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제 말 안 들리세요?2014년 2월 7일, 양주 대진요양원에서
안건모
장례식장을 예약하려고 작은형 집과 가까운 서울 상계동 ○병원으로 전화를 했다.
"아, 돌아가실 때가 됐는데 빈소가 있나요?"장례식장은 예약이 되지 않는단다. 그렇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어떻게 예약을 하나.
오후 두 시경 민방공 사이렌이 울린다. 박정희 시대로 돌아간 듯하다. 그 사이 두 번 병실에 들어갔는데 자꾸 숫자가 떨어지고 있다. 간호사가 또 나가라고 한다. 아니 임종도 못 지키게 하나? 한 번 째려보고 나갔다. 밖에 나가서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형수가 울면서 말한다.
"임종하셨어요.""애애애앵!"사이렌 소리가 길게 들린다. 무슨 소리야? 우리 어머니 돌아가셨다고 나라에서도 경보를 울려주나? 아, 민방공 해제 사이렌이구나.
병실에 들어갔더니 의사가 어머니 몸에 매달린 줄들을 떼고 있다. 간호사가 또 나가라고 한다. 이런 젠장, 이것들이 무조건 나가래. 아니 어머니 마지막 모습도 못 보냐? 못 들은 척 어머니를 바라봤다. 입을 벌린 모습이 벌써 해골이다.
"나가세요. 정리하면 부를게요."조금 있으니 막내 여동생이 도착했다. 나하고 여섯 살 차이 나는 여동생이다. 우리를 보더니 왈칵 울음을 쏟는다.
"어떻게 해? 살아 계실 때 보려고 했는데 벌써 돌아가셨어. 엄마! 조금만 기다리지. ○○이가 왔는데…."그런 ○○이를 보고 있으니 그제서야 눈물이 난다. ○○이는 어릴 때 아버지 의처증 때문에 맘 고생을 많이 했다. 아버지는 막내딸이 자기 딸이 아니라고 하면서 어머니를 무지막지하게 때리기도 했다. 그런 아버지가 1989년에 돌아가셨다. 그때도 막내여동생이 가장 많이 울었다.
○병원에서 장의차가 왔다. 병실에서 어머니를 다시 봤다. 벌려 있던 어머니 입이 닫혀 있었다. 아마 강제로 닫았나 보다. 시신을 모시는 병원 측 사람이 어머니를 천으로 감싼다. 얼굴도 감싸고 그 위에 흰 면으로 덮는다.
시신을 모시는 장례차에 어머니를 싣고 장례식장으로 왔다. 상조회사에서 나온 남자, 여자 두 사람이 형들 두 사람만 들어오게 한 뒤 어머니 머리를 잡게 하고, 소독된 거즈로 어머니 몸을 닦는다. 나머지 사람들은 유리창으로 본다. 얼굴, 덮여 있는 천에 손을 집어넣어 닦으니 어머니 몸은 보이지 않는다. 천 밖으로 나온 팔이 젓가락같이 가늘다. 입관하기 전에 막내여동생이 울음을 터뜨린다.
"가만 있어 봐요. 어머니 돌아가시는 것도 못 봤어."어머니 얼굴을 감싸고 흐느낀다. 그 모습을 보니 눈물이 나온다. 모두들 울면서 코를 훌쩍거린다.
화장할 분한테 최고급 천이 무슨 소용다시 빈소로 왔다. 병원 관계자가 사무실로 우리를 부른다. 빈소 비용, 손님들한테 주는 음식 값. 냉장고에 음료수와 소주를 갖다 놓고 손님들이 먹는 대로 돈만 내면 된다는 둥 여러 가지를 보여준다. 그 다음 작은형수가 가입돼 있었던 ○○상조 사람이 나와 팸플릿에 나온 그림을 보여주면서 설명을 한다.
"최고급 천으로 된 수의, 최고급 오동나무로 된 관, '어쩌고저쩌고' 이렇게 250만 원입니다."금방 화장할 분한테 무슨 최고급 천과 최고급 오동나무가 소용이 있나.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상조 직원은 계속 설명을 한다.
"육개장으로 하고, 떡은 절편, 과일은 방울토마토…."상조회사에서 상복도 주는데 역시 공짜는 아니고 모두 비용을 내야 한다.
첫날엔 문상객이 안 올 줄 알았더니 다섯 시도 안 돼 사람들이 오기 시작한다. 밤에 약속이 있어서 못 오는 사람들이 일찍 들르는 거다. 역사와산 모임 김○○씨도 일찍 왔다. 아마 유○○씨가 페이스북에 올렸거나 내가 아는 단체 몇 명한테 전화를 했나 보다. 형은 빈소에 앉아서 핸드폰으로 아는 이들에게 전화를 끊임없이 한다.
"아, 별일은 아니고 어머니가 돌아가셨네. 시간 있으면 들러."똑같은 소리를 한 시간 넘게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별일은 아니'라고 운을 떼면서 오라고 하니까 좀 어색하다. 나는 핸드폰이 없어서 전화할 데가 없다. 그래도 나 때문에 오는 손님이 많다. 빈소에서 문상하는 걸 보고 맞절하고 또 나가서 대화를 나누고, 따라주는 술 한잔하고 정신이 없다. 열두 시 넘어 술이 취했다. 손님들도 이젠 끊어지고 가족들끼리 모여 또 술 한잔했다. 새벽 세 시까지 먹었나? 기억이 없다.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열 시 넘어 일어났다. 오후가 되면서 끊임없이 손님들이 왔다. 나 때문에 오는 손님들은 참 특이했다. 각설이 타령을 하는 기만서처럼 문어대가리 같은 대머리, 무슨 도사처럼 개량한복을 입었거나 고인돌출판사 사장처럼 허연 머리를 늘어뜨린 사람, 집회에서 금방 나온 듯한 등산복 점퍼에 등산화를 신은 사람들, 자유분방하게 차려 입은 노동당원들, 평생 해고자 신분으로 살아가는 노숙자 차림의 해고자들, 아들 뻘 되는 조기축구회 회원들….
나중엔 빈소에 누가 와서 기웃거리면 우리 형님들이 그이들 차림새만 보고도 "안건모씨 찾아오셨어요?" 하고 묻거나 나한테 "건모야, 니 손님 왔다" 할 정도였다. 전국해고자투쟁위원회(전해투) 동지들이 봉투에 '해고자 ○○○'라고 쓴 글을 보고는 식구들이 "해고자가 뭐야?" 하고 묻기도 했다.
"회사에서 해고당해서 복직 투쟁하는 사람들이지."연락을 안 해도 찾아와 주는 손님들이 참 고마웠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나 어머니 환갑잔치 때처럼 집안에 애경사가 있을 때 내 손님은 없었다(어머니 환갑잔치 때는 잔치를 하다 말고 집회에 참석하려고 빠져 나올 정도로 집안일에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가족들한테 미안했는데 이번에 조금 면목이 서는 것 같다(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산소호흡기 절대 대지 마라... 내 삶을 연장시키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