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장'까지 받은 독립운동가, 행적이 의심스럽다

[발굴] '대전 김태원' 행적, 당시 보도와 달라...관련 연구가 "다른 인물인 듯"

등록 2015.04.13 14:06수정 2015.08.03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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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기념관 5관의 무명독립군상. 나라를 위해 싸운 무명의 독립군들의 모습을  연출, 재현해 놓고 있다. 4월 13일은 한국 임시정부 수립 96주년이다.
독립기념관 5관의 무명독립군상. 나라를 위해 싸운 무명의 독립군들의 모습을 연출, 재현해 놓고 있다. 4월 13일은 한국 임시정부 수립 96주년이다.독립기념관

한국 임시정부 수립 96주년(4월 13일)을 앞두고 있는 가운데 국가보훈처로부터 건국공로 훈장을 받은 대전의 한 독립유공자의 행적이 의심받고 있다. 이름만 같은 다른 독립운동가의 행적만으로 서훈을 받은 것 아니냐는 의혹을 사고 있다.

대전 출생인 김태원(金泰源, 1900~1951)은 지난 1963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3등급)을 받은 대전의 대표적 독립운동가 중 한 사람이다.

우선 국가보훈처가 밝힌 그의 공적 내용을 들여다보자.

"충남 대전(大田) 사람이다. 1918년 약관의 몸으로 족형 김용원(金庸源, 대전지역 독립운동가 -기자 주)과 같이 중국으로 망명하여 황포군관학교(후손들은 '운남육군강무학교'라고 밝히고 있다-기자 주)를 졸업했다. 그는 1919년 3·1운동 직후에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 산하에서 활동했다. 그는 1922년 남만에 있는 광복군 사령부 국내 파견원 등과 함께 평북 삭주(朔州) 군내에 들어와 대관면(大館面)의 일경주재소 및 창성주재소(昌城駐在所)를 습격, 일경 4명을 사살했다. 같은 해 8월에는 평북 벽동(碧潼) 창성 양군 경계지점에서 양승우(楊承雨)와 함께 평안남북도 지역의 군자금 모집과 일경 및 밀정 차단을 목적으로 무장항일단체인 벽창의용단을 조직해 맹렬하게 활동했다.

그는 평북 의주(義州)에서 일제기관인 보민회의 회장 오모(吳某)를 사살하고, 또 평남 대동군(大同郡)관내의 금촌(金村) 일경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경찰 3명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계속하여 평북지역의 금융조합을 습격하는 한편 관서 일대를 무대로 일경과 밀정을 만나는 대로 사살하고 또 그들의 집까지 불태워버리는 등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다시 만주 관전현(滿洲寬甸縣)으로 건너가 항일투쟁을 계속하였으며, 1926년 5월에 다시 국내에 진입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던 중 신의주(新義州)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1926년 5월 14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평양복심법원에서 항소하였으나, 1926년 9월 4일 기각당하고 평양감옥에 수감되어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중 천우신조로 탈옥에 성공, 그 길로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그는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조국 독립을 위해 12년간 헌신 노력한 끝에 1945년 광복을 맞이하고 귀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지난 2008년 10월, 대전지방보훈청이 대전 대덕구 쌍청공원 내에 소재한 김태원 선생 어록비에서 정화 활동을 벌이고 있다.
지난 2008년 10월, 대전지방보훈청이 대전 대덕구 쌍청공원 내에 소재한 김태원 선생 어록비에서 정화 활동을 벌이고 있다. 국가보훈처

'벽창의용단'으로 서훈 받은 독립운동가, 출생지 대전? 평북 의주?


18살 나이에 임시정부에서 활동, 22년 평북 삭주에서 일경 4명 사살, 벽창의용단 조직 활동, 평북 의주에서 일경 3명 사살, 일제기관단체장 사살, 사형선고 받았으나 탈옥...' 그의 공적은 누가 봐도 건국훈장을 받기 충분하다.

그의 핵심 공적으로 꼽힌 벽창의용단(碧昌義勇團)은 광복군사령부 직속의 별동대로 설치된 관전현에 본부를 둔 국내진입활동을 목적으로 조직된 특수조직이었다. '벽창'이 벽동군(碧潼郡)과 창성군(昌城郡)의 머리글자를 따 만들었고, 창단 직후부터 단장 양승우의 진두지휘 아래 주재소 및 금융조합 습격, 일경과의 교전, 밀정 처살, 자금 수취 및 독립단원 모집 등의 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오마이뉴스>는 제보를 받고 그의 공적을 재확인하는 과정에서 실제 의아한 부분을 발견했다. 국가보훈처(아래 보훈처)는 그의 공적 내용을 뒷받침하는 핵심 근거로 <동아일보>(1926년 7월 1일 자, 7월 17일 자, 9월 6일 자)를 제시했다.

