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장관을 어떻게 글로, 난 포기할란다

[트레킹으로 지구 한 바퀴 남미편-6] 칠레 토레스 델 파이네 트레킹 <하편>

등록 2015.07.22 19:26수정 2015.07.22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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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메리카 대륙의 남쪽 끝, '바람의 땅' 파타고니아에는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죽기 전에 꼭 한 번 가봐야 할 10대 낙원'으로 꼽은 '토레스 델 파이네'가 있습니다. 이곳은 세계 3대 트레일 가운데 하나로도 꼽히죠. 또한 남미 최고봉 아콩카구아는 잘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여행지였습니다. 이 두 곳이 내가 남미 여행을 떠난 이유였죠. 잊을 수 없는 남미 여행기를 연재합니다. - 기자 말
a  토레스 델 파이네

토레스 델 파이네 ⓒ 김동우


[3일 차]

싱그러운 아침이었지만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발목과 허리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어제만 30km 정도를 걸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켜 수프와 빵으로 허기를 해결했다. 굼벵이 같은 속도로 캠프를 철수하고 짐을 챙겼다.

이날은 2시간 30분 거리인 '파이네 그란데'(Paine Grande)까지 가서 캠프를 설치한 뒤 W코스 마지막 꼭짓점 '레푸지오 그레이'(Refugio Grey)를 다녀오는 일정이었다. 능선을 타고 길게 늘어진 길에 올라 스틱을 찍으며 다시 하루를 시작했다. 뻐근한 몸은 걸음이 횟수를 더할수록 서서히 풀려나갔다.

개활지로 나오자 파타고니아의 바람이 따귀 치듯 달려들었다.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강한 바람이었다. 가다 서다, 가다 서다. 바람이 벽처럼 느껴졌다. 걸음은 시속 2km에서 시속 1km로 느려졌다.

a  토레스 델 파이네

토레스 델 파이네 ⓒ 김동우


심술궂은 바람 너머엔 슬픈 현실이 기다렸다. 불에 검게 그을린 타다만 나무들이 바람에 을씨년스럽게 흔들렸다. 검은 땅과 나무가 햇살을 그대로 먹어치워 버렸다. 어두운 기운은 길을 따라 길게 이어졌다.

몇 년 전 이스라엘 여행자의 실수로 발생한 산불의 흔적이었다. 무지막지한 파타고니아의 바람을 앞세운 불길은 엄청난 양의 대지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 소식은 한국에까지 보도된 바 있다. 무심코 흘려들은 뉴스 내용을 직접 목격하는 일은 무척 불편했다.


a  토레스 델 파이네

토레스 델 파이네 ⓒ 김동우


라면과 햇반, 걷기 위해 먹었다

이번 트레킹 마지막 캠프인 파이네 그란데가 아스라이 눈에 들어왔다. 능선에서 내려서자 넓은 평지가 캠프까지 이어졌다. 능선을 넘은 바람이 캠프까지 날 몰아 재꼈다. 발바닥엔 물집이 잡혔고, 종아리와 허벅지엔 근육통이 생겼다. 몸 상태를 보니 여기까지 와서 왜 마지막 미라도르를 포기하는지가 분명해졌다.


좋은 자리를 골라 텐트를 치고 하나 남은 햇반과 라면을 꺼냈다. 사력을 다해 왕복 22km를 걸으려면 먹어야 했다. 산은 정직하다. 먹은 만큼 갈 수 있고, 갈 수 있는 만큼 볼 수 있다. 또 요령을 피운다고 그걸 받아주지 않으니 가장 정직하고 솔직해질 수 있다. 다시 등산화 끈을 조였다. 여기서 레푸지오 그레이를 다녀와야 내 발로 완벽하게 W를 그리게 된다.

a  토레스 델 파이네

토레스 델 파이네 ⓒ 김동우


'밥심'으로 아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캠프를 출발한 지 30분 만에 오르막이 끝나고 '라구나 로스 파토스'(Laguna los Patos)가 나왔다.

"와~아!"

호수 뒤편으로 설산이 굽이치고 흰 구름이 산 머리 위를 미끄러져 흐르는 모습에 넋을 놓았다. 구름도 이 모습에 취했는지 산봉우리에 내려앉아 가던 길을 멈추고 인간계 절대 비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유빙이 보이기 시작했다. 잠시 뒤 '라고 그레이'(Lago Grey)에 도착했다. 빙하가 녹으면서 만들어진 호수와 설산이 빚어내는 하모니는 먼발치 절벽 끝에서 풍경에 취한 트레커와 하나 되며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빛났다.

a  또레스델파이네

또레스델파이네 ⓒ 김동우


그런데 W코스를 완주하기 위해선 아직 가야 할 길이 까마득했다. 시간을 계산하며 다시 길을 나섰다. 내리막이 시작됐다. 숲길을 걷다 좀 지루하다 싶으면 봄을 알리는 꽃길이 이어지고 그러다 아슬아슬한 급경사가 나왔다. 다이내믹한 코스가 지루할 틈을 허락하지 않았다. 가다가 힘이 들면 빙수로 목을 축였다. 최고의 물맛이었다.

