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예술제가 끝나면 6월엔 소풍이다. 거창고 인근 지리산이나 덕유산으로 전교생이 1박 2일 야영을 떠난다.(자료사진)
거창고는 내내 축제로 가득하다. 3월 입학하고 나면 4월 말 개교기념일을 즈음해 예술제가 열린다. 매년 4월 마지막 주 목, 금, 토 3일 동안 학업을 전폐하고 열리는 학생 주도의 최대 축제다. 월, 화, 수 3일 동안 축구 예선전이 열리고 그에 앞서 반별 준비는 몇 주 전부터 시작된다. 전국의 고등학생들이 바짝 긴장하고 학업에 매진할 학기 초, 거창고의 이 여유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예술제는 예산 편성부터 기획, 진행, 심판, 감독 모두를 학생이 주도한다. 학생회가 각반 대표들의 의견을 수렴해 그해의 예술제 계획을 세우면, 학생지도부 교사들이 검토해 수정할 일이 있으면 수정해 다시 학생회로 넘긴다. 매년 학생들은 종목 수를 늘리려는 경향이 있고 교사회는 줄이려고 한다. 이렇게 계획안이 학생회와 교사회를 몇 차례 왔다 갔다 하지만 최종결정권은 학생회가 가진다.
"처음에는 욕심은 많고, 진행은 서툴다 보니 3일 안에 끝나지 않은 적도 있고 밤 10시에 행사가 끝나기도 했다. 그러든 말든 학생들이 요청하기 전에는 교사가 관여하지 않는다. 서툴고 수준은 낮지만 엄청 재밌다. 아이들 스스로 기획, 집행, 평가하는 데서 오는 기쁨은 어른들의 상상을 초월한다."축구, 농구 등 각종 구기 종목, 단축마라톤 등 육상경기, 씨름, 제기차기 등 전통놀이 총 30여 종목이 치러진다. 못하든 잘하든, 관심이 있든 없든 학생은 반드시 한 종목에 출전해야 한다. 난생처음 배구공, 축구공을 차보는 아이들이 수두룩하다. 시화전, 사진전도 열린다.
예술제가 끝나면 6월엔 소풍을 떠난다. 인근 지리산이나 덕유산으로 1박 2일 야영. 9월엔 연극․ 합창제가 열린다. 또 겨울엔 바자회를 열어 생필품과 음식을 팔아 모은 수익금을 불우이웃을 돕는데 쓴다. 어찌 보면 단순하다. 시험 한번 치고 놀고, 시험 한번 치고 또 놀고를 연중 반복하는 셈이다. 25년 이상 고3 담임을 해온 한 교사는 이렇게 말한다.
"인성 교육? 아무것도 아니다. 잘 놀려야 공부도 잘한다. 놀이와 공부를 반복하면서 목적과 수단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할 뿐이다." 거창고에선 예술제를 정규교육 과정에 편성하고 싶었지만 교육청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아이들은 공부하는 틈틈이 예술제를 준비한다. "맘껏 공부하고 틈틈이 놀자"가 거창고의 정신이라는 전성은의 말이 이해되는 순간이다. (참고로, 거창고와 같은 재단인 샛별초등학교는 '맘껏 놀자', 샛별중학교는 '맘껏 놀고 틈틈이 공부하자'가 교훈 역할을 한다.)
뭐니 뭐니 해도 거창고의 으뜸가는 놀이는 토끼몰이다. 함박눈이 처음 내리는 날, 아이들은 수업 중이라도 "운동장에 모이라"는 교내방송이 나오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뛰어나온다. 토끼를 잡든, 잡지 못하든 상관없다. 교사와 학생이 한데 뒤엉켜 600미터 정상의 학교 뒷산을 오르며 첫눈의 가슴뜀을 발산한다.
"우리는 안 하는 걸 잘한다."'두 마리 토끼'를 다시 묻는 기자에게 전성은은 다시 우문현답인듯 이렇게 답한다.
거창고에 없는 세 가지.
첫째. 교문, 문패, 담이 없다. 정문이라 식별할 수 있는 것은 "이곳은 학교 정문이오니 주차를 삼가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주차안내판이 전부. "오히려 담이나 문패로 구별 짓는 것이 학교가 특수한 곳으로 인식되어 학생들과 주민들 사이에 거리감이 생기고 학생들도 학교에 구속감을 느끼게 된다"는 게 이 학교 교사들의 생각이다.
