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니스에서 운하를 따라 운행하며 거리 청소를 하는 청소배.
정기석
결국 기차를 타보겠다는 간절한 소원은 이탈리아 로마에서 풀 수 있었다. 로마에서 베니스로 갈 때, 로마 테르미니역에서 베니스 산타루치아역까지 4시간여 동안 시속 250km로 질주하는 초고속열차를 탔다. 트렌이탈리아(trenitalia) 열차회사의 프레시아르젠토(frcciargento)호. '은색 화살표'라는 이름처럼 날렵하고 쾌적했다. 이코노미석으로 70유로(한화 8만5천원) 쯤 되는 요금은 아깝지 않았다. 더 비쌌어도 기어이 타고 말았을 것이다.
베니스로 향하는 초고속열차의 차창 밖으로 <냉정과 열정 사이>와 우피치미술관의 그 피렌체, 협동조합의 도시, 볼로냐대학의 그 볼로냐가 초고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순간 기차에서 뛰어 내려 피렌체와 볼로냐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요동쳤다. 이성적으로 겨우 참았으나 아쉬움은 컸다. 언제 또 올 일이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먼 나라니까.
대신 이탈리아어 'graffito'에서 유래했다는, 기차역 담장마다 어김없이 새겨진 화려한 그래피티(graffiti)를 감상하는 것으로 마음을 달랠 수 밖에 없었다. 문자를 그림처럼 형상화한 일종의 낙서이지만 유럽에서는 어디를 가나 거리의 예술인 그래피티를 감상할 수 있다. 기차를 타지 않고 비행기를 탔다면 기차역의 그래피티조차 구경하지 못했을 게 아닌가.
그런데 아뿔싸. 산타루치아역을 빠져나와 숙소를 가는 차를 타려는데 듣던대로 거리와 도로에 차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베니스에서는 도심에서 자동차 운행이 금지되어 있다. 베니스에서는, 또는 베네치아(venezia)에서는 버스나 택시 대신 배를 타고 다녀야 한다는 여행안내서의 지침이 전혀 농담이나 과장이 아니었다. 나중에 보니 채소가게도 배에서 좌판을 벌이고, 거리 청소도 청소배가 대신 하고 있었다.
기차를 타고 내리자마자 자동차가 아닌 배로 환승해야 하다니. 낯설었지만 역시 물의 도시 베니스의 이색적 풍경이라 흥미로웠다. 베니스영화제의 그 베니스, 베니스의 상인의 그 베니스, 한국의 광고회사들이 광고 촬영을 많이 하는 그 베니스. 순간, 그곳만의 고유한 지역성과 장소성을 만끽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배가됐다.
역 앞에서 페로비아(ferrovia) 선착장을 찾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가 아닌 관광객들로 인해 보도가 정체될 정도의 관광명소 베니스. 이곳에서는 눈치껏 관광객들의 무리만 잘 쫓아다니면 된다. 시내버스가 아닌 운하 수상버스, 바포레토(vaporetto)를 타고 베니스에서 가장 크고 넓은 운하 수로 그란데 운하를 따라 리알토(Rialto) 다리 선착장에 내렸다. 베니스의 심장부다.
베니스는 운하로 먹고 살지만, 한국의 4대강은...베니스는 14~15세기 무렵 지중해를 장악했던 해상공화국의 중심이었다. 아드리아해 베네치아만에 자리잡고 있다. 베네치아만 안쪽의 석호 위에 118개의 섬들이 약 400개의 다리로 이어져 있다. 567년에 이민족에 쫓긴 롬바르디아의 피난민이 정착하기 위해 이룩한 역사다. 석호(潟湖, lagoon) 위에 무수히 나무말뚝을 박고 나무기둥 뗏목을 이어서 이토록 신비하고 특별한 인공섬을 만든 것이다. 섬이 생긴 모양이나 역사 자체가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다.