<동아일보> 1926년 7월 1일 자료에는 김태원 관련 기사가 실려 있다. 당시 '벽창의용단 김태원 사형(선고)' 제목의 기사에는 '양승우를 단장으로 한 벽창의용단 가입과 군자금 모금, 오 모씨 사살, 5월 14일 신의주 지방법원 사형선고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보훈처가 밝힌 공적 내용과 흡사하고 사형 선고 날짜까지 일치한다. 같은 해 7월 17일 기사는 '김태원 공판' 제목으로, 공판이 8월 17일로 연기됐다는 소식을 다루고 있다.  같은 해 9월 6일자 기사에는 '사형을 또 언도' 제목으로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언도 받은 김태원이 '9월 4일 평양 복심법원'(2심 법원)에서도 사형언도를 받았다"고 보도했다.   

의아한 부분은 해당 기사가 김태원을 대전이 아닌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면 출생'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이도 24세로 '대전 김태원'보다 두 살이 적은 1902년생이다. 어찌된 일일까? <동아>가 '대전 김태원'의 출생지를 '평북 김태원'으로 잘못 표기한 것일까?

 1926년 7월 1일자 <동아일보>보도. '대전 김태원'의 공적 내용을 뒷받침하는 보도내용이 담겨 있다.  하지만 출생지가 대전이 아닌 '평북 의주군 의부면 으로 돼 있어 다른 사람이 아니냐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1926년 7월 1일자 <동아일보>보도. '대전 김태원'의 공적 내용을 뒷받침하는 보도내용이 담겨 있다. 하지만 출생지가 대전이 아닌 '평북 의주군 의부면 으로 돼 있어 다른 사람이 아니냐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심규상

 서훈을 받은 대전 출생의 김태원과 달리 <조선일보>기사에는 출생지가 '평북 의주군 의주면 서부동'으로 돼 있다. <동아일보>의 '평북 의주 출신'이라는 보도를 뒷받침 하고 있다. 사진은 1926년 4월23일 <조선일보>
서훈을 받은 대전 출생의 김태원과 달리 <조선일보>기사에는 출생지가 '평북 의주군 의주면 서부동'으로 돼 있다. <동아일보>의 '평북 의주 출신'이라는 보도를 뒷받침 하고 있다. 사진은 1926년 4월23일 <조선일보>심규상

독립유공자 후손 "옥바라지하기 위해 잠시 머물던 어머니 주소지"

국가보훈처가 인용하지 않은 <조선일보>(26년 7월 4일자) 기사도 관련 소식을 다루면서 출생지와 나이를 "평북 의주군 의주면 출생 김태원(24)..."이라고 <동아>와 동일하게 썼다. 특히 <조선>은 같은 해 4월 23일 자 보도에서는 "21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의주군 의주면 서부동에 원적을 둔 김태원의 1회 공판이 열렸다"고 보도했다. 본적이 '평북 의주'라는 것이다. 서훈을 받은 '대전 김태원'의 본적은 지금의 '대전 동구 홍도동'이다.  기사 속 인물이 '대전 김태원'이 아니라는 의혹을 갖게 하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대전 김태원'의 후손인 차남 김정인(80·광복회대전지부장)씨는 돌아가신 모친에게 들은 얘기라며 "당시 누님과 중국 봉천(심양)에 살던 어머니가 고향인 대전으로 오던 중 신의주에서 불심검문을 당했는데 보따리에서 아버지의 육군강무학교 졸업장이 발견돼 신의주 경찰서에 수감됐고, 아버지가 동지들과 함께 구출투쟁을 하다 아버지마저 붙잡혔다"고 말했다. 이어 "풀려난 어머니가 아버지를 옥바라지하기 위해 신의주에 방을 얻어 잠시 머물렀고, 이 때문에 아버지가 주소지를 편의상 '의주'로 진술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탈옥했다던 '김태원' ...,<조선> <중외> 사형집행 보도

보훈처의 공적내용을 보면 앞의 기사 속 '김태원'은 평양 감옥에서 수감돼 사형 집행을 기다리다 '천우신조'로 탈옥한다.