a  또레스델파이네

또레스델파이네 ⓒ 김동우


걷기에 집중하다 보니 거리개념과 시간개념이 무력화됐다. 어느새 레푸지오 그레이에 도착해 W코스 마지막 미라도르로 향했다. 전망 좋은 바위에 올랐다. 거대한 빙하가 실체를 드러냈다. 양반다리를 하고 눈을 감았다. 한동안 이번 세계 일주 최고의 순간을 즐겼다. 대자연은 경건함으로 다가와 겸손함을 가르쳐 주었다.

a  토레스 델 파이네

토레스 델 파이네 ⓒ 김동우


힘이 빠져 버린 발목을 조심스럽게 간수하며 캠프로 돌아왔다. 80km에 가까운 강행군이 끝나자 맥이 풀렸다. 샤워 뒤 1ℓ 짜리 팩 와인을 샀다. 싸구려 와인이 달콤하게 목을 타고 넘어갔다. 별이 빛나는 밤이었다.

[4일 차]

해가 텐트 안을 환하게 밝혔다. 암막 커튼이 필요한 아침이었다. 늦잠을 자고 싶었지만, 쏟아지는 햇살은 엄마의 아침 잔소리처럼 따가웠다.

"된장."

텐트 문을 열었다.

"이~야~아~"

a  토레스 델 파이네

토레스 델 파이네 ⓒ 김동우


눈 앞에 펼쳐진 요정의 나라

눈을 뜨자마자 요정의 나라에 와 있는 듯한 분위기에 잠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토레스 델 파이네는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낮 12시 30분 '파이네 그란데 선착장'(Lago Pehoe)에서 페리를 기다렸다. 만약 이날 새벽에 일어나 빙하를 보러 갔으면 페리 출발에 맞춘다고 헐레벌떡 하산하고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이곳에서 '구아르데리아 푸데토'(Guarderia Pudeto)로 가서 미니버스를 타고 첫날 국립공원 입장료를 낸 라구나 아마르가로 돌아가면 모든 일정은 마무리된다.

a  토레스 델 파이네

토레스 델 파이네 ⓒ 김동우


페리를 기다리며 주변 산책을 하고 있는데 푸콘 화산 트레킹을 같이 한 스페인 아주머니들을 다시 만났다. 그녀들은 레푸지오 그레이에서 하룻밤 보내고 지금 막 하산을 완료한 순간이었다. 난 박수로 그녀들의 완주를 축하했다. 그녀들은 내 뺨에 입을 맞추며 인사를 대신했다.

a  토레스 델 파이네

토레스 델 파이네 ⓒ 김동우


하얀색 페리가 쪽빛 빙수 호를 가르며 유유히 달려왔다. 페리에 올라 2층 갑판으로 향했다. 토레스 델 파이네는 떠나는 순간까지도 트레커들을 가만두지 않았다. 한 장면도 그냥 버릴 게 없었다. 승객 모두가 페리 2층에서 할리우드 스타가 나타난 것처럼 일제히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환희의 순간이었다.

"무릉도원이 따로 없구나, 정말! 죽기 전에 꼭 걸어봐야 한다는 말이 허언이 아니었어!"

a  토레스 델 파이네

토레스 델 파이네 ⓒ 김동우


3일간 걸었던 토레스 델 파이네가 한눈에 조망됐다. 1만2000페소나 하는 페리 티켓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침이 마르도록 감탄한 세계 최고의 트레일 토레스 델 파이네를 표현할 마땅한 단어도, 문장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쥐어짜서 만든 글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말과 글로 여길 표현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멍하니 멀어져 가는 토레스 델 파이네를 바라봤다.

'다시 올 수 있을까?'

a  토레스 델 파이네

토레스 델 파이네 ⓒ 김동우


[에필로그]
토레스 델 파이네 트레킹 일정은 며칠이 적당할까

토레스 델 파이네는 물론이고 북한산 둘레길이라도 기초체력이 없으면 제대로 즐길 수 없는 법이다. 마지막 남은 힘까지 쥐어짜며 정상에 오른 사람은 산을 즐긴 게 아니다. 그건 '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사람에게 하산 뒤 '뭐가 제일 기억에 남느냐'고 물으면 분명 욕이 튀어나올 거다.

