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전하고 싶은 편지
고상훈
그래서 나는 이 수업의 역할이 소중한 사람들 사이의 사랑 혹은 격려 표현을 위한 다리를 놓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마음에 간직하고만 있는 그 사랑을 전달할 수 있도록. 그동안 간절하고 소중한 표현 속에서 아이들이 말이 가진 힘을 직접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그날, 당장 우리 반 아이들의 보호자분들께 작은 숙제를 보냈다.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편지'를 쓰는 것. A4 용지를 반으로 잘라 짧은 이야기가 담길 만한 편지지도 만들었다. 봉투에 담긴 편지지는 이틀 후, 어느 때보다 신경을 잔뜩 쓴 글씨들과 함께 내게 돌아왔다.
"지금처럼 기쁜 일에는 함께 기뻐해주고, 슬픈 일에는 함께 슬퍼해줄 마음을 계속 간직하렴.""엄마의 아들이란 게 너무 자랑스럽고 대견하고 정말 선물같은 아이란다.""바쁜 엄마, 아빠 때문에 씩씩하게 혼자 버스를 타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프단다.""엄마가 힘들어할 때 오히려 엄마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든든한 딸이란다.""처음으로 편지를 써보게 되는 것 같네. 앞으로는 표현을 자주 할게, 아들아.""엄마는 네가 어떤 모습으로 있던지 그 모든 것들을 사랑한단다.""무엇보다, 건강하게 잘 자라줘서 정말 고맙다.""자꾸 듣기 싫은 말만해서 미안해. 아들, 아들은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거야."봉투에 담겨 내게 다시 돌아온 모든 편지의 한 줄, 한 줄에는 넘치는 힘과 용기 그리고 채 전하지 못했던 달달한 사랑이 가득했다. 마치 벤 카슨의 어머니가 벤을 위해 전했던 말 한마디처럼 말이다. 아직은 진짜 주인을 만나지 못한 편지가 기다리던 국어시간, 아이들 이름을 하나씩 부르며 편지를 나눠줬다.
조심스레 봉투에서 꺼내 편지를 읽으며 입가에 미소 짓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손발이 오글거린다며 손을 이리저리 비벼대는 친구도 있었다. 한편에는 울음을 머금는 친구도 보였다. 혹시라도 누가 볼까 눈치를 보며, 소중하게 한 글자씩 읽어가는 모습은 잔뜩 사랑을 머금은 모습이었다. 겨우 A4 반쪽에 담긴 사랑의 이야기였지만, 그 이야기가 담아내고 있는 힘은 교실을 가득 채웠다.
"엄마한테 편지 받으니까 기분 좋아요"아이들은 자신이 받은 편지에 대한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아이들끼리의 재잘거림은 잠시 줄어들고, 그저 책상을 긁는 연필 소리만 가득했다. 아이들은 편지를 통해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했을까.
"엄마 편지 덕분에 자신감이 생겼어. 나 이제 동생한테도 언니한테도 더 잘할 거야. ♥""엄마가 말해준 훌륭한 축구선수가 될게요!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제가 훌륭한 축구선수 될 때까지 오래오래 사셔야 돼요!""할아버지! 저를 이렇게 예뻐하고 걱정하시는지 몰랐어요.""엄마한테 편지를 받으니까 진짜 기분이 UP된다!""엄마의 편지가 저에게 힘이 되고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엄마의 말 덕분에 힘과 용기를 얻었어요.""이모! 편지를 보니까 내가 모르고 있던 능력(?)이랄까? 그런 걸 알게 됐네.""엄마 사랑해요!!! (부끄러우니까 카톡이나 카스 같은 데는 제발 올리지 마세요.)"난 아이들이 직접 쓴 답장을 스스로 봉투에 넣는 활동을 마치면서 동시에 국어 수업도 맺었다. 따로 교과서를 들추지 않았고, 우리 반이 쓰고 있는 학습정리 노트에 '말이 가진 힘'을 정리한 것도 아니었다.
대신, 나는 아이들이 정성스레 쓴 답장에서 말이 자신에게 준 영향을 어떻게 직접 받아들였는지를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오늘의 학습목표는 어쩌면, '말이 주는 영향을 알아봅시다'가 아니라 그냥 소중한 사람에게서 온 'A4 반쪽에 담긴 말의 힘을 느끼는 것'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 누가 아는가? 이날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 제2, 제3의 벤 카슨이 우리 반에서 나올지 말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1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