 사형집행 전 탈출했다는 '대전 김태원'과 달리 '평북 김태원'은 사형이 집행됐다고 보도하고 있다. 사진은 <중외일보> 1926년 12월31일 자 보도. 앞서 1926년 12월 30일자 <조선일보>도 '김태원'의 사형집행 소식을 전하고 있다.
사형집행 전 탈출했다는 '대전 김태원'과 달리 '평북 김태원'은 사형이 집행됐다고 보도하고 있다. 사진은 <중외일보> 1926년 12월31일 자 보도. 앞서 1926년 12월 30일자 <조선일보>도 '김태원'의 사형집행 소식을 전하고 있다. 심규상
하지만 <중외일보>는 같은 해 12월 26일자 기사에서 "신의주지방법원과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상고 중이던 김태원이 경성고등법원에서도 상고 기각되어 평양지방법원에서 불원 중에 사형을 집행할 터이다(평양)"라고 보도했다.

<중외일보>는  같은 해 12월 31일 '사형 집행' 제목의 기사를 통해 "김태원의 모친이 지난 23일 오전 11시에 평양형무소에서 자기 아들의 사형을 집행했다는 슬픈 소식을 접했다"고 전했다. 앞의 4월과 7월, 9월 <동아>와 <조선> 기사 속 김태원이 사형됐다는 것이다. <조선>은 <중외일보>보다 하루 앞서 김태원의 사형집행 소식을 보도했다. <조선>은 같은 해 12월 30일 자 보도에서 <중외일보>와 동일하게 "12월 23일 오전 11시 평양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됐다"고 썼다.

앞의 '대전 김태원'의 후손인 김정인씨는 "사형 당했다는 신문 보도는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며 "아버지가 1926년 10월 또는 11월 탈옥한 것이 분명한 만큼 신문보도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일제가 탈옥 사실을 숨기기 위해 허위로 사형을 집행했다고 발표했을 개연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사형 집행 후 모친 '장씨' 인터뷰... '대전 김태원' 모친은 '남씨'

하지만 서훈을 받은 '대전 김태원'과 기사 속 '평북 김태원'(金泰源 1902 ~1926)이 다른 인물로 의심되는 부분은 또 있다. '대전 김태원'의 친모는 '남씨'다. 그런데 앞의 <중외일보>는 12월 31일 기사에서 "...사랑하는 아들의 앞길을 염려해 마지않은 그의 친모 장씨는..."이라고 썼다. 김태원의 친모가 '장씨'라는 것이다. <중외일보>의 오보일까?

<조선>의 김태원의 친모에 대한 보도는 이보다 구체적이다. <조선>은 앞의 12월 30일자 기사에서 김태원의 노모를 인터뷰한 별도의 기사를 내보냈다.

"노모 장씨의 집으로 방문한 즉 육십이 넘어 여위고 주름진 얼굴,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며 먼 산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그는 힘없이 고개를 돌리며 목멘 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중략)"

<조선> 역시 김태원의 노모를 '장씨'라고 썼다. 더욱이 이 보도가 '신의주발'이므로 장씨는 당시 평북 의주에 살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반면 '대전 김태원'의 친모는 '남씨'인데다 대전을 떠나 생활한 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대전 김태원'의 후손은 "왜 신문들이 그렇게 보도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1926년12월 30일자 보도에는 사형당한 김태원의 어머니를 의주에 거주하는 '장 씨'라고 밝히고 있다. <중외일보>도 다음 날인 31일 보도에서 김태원의 어머니를 '장씨'로 소개하고 있다. 서훈을 받은 '대전 김태원'의 어머니는 '남 씨'로 당시 대전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조선일보> 1926년12월 30일자 보도에는 사형당한 김태원의 어머니를 의주에 거주하는 '장 씨'라고 밝히고 있다. <중외일보>도 다음 날인 31일 보도에서 김태원의 어머니를 '장씨'로 소개하고 있다. 서훈을 받은 '대전 김태원'의 어머니는 '남 씨'로 당시 대전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심규상

두 사람은 활동 장소와 공적 내용이 비슷하다. 두 사람의 독립운동 공적 중 공통점은 아래와 같다.

