 남아 있던 고추씨를 다시 뿌리기도 했다. 6월 초·중순에 보리를 베어 낸 자리에 고추모종을 옮겨심기도 했지만 옮겨 심는 것은 보조 차원의 방식이고 직파재배가 주를 이뤘다.

우리가 고추라고 하면 빨간 고춧가루만 연상하기 쉽다. 하지만 솎아 내거나 곁순을 자르면 이건 나물이 된다. 풋고추는 채소에 속하고 고춧가루는 양념이 된다. 요즘은 한때심기(가식)와 아주심기(정식) 등 두 번에 걸쳐 고추를 옮겨 심지만, 옛날에는 씨를 뿌린 자리에서 키웠다.

농작물은 옮겨 심으면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된다. 옮겨 심는 과정에서 잔뿌리가 다 떨어져 나가기 때문에 오는 스트레스다. 살포시 비가 오는 날이거나 물뿌리개로 물을 흠뻑 뿌리고 나서 옮겨 심는다 해도 마찬가지다. 옮겨심기를 통해 작물이 더 튼튼해진다는 설이 있으나 명확치는 않다. 풀 잡기와 밭 만들기에는 옮겨심기가 좋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작물의 건강에는 손상을 줄 것으로 보인다.

직파 농사의 최대 장점은 뿌리가 튼튼하여 건강하다는 것이다. 추운 바깥 날씨 속에 씨를 뿌리고, 그곳에서 싹을 틔우게 하는 고추 농사야말로 직파 농사의 으뜸이라 할 것이다. 7월이 넘어서면 풀을 매면서 또 고추 싹을 솎아 내야 한다. 이때 조금만 늦으면 고추가 풀 속에 잠겨 허약해진다. 옆에 난 작은 골의 흙을 다시 끌어 올리는 '북주기'를 통해 잡초도 잡고 고추 뿌리내림도 튼튼하게 만들어야 한다.

제철 농사는 '터박이 씨앗'으로

a

고추밭 비교 관의 통제가 심한 농촌 현장. 박정희 그림이 이채롭다. 왼쪽은 화학농법의 고추밭이고 오른쪽은 자연재배한 모습이다. 관이 농업자본과 결탁하여 증산이라는 미명 하에 품종과 종자 및 농사법까지 좌지우지 하던 시기가 있었다. ⓒ 전새날


이렇게 키운 고추는 키가 크지도 않아 묶어 줄 필요도 없고 쓰러지지도 않는다. 원래 작물의 성질도 그러하고 많이 줄래야 많이 줄 거름도 없다. 질소가 부족하다보니 웃자람이 없어서 그렇기도 하다. 고추가 많이 달리지도 않으니 병도 없다. 고추밭에 막대기 꽂고, 줄 치고, 비닐 씌우고 하는 농사 풍경은 1974~1975년 전후로 생겼다. 개량종자가 나오고 비닐이 공급되면서 농사가 확 바뀌기 시작 한 것이다.

이때부터 화학비료와 농약이 농지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최근 학계의 발표에 의하면 한국 농촌의 급격한 변화를 주도한 '새마을운동'은 미국의 동남아시아 개발전략과 한반도 안보 전략에 따른 기획이었다고 한다. 1960년대 말의 안보 취약지구에 건설 된 '전략촌'이 그 효시라고 한다. 종적인 관의 주도성과 마을단위의 감시체제를 강화하는 전략이었다는 것이다.

고추밭 둘레를 따라 들깨를 심으면 강한 들깨 향이 고추벌레를 쫒는다는 설이 있다. 고추씨를 뿌릴 때 대파씨랑 같이 뿌리면 좋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색과 향과 함께 지상부의 장악력을 조화롭게 할 것 같긴 하다. 수수를 듬성듬성 같이 키우면 고추 가지가 의지하고 설 수 있어서 묶어주지 않을 수 있다고 한다. 키가 훌쩍 큰 수수는 그늘도 만들지 않아 피해가 없다고 하지만 땅의 영양분을 많이 빨아가는 수수를 같이 심는 게 좋을지는 장담하기 힘들다.

고춧가루는 캅사이신 성분이 있어 매운 맛이 난다. 혈액순환과 식용증진 소화액 분비를 촉진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춧가루에는 비타민 시(C)도 많은데 사과나 밀감보다도 많다고 한다.

a

고추 붉은 고추. 햇살에 잘 마른 고추 ⓒ 전새날

옛날 어른들 얘기에 의하면 고추에는 절대 여자 오줌을 주지 않고 남자 오줌을 줬다고 한다. 남자 오줌을 고추밭에 뿌리면 고추가 튼실해지지만 여자 오줌을 뿌리게 되면 고추농사 망친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뒷간에도 여자 오줌을 받는 독과 남자오줌 받는 독이 따로 있어서 엄격히 지켰다고 한다.

여자 독 위에는 양 옆으로 발판용 나무 판때기를 깔아서 두 발로 딛고 쪼그려 앉아 오줌을 눈다. 이를 '부출'이라고 부른다. 남자 독은 툭 트여 있고 비 가림 지붕만 있지만 여자 독 주위는 남의 눈을 가릴 이엉과 출입 거적을 둘러친다.

옛말이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따질 일은 아니다. 사회의 금제 사항을 두어 정성과 노력을 촉진하는 면이 크다.

남녀의 오줌을 따로 모으게 하면서 여성 뒷간에 남자가 접근 못하게 하는 효과가 컸으리라 본다. 어느 지역에서는 파종을 할 때면 사람은 물론 가축마저 암수를 따로 분리하여 엄숙하게 의식 치르듯 씨앗을 심었단다. 어느 지역에서는 파종 전날 남녀 합궁을 적극 장려했다고 전해진다. 모두 이런 연유라 하겠다.

제철 전통농사를 꿈꾸는 사람들은 요즘 여기저기서 열리는 '터박이 씨앗' 행사에 가서 대화초나 유월초, 수비초나 사근초 등을 구하면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한살림의 월간지 <살림이야기> 3월호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고추 #자연재배 #직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농(農)을 중심으로 연결과 회복의 삶을 꾸립니다. 생태영성의 길로 나아갑니다. '마음치유농장'을 일굽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100개 눈 은둔자' 표범장지뱀, 사는 곳에서 쫓겨난다
  2. 2 카자흐스탄 언론 "김 여사 동안 외모 비결은 성형"
  3. 3 최재영 목사 "난 외국인 맞다, 하지만 권익위 답변은 궤변"
  4. 4 [단독] '김 여사 성형' 왜 삭제? 카자흐 언론사로부터 답이 왔다
  5. 5 한국의 당뇨병 입원율이 높은 이유...다른 나라와 이게 달랐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