당연히 베네치아 주민의 대다수가 운하, 골목을 무대로 관광에 관련한 다종다양한 일을 하며 먹고 산다. 그중 단연 베니스 최고의 관광자원이자 산업유산은 운하다. 마치 실타래처럼 얽히고 설킨 수많은 운하의 물줄기는 118개 섬 사이를 이어주는 수로로 기능한다. 사람으로 치면 혈관에 해당된다. 하늘에서 본 지형은 마치 안동 하회마을의 태극문장처럼 환상적인 만곡을 이룬다. 평균수심은 3m가 채 되지 않아 두렵지 않다.
운하와 석호 사이로 길이 약 10m 가량의 검은 곤돌라(gondola)가 쉴 새없이 들락거린다. 베니스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아이콘이다. 검은색이 된 이유가 재미있다. 당초 곤돌라에는 화려하게 쇠장식들도 부착되어 있었으나 1562년 사치금지법으로 모든 곤돌라를 검은색으로 통일했다고 한다. 수백대의 곤돌라가 대부분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영업용이다.
곤돌라 사공은 아무나 할 수 없다. 국가에서 허가를 준 운행자격증이 필요하다. 연소득이 1억 원이 넘어 베니스에서 가장 고소득자 직군에 속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요금이 너무 비싸다. 1인당 50유로(한화 약 6만 원). 선뜻 올라타기에는 부담스럽다. 곤돌라의 날렵한 모양이라든지, 곤돌라 사공의 다소 거만해보이는 표정이라든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구경거리가 된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의 택시승강장처럼 손님을 기다리는 빈 곤돌라가 눈에 많이 띈다.
대리석 돌덩어리 리알토(rialto) 다리는 그란데 운하의 무게중심에 해당한다. 건축물이라기보다는 16세기말에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술과 토목술을 동원해 만든 예술작품으로 부르는 게 타당하다. 다리 설계공모전에서 미켈란젤로를 제치고 안토니오 다 폰테가 낙점을 받았다고 한다. 베니스를 찾는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온갖 기념품점, 식당들이 몰려있어 베니스의 시장경제 경기를 나타내는 일종의 지표 역할을 한다.
리알토 다리 만큼 탄식의 다리(PONTE DEI SOSPIRI)도 유명하다. 특별한 스토리텔링 때문이다. 운하를 가로질러 섬과 섬을 이어주는 다른 다리와 달리 이 다리는 건물과 건물을 잇는다. 총독부가 있던 두칼레 궁과 피리지오니 누오베라는 감옥을 연결한다.
두칼레 궁에서 재판을 받고 나오던 죄수들은 이 다리를 건너면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다. 다리를 건너갈 때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탄식의 다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세기의 바람둥이 카사노바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베니스에서 운하를 건널 때마다 4대강이 생각났다. 베니스에 운하가 없으면 베니스 시민들은 먹고 살 수 없다. 베니스에서 운하는 필수불가결하다. 시민 모두에게 이롭다. 숙명적이다. 운하가 곧 베니스다.
4대강 사업의 목적은 홍수 등 물 피해를 대비한다는 명분이었다. 절대 운하는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수십조원의 국민세금을 허비하고 생태계만 파괴했다는 합리적인 비판이 거세다. 4대강이 운하가 아니라면 굳이 그렇게 막대한 예산을 퍼부어 강행해야만 했던 이유는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다.
한때 자연과학을 공부한 나는 4대강 사업이 운하개발 사업이라고 믿는 편이다. 과학적으로는 4대강을 그냥 강으로 볼 수 없다. 그것도 국민의 행복이 아닌 몇몇 토건족과 그 배후 권력자의 탐욕적 사익 추구를 위한 부도덕하고 부패한 범죄행위라고 확신한다. 베니스의 운하 위에 놓인 탄식의 다리를 쳐다보며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탄식했다.

▲ 카사노바가 투옥될 감옥으로 건너가며 한숨을 내쉰 탄식의 다리.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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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연구소(Commune Lab) 소장, 詩人(한국작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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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노바도 지나간 '탄식의 다리', 한숨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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