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영 한국여성의전화 성폭력상담소 소장이 26일 오후 서울 은평구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최근 화두로 떠오른 데이트 폭력에 대해 "쏟아져 나오는 데이트 폭력 숫자가 절대적으로 적지 않다"며 "이를 일부 '이상한 남성'들의 이야기로 한정한다면 문제의 본질과 심각성을 감추고 만다"고 지적했다.
유성호
6774명.
지난해 데이트폭력을 경험한 사람의 '최소' 숫자다. 이는 박남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지난 24일 공개한 경찰청 자료로, 폭행·상해·강간·살인미수로 처벌받은 사례만 집계한 것이다. 적어도 하루 18명이 연인에게 데이트 폭력을 당했다는 얘기다. 통계를 최근 5년으로 확대하면 피해자는 3만 명을 훌쩍 넘는다.
동시에 언론에서는 '이별범죄'처럼 연인 사이에 발생한 강력범죄를 칭하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한국여성의전화가 지난해 언론에 보도된 사건만 분석한 결과 남편이나 애인 등 친밀한 사이의 남성에게 살해당한 여성의 수는 최소 114명이었다. 미수에 그친 사건도 95건이다. 두 통계는 데이트폭력이 일상에서 흔하게 벌어지며, 누군가의 목숨까지 위협하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
최소 하루 18명이 데이트폭력에 시달린다하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데이트폭력을 '사생활'의 영역에 가두고, 외면한다. 최근 진보진영에서 잇따라 터져 나온 데이트폭력 폭로를 대하는 일부 사람들의 태도가 그 방증이다. 이들은 여성들에게 '왜 과거(2008년~2013년)의 일을 이제 와서 폭로하느냐'고 따져 물으며 그들의 폭로 이유부터 의심했다. 폭력을 연인 사이의 은밀한 이야기로 치부해 공론화에 반대한다거나, 당시에 즉시 조치하지 않은 여성에게도 잘못이 있다며 책임을 전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지난 26일 오후 서울 은평구 사무실에서 만난 이화영 한국여성의전화 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이 모든 주장에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그는 먼저 "쏟아져 나오는 데이트 폭력 숫자가 절대적으로 적지 않으며 이를 일부 '이상한 남성'들의 이야기로 한정한다면 문제의 본질과 심각성을 감추고 만다"고 지적했다.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해 괴롭힘의 강도가 높고, 지속적이며 은폐되기 쉬운 속성을 제대로 이해하는 게 문제 해결의 출발이라는 얘기다.
폭로로 드러난 사건보다 폭로 여성의 '숨겨진 의도'를 의심하는 시선에도 우려했다. 그는 "실명공개와 법적 분쟁 소지 등 폭로한 여성 역시 더 많은 피해를 감수한다"며 "그럼에도 증언을 했다는 건 과거의 일이지만 그냥 넘어갈 수 없는 피해자만의 절박함이 작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아가 은폐되기 쉬운 속성까지 고려한다면 사회는 피해자가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오랜 기간 데이트폭력 피해자를 지원해 온 그는 약 1시간 동안 데이트폭력의 정의부터 해법까지 막힘없이 제시했다. 해법에는 피해자뿐만 아니라 주변인과 사회가 해야 할 일까지 다양했다. 가장 시급한 문제로는 데이트폭력을 가볍게 다루는 경찰의 태도를 꼽았다. 그는 "'남자친구 잘 타일러서 헤어지라'고 조언할 게 아니라 사건을 똑 부러지게 처리하기만 해도 재발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칼들고 자해하겠다고 압박하는 일도 데이트폭력이다" - 우선 데이트폭력을 정의해 달라."데이트 관계이거나 혹은 데이트를 시작하려는 사이에서 벌어지는 신체적 폭력은 물론 언어적·정서적·성적(스킨십)·경제적 폭력 모두를 아우른다. 욕을 하고, 감시하고, 집에 못 가게 하고, 주변인·반려동물을 괴롭혀서 심리적 압박을 부추기는 일 역시 데이트폭력이다. 칼로 피해자를 위협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해를 하겠다며 협박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신체적 폭력이 있으면 '아 이게 폭력이구나' 하는데, 그 외의 경우엔 어쩌면 저 사람이 날 사랑해서 그런 거라는 혼란과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앞서 말한 행위는 모두 데이트폭력이며, 그것이 일시적이라도 폭력이다. 둘 중 한 명이 거북함과 부담스러움을 느끼는 지점에서 시작한다. 다만 그것이 헤어질 사유인지 아닌지는 본인의 판단에 따라 달라진다.
- 일반 폭력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일반 폭력은 한번으로 끝나지만, 데이트폭력은 일상적인 관계에서 발생한다는 특수성이 있다. 데이트 폭력이 발생하는 시점은 가해자가 피해자의 행동을 통제하려는 용도로 사용할 때다. 가해자 스스로의 의지로 상대방을 통제하려고 했다면, 이건 한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반복해서 통제하려고 들며, 피해자가 두려워하는 걸 수단으로 사용한다. 다양한 방식으로 피해자의 일상을 통제하고, 감시하고, 억누르는 거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개인정보를 너무 많이 안다는 점도 일반 폭력과 다르다. 집 주소, 전화번호, 부모님 연락처, 부모님 회사, 피해자 회사, 친구 관계, 은행 계좌 등등. 자연스럽게 침해의 정도가 크다. 친밀한 관계 안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마음의 상처가 훨씬 큰 것은 물론 지속적이고, 은폐되기 쉽다는 특징도 있다."
- 얼마나 심각한가? 최근에 상담을 요청해 오는 경우가 많은가? "원래 심각했다. 상담 요청이 꾸준히 늘어나는데, 그건 수면 아래 감춰져 있던 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 피해자들은 자신이 입은 피해를 어떤 이름으로 정의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던 중 유명 연예인의 데이트폭력 사건이나, 콘크리트 암매장 사건 등 언론이 '데이트폭력'으로 보도하면서 인지하기 시작했다. 폭력에 대한 민감성이 높아진 거다."
- 상담을 요청하는 여성들의 가장 큰 고충은 무엇인가?"피해자 중에서는 처음 폭력이 발생했을 때 즉시 신고해 현명하게 대처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이걸 어떻게 하지'하며 혼자 고민한다. 너무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고민 끝에 이번 한번은 그냥 넘어가자며 가해자를 용서하고, 화해한다. 다음번에 폭력이 발생하면 이미 한번 용서를 했던 경험이 있기에 또다시 용서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반복되는 과정에서 피해자가 경찰에 신고를 한다는 것은 그만큼 긴급성과 긴박성을 요한다는 뜻이다. 남자친구한테 폭력을 당했다고 경찰에 얘기하는 순간 받게 될 시선도 두렵고, 신고로 가해자와의 관계가 끝나는 것도 두려워한다. 문자와 전화를 수시로 주고받으며, (받아주든 안 받아주든) 내 감정을 털어놓는 상대를 끊어내는 거니까. 아주 익숙한 일상의 한 부분을 떼어내는 일이다. 긴박성 때문에 신고를 하고도 이후 처벌을 상당히 망설인다."
"'소수 남성'의 일? 그런 시각이 데이트폭력을 은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