'남미여행 왔으니 나도 한 번 도전해 봐야지'란 안일한 접근은 W코스의 3개 미라도르를 다 포기하고 능선만 걷게 되는 지름길이다. 이런 사람 중 "나도 W 완주했는데"라고 말하는 사람을 실제로 만나기도 했다. 기가 찰 노릇이다.

a  토레스 델 파이네

토레스 델 파이네 ⓒ 김동우


W코스 완주는 80km(지도에 따라서 km가 조금씩 차이가 난다) 정도를 걸어야 하는 쉽지 않은 일정이다. 40km 행군을 2번 하는 셈이다. 내 경우 3개 꼭짓점을 하루에 하나씩 올라 3일 만에 완주했고, 나흘째 날은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돌아가는 시간으로 보냈다. 사실 이렇게 빡빡하게 달린 이유는 남미 최고봉 아콩카구아 등정을 앞두고 체력을 끌어올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일정은 산을 좀 빠르게 타는 사람 중 백패킹을 해야 맞출 수 있는 일정이다. 산행 경험이 별로 없거나 백패킹을 하지 않고 완주하려면 3박 4일로는 무리다. 산장 위치가 불행하게도 딱 떨어지지 않는다.

왜 많은 블로거가 이 코스를 3박 4일로 추천하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되면 마지막 미라도르를 포기할 공산이 큰데 말이다. 이 일정은 백패킹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비용을 아끼려고 조금 무리하게 코스를 잡으면서 나온 일정으로 보인다. 한 마디로 비추다.

푸콘과 토레스 델 파이네에서 만난 스페인 아주머니들은 4박 5일 일정으로 W 코스를 마쳤다. 그녀들은 첫날은 Hosteria las Torres, 두 번째 날은 los Cuernos, 세 번째 날은 Paine Grande, 네 번째 날은 Refugio y Camping Grey 등에서 숙박했다.

바로 이게 답이다. 이렇게 일정을 잡아야지만 제대로 W 코스를 무리 없이 완주할 수 있게 된다.

나처럼 2박 3일로 걷기 일정을 끝내고 싶다면 오른쪽에서 트레킹을 시작했을 때 둘째 날이 매우 중요해진다. 이날 이탈리아노 산장까지 가서 미라도르를 다녀와야 다음 날 빙하를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이탈리아노 캠프 도착 시각이 늦으면 게임은 끝이다.

한 가지 더 팁이 있다면 첫날 산행에서 지도에 표시된 예상시간과 내 속도가 얼마나 차이 나는지 꼭 비교하길 바란다. 난 첫날 트레킹에서 조금 속도가 빨랐기 때문에 2박 3일에 완주 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특히 토레스 델 파이네 W코스에 도전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오른쪽과 왼쪽 출발을 놓고 고민하게 된다. 일부에선 왼쪽에서 출발해야 좀 수월하게 산을 탈 수 있다고 하는 데 편하면 얼마나 편할지 모르겠다. 느낌상으론 능선의 오르내림이 그리 심하지 않기 때문에 코스 난이도에는 큰 편차가 없다. 3개 꼭짓점을 오르는 건 어느 방향이나 똑같다. 정작 중요한 건 조망 차이다. 어느 쪽에서 트레킹을 시작해야만 뷰의 감흥이 더 크냐는 한 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a  토레스 델 파이네

토레스 델 파이네 ⓒ 김동우


일단 걷는 건 똑같다는 전제로 토레스 삼봉~프란세스 계곡~빙하로 이어지는 트레킹 코스에, 마지막 날 페리를 타고 전체적으로 토레스 델 파이네를 조망하는 순이 좋을지(오른쪽 출발), 첫날 토레스 델 파이네를 배 위에서 전체적으로 한 번 본 뒤, 트레킹을 하는 게 더 감흥이 있는지 고민해 봤다.

일단 오른쪽에서 트레킹이 시작되면 첫날 토레스 삼봉을 보게 된다. 이날은 다른 조망은 볼 수가 없다. 이 방향은 날이 갈수록 양파껍질처럼 하나씩 토레스 델 파이네 속살이 드러나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왼쪽에서 시작하면 전체적으로 산군을 감상 한 뒤 '뜨악!'하는 감정으로 트레킹을 시작하게 된다. 산을 느끼는 감흥을 극대화하고 싶다면 오른쪽에서 시작하는 게 맞다.

a  토레스 델 파이네

토레스 델 파이네 ⓒ 김동우


이런 코스선택에서 날씨도 중요한 변수다. 기본적으로 날씨가 좋다면 오른쪽에서 시작하고, 날씨가 나쁘다면 왼쪽에서 시작하는 게 해답이 될 수 있다. 날씨 때문에 토레스 삼봉을 못 본다면 여기까지 왔는데 그것만큼 안타까운 것도 없다. 그런데 페리에서 보는 뷰도 엄청난데 이걸 놓치는 것도 아깝고… 갑자기 답이 안 나온다.

또 출발 전 국립공원 입구에서 바람의 방향을 물어보고, 바람을 등지는 방향으로 코스를 선택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파타고니아에서 바람을 안고 걷는 건 생각보다 에너지 소모가 크다.

이도 저도 싫으면 당일 투어라도 꼭 해보길 '강추'한다. 토레스 델 파이네를 소망하는 모든 트레커를 응원한다!
#남미여행 #파타고니아 #또레스델파이네 #남미트레킹 #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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