-대전 김태원/ 관전현, 양승우, 벽창의용단, 오모씨 사살, 군자금모금, 신의주법원 사형 선고, 평양복심법원 사형선고 (평양형무소에서 사형집행 전 탈옥)
-평북 김태원/ 관전현, 양승우, 벽창의용단, 오초여 사살, 군자금모금, 신의주법원 사형 선고, 평양복심법원 사형선고 (평양형무소에서 사형집행)

반면 활동 시기는 다르다. <동아>의 1926년 7월 1일자 보도에 따르면 '평북 김태원'은 1919년(대정 8년) 중국 관전현에 건너가 그 곳에 근거를 둔 독립단에 가맹한 후 관남지부에서 활동하다 1920년(대정 10년) 벽창의용단에 가입했다. 같은 해 6월 평북 창성군 신창면 풍동리 오석찬의 집에 가서 오씨에게 군자금 300만 원을 청구하였으나 응하지 않자 권총을 쏘아 그를 부상케 하고 차남을 사살했다. 같은 해 7월에는 군자금을 얻으러 갔다 비협조적인 오초여를 사살했다.

'대전 김태원'의 보훈처 공적 내용은 '평북 김태원'과 매우 흡사하지만 1922년 광복군 사령부 국내 파견원 등과 함께 평북 삭주(朔州)에 들어와 대관면(大館面)의 일경주재소 및 창성주재소(昌城駐在所)를 습격, 일경 4명을 사살한 것으로 돼 있다. 벽창의용단을 조직해 활동을 시작한 시기도 같은 해 8월로 쓰고 있다. '벽창의용단' 가입시기가 '평북 김태원'과 2년이 다르다. 

이 같은 정황은 '평북 김태원'의 행적이 '대전 김태원'의 것으로 둔갑됐다는 의혹을 짙게 하고 있다.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 후손을 찾고 있다. 하지만 국가보훈처로부터 최고 서훈인 독립장을 받은 대전의 한 독립유공자는 행적을 의심받고 있다.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 후손을 찾고 있다. 하지만 국가보훈처로부터 최고 서훈인 독립장을 받은 대전의 한 독립유공자는 행적을 의심받고 있다. 국가보훈처 누리집

'대전 김태원' 독립운동 행적은?... "활동 자료 남아 있지 않다"  

'대전 김태원'과 '평북 김태원'이 동명이인이라면 '대전 김태원'의 독립운동 공적 내용을 뒷받침할 객관적 근거가 있을까? <오마이뉴스>가 확인한 객관성을 부여할 만한 기록은 '1918년 또는 1921년 경 중국으로 건너갔고 (공훈록에는 1918년, 독립운동가인 강산 김용원 선생의 행적을 기록해 놓은 '강산 사실기'에는 1921년으로 돼 있음 -기자 주), 1920년 운남육군강무학교에서 수업을 받았다'는 게 전부다. 보훈처 공훈 내용에 있는 다른 내용은 '평북 김태원'과 중복되거나 유사하다.

이에 대해 앞의 '대전 김태원'의 후손인 김정인씨는 "아버지 독립운동 행적에 대해서는 함께 활동했던 분들과 어머니에게 들었다"며 "하지만 모두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이어 "벽창의용단 활동과 관련된 신문보도 기사(앞의 '평북 김태원') 외에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근거 자료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며 "아마 일제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자료를 남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1963년 당시 부친이 서훈을 받은 사실을 신문을 보고서야 알았다"며 "후손들이 신청한 게 아니라 정부에서 자체 심사 후 수여한 것"이라고 말했다.

언론인이자 친일문제연구가인 정운현(56)씨는 "관련 자료 검토결과 '대전 김태원'과 '평북 김태원'은 이름만 같을 뿐 서로 다른 사람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초창기 독립운동가 포상과정에서 정확한 자료를 확인하지 않아 뒤늦게 '가짜 독립가'로 밝혀지는 경우가 더러 있다"며 "이 경우도 국가보훈처가 신속히 해당 내용을 확인해 서훈 취소 여부 등을 결정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가장 큰 의문은 국가보훈처가 허점 투성이 공적내용을 근거로 '대전 김태원'에게 건국공로훈장 독립장(3등급)을 수여(1963년)한 이유다. 이에 대해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지난 9일 기자와 만나 "당시 서훈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관리하고 있어 확인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린다"라며 "관련 자료를 검토하겠다"라고 밝혔다.  

역사 에서 사라진 '평북 김태원'은?
金泰源, 1902 ~ 1926
'평북 김태원'에 대한 자료는 신문 보도 외에는 찾아보기 어렵다. 국가보훈처는 '평북 김태원'(金泰源, 1902~1926)을 '대전 김태원'(金泰源, 1900~1951)과 같은 사람으로 보고 '평북 김태원'의 공적으로 '대전 김태원'에게 서훈을 수여했다.

