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것의 아름다움

등록 2015.04.28 09:10수정 2015.04.28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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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은 소나무와 자작나무가 산 것들의 집과 먹이가 되어 더 찬란한 모습으로 소멸되어갑니다.
죽은 소나무와 자작나무가 산 것들의 집과 먹이가 되어 더 찬란한 모습으로 소멸되어갑니다.이안수

#. 1 


2005년 모티프원의 건축을 완성하고 정원에 어떤 나무를 심을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그 해 몇 개월 동안 작업실을 빌려 모티프원에 넣을 가구들을 제작하던 춘천에서 나무가 자라는 것과 더불어 작물에 점점 더 넓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밭가의 나무를 베어버릴 생각이라는 밭주인의 사연을 접하고 그 나무들을 모티프원의 정원으로 옮길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 옮겨 심은 나무들이 현재 모티프원의 정원에 살고 있는 느티나무와 자작나무, 주목과 잣나무입니다.

특히 40살이 넘은 자작나무는 아마 파주 근동에서도 가장 키 크고 나이 많은 자작나무이지 싶습니다. 당시 조경수로 인기를 얻어 많은 집에서 자작나무를 심었지만, 10년생 미만의 이식이 편리한 나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나무는 별 탈 없이 잘 적응해서 8년 넘게 저와 즐겁게 동거했습니다. 피톤치드의 방출량이 탁월하다는 속성뿐만 아니라 러시아를 여행하면서 자작나무숲에서 경험했던 영적인 기억 때문에 정원의 키 큰 자작나무에 큰 애정이 갔습니다.

 흰색 수피가 고고하고 부름뜬 눈 같은 무늬가 있어서 마치 나를 꾸짖는 듯 깨워줍니다.
흰색 수피가 고고하고 부름뜬 눈 같은 무늬가 있어서 마치 나를 꾸짖는 듯 깨워줍니다.이안수

3년 전 한여름, 낙엽이 질 때가 아닌 시기에 자작나무 잎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직감적으로 이상이 있음을 알고 면밀히 살폈습니다. 마침내 줄기 밑동에 큰 구멍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방제를 위해 경험 많은 정원사를 불렀습니다.

. 50년이나 산 자작나무가 굼벵이가 뚫은 구멍으로 수명을 다했습니다.
.50년이나 산 자작나무가 굼벵이가 뚫은 구멍으로 수명을 다했습니다. 이안수

굼벵이가 구멍을 뚫어서 수액의 통로를 막았기 때문이라며 그 구멍에 약을 넣고 흙으로 봉하라했습니다. 이런 방제 노력에도 정원의 자작나무들은 똑같은 증상으로 몇 해에 걸쳐 시들어갔습니다.


올봄에도 순을 내지 못한 나무가 두 그루 더 늘었습니다. 3년간에 걸친 이런 피해는 제게 위로받을 수 없는 상심이었습니다.

 올해도 자작나무 두 그루가 새잎을 내지 못했습니다.
올해도 자작나무 두 그루가 새잎을 내지 못했습니다. 이안수

#. 2


한옥을 짓는 임배환 목수님은 치목을 하면서 남은 자투리 소나무를 다듬어 각각 키가 다른 의자로 사용했습니다. 그 통나무들을 집을 옮기면서 제게 물려주었습니다.

굵은 원목은 안에 집안에 두는 것만으로도 은은한 나무향으로 공간이 건강해지는 효험이 있습니다.  

모티프원으로 온 원목 소나무 중 몇 개는 화가의 조각 재료로 드리고 나머지는 집안과 집밖의 의자로 두었습니다. 비에 노출된 집밖의 나무는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의자로 쓸 수 없을 만큼 상해버렸습니다. 

수명을 다한 자작나무와 상한 소나무들을 정원 풀밭에 두었습니다. 쓰러진 자작나무는 금방 새들과 땅 위의 벌레들에 의해 구멍이 숭숭 났습니다.

 정원의 버드나무가지를 파고 있는 쇠딱따구리
정원의 버드나무가지를 파고 있는 쇠딱따구리이안수

목숨을 다한 나무가 동물과 곤충들의 먹이와 둥지가 되어 소멸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슬프고 끔찍하게 느껴졌던 그 소멸의 모습이 점점 더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그것은 썩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후에도 가치롭게 자신을 빛내는 일이었습니다.

 사라지는 과정이 단지 썩는 비참한 것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사라지는 과정이 단지 썩는 비참한 것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이안수

우리 가족과 함께 9년을 동고동락해온 또 다른 식구가 있습니다. 애완견 해모는 목양견인 콜리종입니다.

 기운이 많이 쇠약해진 노년의 해모
기운이 많이 쇠약해진 노년의 해모이안수

혈통처럼 순하고 영리한 이 대형견은 소형견보다 수명이 짧습니다. 해모는 이제 노년기를 살고 있습니다. 

그제 아내가 동물병원에 심장사상충과 여름의 각종 해충으로부터 보호하는 약을 주문하면서 무심코 물었습니다.

"1년 치를 주문할까요... 1년은 더 살겠지요?"

그동안 식구 누구도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나이가 많은 해모와의 이별을 아내는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내는 일 년치의 약을 주문하면서 해모의 노년을 의식했습니다.
아내는 일 년치의 약을 주문하면서 해모의 노년을 의식했습니다.이안수

저는 죽음을 맞는 태도를 고민해왔습니다. 그 방식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왔지요. 이제 어느 정도 모든 죽음에 대해 담담해졌습니다. 슬픔도 기쁨도 아닌 방식으로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저의 관심은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닌, 어떻게 존엄하게 죽느냐에 관한 것일 뿐입니다. 유한한 것이 진리이며 사라지는 것의 미덕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작나무가 죽은 자리에는 지금 은사시나무의 어린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은사시나무는 자작나무와 함께 옮겨왔던 회양목에 묻어왔던 나무로 이제 2층 집을 훌쩍 넘는 높이로 자라서 그 자손을 번식하고 있습니다. 모티프원의 정원은 몇 년 뒤 은사시나무 숲이 될 듯싶습니다.

애착이라는 이름의 집착이 떠난 자리를 그 은사시나무의 2세가 더욱 자유롭고 기운차게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좁은 정원에 울창한 은사시나무숲도 키 큰 자작나무 못지않은 위안이 될 것입니다.

 자작나무가 차지했던 자리에 은사시나무 2세들이 빽빽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생명은 이렇게 이어지는 것이겠지요.
자작나무가 차지했던 자리에 은사시나무 2세들이 빽빽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생명은 이렇게 이어지는 것이겠지요. 이안수

덧붙이는 글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자작나무 #은사시나무 #소멸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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