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지하철의 2층 열차-
안숙영
혁명의 도시, 꼬뮌의 도시 파리의 후손들은 선조들의 '9월 4일'을 단지 역에만 새겨두지 않았다. 광장에도, 거리에도 9월 4일이라는 이름을 붙여놓고 기억하고 있다. '9월 4일 역'이라는 노래까지 만들어 부르고 있다.
싱어송라이터이자 배우, 그리고 배우 조니뎁의 부인이었던 바네사 파라디(Vanessa Paradis)가 부른 'Station Quatre Septembre'라는 노래다. 조니뎁과 결별하고 나서 부른 노래라 그런지 더 애틋하고 처연하게 들린다. 한번 쯤 들어보시기를. 특히 이 부분.
"Les nuits moites allongé sur le coco et la cendre(재 위로 길게 누운 습한 밤들), Le vin chenu, la misère nue mais quel bonheur ensemble(최고급 와인, 비참한 가난, 그래도 함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지)"'9월 4일 역'은 프랑스 사람들에게만 의미를 남기지 않았다. 다소 뜬금없지만 유럽과 유럽인을 동경하는 일본에서도 새로운 의미로 부활했다. 일본 소설가 오오사키 요시오에 의해 9월 4일 역을 제목이자 소재로 삼은 <9월의 4분의 1>이라는 단편소설로 재탄생한 것이다.
소설 <9월의 4분의 1>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다소 상투적이거나 통속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일본 현대소설 특유의 다소 가볍고 사소한 이야기다. 마침 '9월 4일 역'의 존재를 알고난 직후 동명의 자전적 소설을 진지하게 구상하고 있는 나로서 좋은 점수는 줄 수 없다.
남자주인공은 유럽여행을 떠난 소설가 지망생이다. 벨기에 브뤼셀의 비오는 거리에서 우연히 한 일본인 여자를 만난다. 이쯤 되면 결말은 뻔하다. 이루어질 수 없는 하룻밤의 풋사랑이거나 한여름밤의 꿈. 예상은 크게 틀리지 않는다. 그 여자는 홀연히 떠나면서 남자에게 급히 짧은 편지를 남긴다.
"지금부터 파리로 떠나요. 함께 하고 싶지만, 겐지와 함께 있으면 슬픔을 모두 이야기해버릴 것 같아서, 그것이 무서워서 우선 여기를 떠납니다. 소설, 쓰세요. 체념하면 안돼요. 당신은 반드시 쓸 수 있어요. 나도 열심히 할게. 여러 가지로 정말 고마워. 그리고 동양인의 연대감에 건배. 다음에는 9월 4일에서 만나요. - 나오" 나처럼 파리의 '9월 4일 역'의 존재를 모르던 겐지는 "'9월 4일에 9월 4일 역에서 만나자"는 나오의 편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게 사랑이 스쳐 지나갔다. 13년이 지나 겐지는 원하던 유명 작가도 되고 프랑스 9월 4일 역도 다시 찾았지만 나오는 더 이상 그곳에 없다. 아무 데도 없다.
9월 4일 역에서 9월 4일을 한참 돌아보다 나도 이번에 파리에서 만날 수 있었던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어느 지하철역 근처에서 빵집을 하고 있다는 한국인 제빵사다. 프랑스에서 가장 맛있는 바게트를 만드는 10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지인이 친구라고 알려줬다. 파리 가면 찾아가 만나보라고 했다. 프랑스 10대 바케트에 드는 유명한 빵맛도 좀 보고.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마침 빵집이 쉬는 날이었다. 빵집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많은 이로부터 들어서 잘 안다. 그런 나로서 객지 프랑스에서 프랑스 빵을 만들다 지쳐서 쉬고 있는 사람을 나오라고 할 수는 없었다. 아무도 기약할 수 없는 다음 기회를 형식적으로 기약했을 뿐.
어디서든, 만날 사람은 만나고 만날 수 없는 사람은 만나지 못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인연은 거의 숙명적이다. 비록 만날 사람은 만나지 못했지만 파리 '9월 4일 역'으로 향하는 지하철역 여행은 전혀 아쉽지 않았다. 한국의 제3공화국에서 9월 4일에 태어난 내가, 프랑스의 제3공화국이 열린 날을 기억하는 파리의 9월 4일 역에 가 보다니.
9월 4일 역(Quatre-Septembre)을 열차가 천천히 지나치면서 50여 년 전 내가 태어난 시대와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내가 태어난 9월 4일을 자꾸 되돌아 보고 있으려니, 마치 9월 4일 역에서 태어난 기분이 들었다. 9월 4일 역의 터널이 고향역 지붕처럼, 어머니의 자궁처럼 느껴졌다. 그러자 나는, 착해지고 자유롭고 평화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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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연구소(Commune Lab) 소장, 詩人(한국작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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