하지만 관련 언론보도로 볼때 '평북 김태원'은 '대전 김태원'과 이름만 같은 다른 인물로 추정된다. 그는 17살 나이에 중국 관전현에서 독립단 관남지부에서 활동했다. 이어 가입한 벽창의용단에서 군자금 모집과 단원수습에 주력했다. <조선>은 그가 '평북일대를 횡행하며 국경을 소란케 한 혐의가 적용됐다'고 보도했다. 그의 재판에 '방청객이 물밀듯이 몰려 들어 입추의 여지가 없을 만큼 보기드문 큰 재판'이었다는 보도로 미뤄 지역 내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졌음을 짐작케 한다. 그런데도 그의 행적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그의 후손이 없거나, 분단으로 정보가 단절된 때문으로 추정된다.

<조선>은 '단장 양승우를 따라 교수대에도 동행' 제목의 기사에서 김태원을 양승우 단장의 '유일한 동지'라고 소개했다. 김태원은 최후변론을 통해 "죽는 것을 아끼는 비열한 내가 아니지만 대한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에게 사형선고를 받는 것이 오직 통분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그의 어머니는 자식을 잃은 비보를 접하고서도 "슬프지만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죽은 것이니 원통하지는 않다"고 밝힐 만큼 절의를 보였다.

<오마이뉴스>가 당시 신문 기사를 토대로 역사속에서 사라진 '평북 김태원'의 일대기를 복원해 보았다.

-1902년/ 평북 의주군 의주면 서부동에서 모친 장씨 사이에서 출생
(출처/ <조선일보> 1926.4.23, <조선일보> 1926.12.30), <중외일보> 1926.12.31)
-1919년/ 중국 관전현에 건너가 독립단에 가입, 독립단 관남지부에서 활동 (출처/ <동아일보> 1926.7.1)
-1920년/ 양승우를 단장으로 한 벽창의용단 가입 (출처/ <동아일보> 1926.7.1)
-1920년 6월/ 평안북도 창성군 신창면 풍동리 오석찬 집에서 군자금 청구 응하지 않자 관계자 사살
(출처/ <동아일보> 1926.7.1)
-1920년 7월/ 동리 오초여의 집에서 군자금 확보, 오초여 사살 (출처/ <동아일보> 1926.7.1)
-1925년 봄/ 신의주경찰서 체포 (출처/ <동아일보> 1926.9.6)
-1926년/
* 4월21일/ 신의주지방법원 공판, 검사 사형구형 (출처/ <조선일보> 1926.4.23, ,<신민일보> 1926.5.20)
<'방청객 물밀듯이 몰려들어 입추의 여지가 없었음, 경계 엄중, 근래에 보기드믄 큰 재판, 김태원 "오직 대한민족의 독립을 위해 한일... 각오하고 한 일로 죽는 것을 아끼는 비열한 내가 아니지만 대한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에게 사형선고를 받는 것이 오직 통분할 따름이다"웅변 보도>
* 5월14일/ 신의주지방법원 사형선고, 현장에서 불복항소
(출처/<조선일보> 1926.5.16, <동아일보> 1926.7.1)
* 7월 1일/ 평양복심법원 공판개시 예정이었으나 15일로 연기

(출처/<동아일보> 1926.7.3,<조선일보> 1926.7.4)
* 7월15일/ 변호사 변론관계로 8월 17일로 공판연기/(출처/ <동아일보> 1926.7.17)
* 8월26일/ 평양복심법원 검사 사형구형 (출처/<동아일보> 1926.9.6)
* 9월 4일/ 오전 9시, 평양복심법원 오전 9시, 사형선고 (출처/<동아일보> 1926.9.6)
*11월 8일/ 경성고등법원 상고기각 (출처/<중외일보> 1926.12.26)
*12월21일/ 평양지방법원, 불원중 사형집행 예정임을 밝힘 (출처/<중외일보> 1926.12.26)
*12월23일/ 오전 11시, 평양형무소에서 사형, 향년 24세
(출처/<조선일보> 1926.12.30 <중외일보>1926.12.31) ,
<조선> 김태원 모친 거주 장씨 집 찾아가 대면 인터뷰

○ 편집ㅣ최유진 기자
#국가보훈처 #독립운동가 #김태원 #임시정부수립 #96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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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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