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숲
김종길
사바세계에 어째 주인이 따로 있겠소큰절에서 약간 떨어진 암자 구층암에도 신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번잡함을 피해 해우소 옆 대숲으로 빠져나가니 인적 소리가 갑자기 뚝 끊어졌다. 어두컴컴한 대숲 너머로 마치 딴 세상처럼 평온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층층 잘 가꾸어진 화단 위로 단아한 건물 한 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세 칸짜리 암자는 쪽마루를 둘러 누구나 편히 앉을 수 있게 했다. 방문은 활짝 열린 채였고 고무신 한 켤레가 댓돌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헛기침을 하고 스님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다. 하는 수 없이 주인 없는 암자에 배낭을 내려놓았다.
쪽마루에 걸터앉아 암자를 둘러싼 푸근한 산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바람이 부드럽게 뺨을 스친다. 숲에선 새소리가 들린다. 마당에는 봄빛이 가득하다. 따사롭다 못해 지루하기까지 한 봄 햇살. 까치 두 마리가 마당 한편에 놓인 돌확에 고인 물을 한가로이 마시고 있다. 조심스레 다가서자 후루룩 날아가 버리더니 어느새 나뭇가지에 앉는다. 새가 앉은 곳은 동백나무, 그러고 보니 암자를 둘러싼 뒷산이 모두 동백 숲이다.
▲까치
김종길
▲동백
김종길
까치의 걸음을 좇아 숲으로 들어간다. 봉천암이다. 이곳 역시 스님이 없다. 다시 동백 숲으로 들어간다. 아직 꽃을 피우지 않은 걸로 보아 동백이 아니라 춘백이다. 몇몇은 서둘러 꽃을 피웠지만 숲은 여전히 순수의 상록이다. 숲 가운데에 있는 산신당을 지나 계곡 물소리를 왼쪽 귀로 들으며 다시 길상암으로 돌아왔다.
볼펜과 노트를 꺼냈다. 암자의 넘치는 봄볕을 적고 싶었다. 겨우 한 줄이나 적었을까. 행간의 숨을 고를 사이도 없이 누군가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도둑질이나 한 것처럼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아이고 스님, 허락도 없이 이렇게 쉬고 있습니다.""거 무슨 말이오. 사바세계에 어째 주인이 따로 있겠소?""볕이 하도 좋아서 미적거리고 있었습니다.""나 또한 금생에 이곳을 잠시 빌려 쓰고 있을 뿐이오. 우리 모두 이생에 잠시 머무는 것뿐인데, 어찌 주인과 객이 따로 있겠소.""예, 그렇긴 합니다만….""어디서 오셨소?"
▲매화
김종길
스님, 저 매화는 언제쯤 핍니까"스님, 저 매화는 언제쯤 핍니까?""글쎄요. 요즘은 어디 종잡을 수가 있어야지요.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는 법이고, 꽃이 피는 데도 순서가 있는데, 요즘은 한꺼번에 피니 사이사이의 묘가 없다 말이요. 개나리, 목련, 산수유, 매화, 심지어 벚꽃까지도 일제히 꽃을 피우니 우리에게 얼마나 죄업이 많다 말이오. 한 사람이 소비하는 에너지양이 너무 많으니 자연도 버텨내지 못하고 저렇게 돼 버린 게 아니겠소. 지구의 절반에는 음식이 남아돌고 절반은 굶주리고 있으니…."마당 끝에 서서 아래 연못가에 있는 매화나무를 바라보며 이야기는 계속됐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화엄사 매화이다. 들매화로도 불리는 이 매화는 각황전 옆의 홍매화보다 유명세는 덜하지만 은은한 맛이 일품이다. 응달에 있어 아직 꽃망울조차 맺지 않았지만 붉은 기운이 점점 퍼지고 있었다.
양지 쪽 화단에는 금방이라도 꽃을 피울 듯 한껏 꽃망울이 부풀어 오른 매화 한 그루가 더 있었다. 10년 전에 스님이 10년생을 가져와 심은 매화란다. 나이가 20년이나 된 셈이다. '꽃을 보고 색이 공함을 깨닫고 새소리를 듣고 듣는 성품을 밝힌다(看花悟色空 聽鳥明聞性)'고 했던가.
▲암자
김종길
매화에서 허공으로 시선이 가자 스님이 마루에 앉기를 권했다.
"멍하니 있어나 봐라, 는 말이 있죠. 너무나 정신없이 바쁜 세상이지요. 일대사인연이라고…. 생사를 초월하는 것이 일대사인연이라는 거요. 나는 누구인가. 근원과 본질에 대한 통찰이 바로 선이 아니겠소. 티끌에서 우주를 보는 화엄의 세상 말이오. 이 뭣꼬 한마디만 깨달아도 최종 목적지에 이르는 것이지요.…"제2의 싯다르타이자 불교 역사상 가장 탁월한 사상가로 불리는 나가르주나는 <중론>에서 "어떤 존재도 인연으로 생겨나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러므로 어떤 존재도 공空하지 않은 것이 없다"라고 했다. <화엄경>의 세계관은 '해인 삼매'이고, 인생관은 '화엄 삼매'이다. 꽃으로 꾸민다는 뜻의 화엄. 꽃이 반드시 열매를 맺듯이 보살의 행위 또한 깨달음에 이른다는 뜻이다.
오로지 진리에 마음을 두어 주관과 객관, 상대의 관계를 초월하는 일이 곧 화엄 삼매이다.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행하여 비로자나불의 세계인 진리에 이를 것인가, 비로자나불의 진리의 세계를 사회적으로 실천해 가는 일이 곧 화엄 삼매인 것이다.
▲풍경
김종길
언제 차 한 잔 하시지요봄에 달뜬 계곡 물소리가 쉼 없다. 아래 큰절에서 올라온 거사가 노고단에서 채취했다는 고로쇠를 가져오는 바람에 잠시 스님의 이야기는 끊겼다. 그러나 이내 스님은 거사를 내려 보냈고 쪽마루에서의 한담은 계속됐다.
"결국 평상심이 도인 게지요. 걷고, 잠자고, 밥 먹고 이 모든 것이 도 아니겠소. 상대로 구분 짓지 않는 중도에 이르는 것, 결국 그 중도마저 떠나는 것이 해탈이 아니겠소."멀리 물소리가 바람소리를 안고 돈다. 바람이 얼굴을 어루만지자 스님의 말소리가 귓속 가득히 울려온다.
▲봄볕
김종길
"지리산은 영산이지요. 이곳에 서 보니 저 산자락과 기운이 상서롭게 보이더라 말이죠. 그래서 길상암이라고 이름 붙였지요. 경치가 으뜸인 금강산은 젊었을 때에, 묘향산은 중년에, 지리산은 말년에 생활하기 좋은 곳이라고들 합디다."실제 많은 고승들이 젊은 시절에는 금강산에서, 말년에는 지리산에서 수도했다. 지리산에서 도를 깨친 서산대사는 금강산에서 보림(깨달은 뒤에 더욱 갈고 닦는 수행법)하고 묘향산에서 입적했다. 금강산은 수려하기는 하지만 넉넉하지 못하고(수이부장, 秀而不壯), 지리산은 넉넉하기는 하지만 수려하지는 못한데(장이불수, 壯而不秀) 묘향산은 수려하기도 하고 넉넉하기도 해서(역수역장, 亦秀亦壯) 가장 머물 만하다고 했다. 지리산은 부휴 선수, 벽송 지엄, 소요 태능 등 기라성 같은 선승들이 수도를 하고 입적을 한 곳이다. 경주 남산이 신라 왕경의 불국토였다면 지방호족과 민초들의 불국토는 바로 지리산이었다.
▲주객
김종길
어느덧 볕이 엷어지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루에서 일어섰다. 저녁 공양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벌써 두어 시각을 훌쩍 넘겼다. 아까 큰절에서 올라온 거사가 두고 간 노고단 고로쇠를 스님이 한 사발 따라준다. 겨울을 이겨낸 수액의 깊은 맛이 입안에 오래 남는다.
"차 한 잔 대접 못해서 미안합니다. 암자 수리가 끝나면 언제 차 한 잔 하시지요."연못가 매화나무 아래서 작별을 했다. 스님은 휘적휘적 계곡으로 난 대숲으로 사라졌다. 매화는 비록 보지 못했지만 마음속엔 이미 봄꽃이 활짝 피었다. 올봄에는 아마 꽃을 찾을 일이 없을 듯싶다. 가지마다 햇살이 눈부시다. 모아둘 곳 없는 봄 햇살이 세상의 모든 가지에 눈부시게 흩어진 모양이다. 암자 뒤 차밭을 올랐다.
"세속과 청산은 어느 것이 옳으냐 봄볕 비추는 곳에 꽃피지 않는 곳이 없구나((世與靑山何者是 春光無處不開花)" - 경허 선사의 오도송
▲작별
김종길
길상암과 구례 화엄사 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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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문헌에 화엄사(전남 구례)에 81암자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구층암, 연기암, 금정암 등 십여 곳만 남아 있다. 길상암은 일제강점기 대처승이 살던 곳으로 20년 전 지금의 명곤 스님이 그 자리에 암자를 지었다. 대개 옛 터에 암자를 세운 화엄사의 다른 부속암자와는 달리 근래에 지은 것이다.
구례 화엄사 매화는 길상암 앞 대숲 급경사지에 자라는 나무이다. 원래 4그루가 있었으나 3그루는 죽고 한그루만 남았다고 한다. 이 매화는 사람이나 동물이 매실을 먹고 버린 씨앗이 싹 터서 자란 것으로 짐작되어 일명 '들매화(野梅)'로 알려져 있다. 이런 들매화는 접붙임으로 번식시키는 개량종 매화보다 꽃이 듬성듬성 피고 작으나, 수형이 아름답고 꽃향기가 오히려 더 강한 특징이 있어 학술적 가치가 크다고 한다. 수령은 450년으로 추정되며 2007년 10월 8일 천연기념물 제485호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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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미식가이자 인문여행자. 여행 에세이 <지리산 암자 기행>, <남도여행법>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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