둘째, 교실 안을 들여다보기 어렵다. 복도 쪽으로 난 창문이 유난히 높아 교실 안 풍경을 들여다볼 수 없다. '거창고의 뿌리'라는 창업자 전영창 교장(후속 기사 참조)의 뜻이 담겨 있는 건축이다. 장학사든, 교장이든 돌아다니면서 교실 안을 '감시'하지 못하도록 부러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셋째, 학원 수업을 안 받는다. 대신 자율학습이 있다. 밤 10, 11시까지 교실과 도서관에는 불이 꺼지지 않는다. 감독하는 교사도 없고 자율학습에 남지 않는다고 꾸중하는 교사도 없다. 무얼 공부하든 상관없다. 다음날 실습과제물을 만드는 아이도 있고, 수학과 씨름하며 책장을 넘기는 아이도 있다. 책걸상을 아예 복도로 가져 나와 홀로 집중하는 아이도 눈에 띈다. "이래도 되니?"라고 묻자 "다 하고 제자리에 갖다 놓으면 된다"며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다.
경쟁과 시합은 다르다3학년 4반 강00 학생에게 물었다. 학원 다니지 않아서 불안하지 않느냐고. "우리 학교 샘(선생님)들이 학원보다 더 잘 가르치는데요?"라고 도리어 반문한다.
"다른 학교 다니는 친구들하고 얘기 나누다 보면 제가 행복한 것 같아요. 다른 데는 아무래도 억압적이고 경쟁이 심하죠. 우리 학교도 경쟁은 있지만 심하진 않고 자유로워요. 그리고 샘들이 공부하게끔 만들어주십니다. 실컷 놀았고, 이제 공부해야지 싶어서 저도 하는 거거든요."거창고에도 경쟁은 있다. 다만 방법이 다르다. 가령 '수준별 이동학습'을 한다. 개교와 함께 시작된 전통적인 진학지도 방식이다. 영어, 수학 과목의 경우 3개 또는 2개 반으로 능력별 반편성을 해 수업한다. 몇 차례의 시험을 거쳐 반편성을 하지만 학생의 희망이나 교사의 의견에 따라 바꾸기도 한다. 교사는 '인격은 똑같이 존엄하지만 타고난 능력 분야는 각기 다르다'는 것을 먼저 아이들에게 이해시킨다. 또 아이들은 이러한 수업방식이 학업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걸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전성은은 "차별이라는 외부의 시선을 감수하더라도 실질적으로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유지하고 있다. 논란을 피하려고 '눈높이' 교육을 포기할 순 없다"고 말한다. 그는 '경쟁'과 '시합'은 다르다고 덧붙인다.
"내가 즐겨보는 TV 방송프로그램이 있다. 우리말 실력을 높이기 위해 우리말 달인을 뽑는 프로그램인데 그건 시합이다. 그 시합에서 누구는 이기고 누구는 지기도 한다. 하지만 출연한 사람 모두가 우리말 실력이 좋아진다. 시청자도 우리말 실력이 쑥쑥 자란다. 경쟁이 아닌 시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쟁은 승자가 이득을 독차지한다.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식이다. 대통령 선거에서도 2등 후보를 지지한 48%의 국민은 완전히 제로(0)가 되지 않나. 국가는 여당의 것도 아니고, 52% 국민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52%에 속하든, 48%에 속하든 주권은 동일하게 주어진다." 최근 들어 도시 부모들이 주말에 학생들 데려가 '족집게 과외'를 시키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끌려가는 아이를 안타깝게 바라볼 뿐 제지하지는 않는다. "어떤 형식을 정해놓고 교육적으로 된다, 안 된다고 하지 않는다"는 게 이 학교의 상식이다.
▲전성은 선생이 몸담았던 샛별중, 거창고에는 정문이 따로 없다. 주민들의 길과 학교로 통하는 길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박형숙
과외를 받진 않지만 과외 선생이 되기는 한다. 거창고 학생들은 오후 수업이 끝나고 저녁 식사 전까지 1시간가량, 이웃한 샛별중학교 동생들을 개인지도 한다. 이 역시 희망자에 한해서다. 방과 후 중학교 교실, 복도에는 그렇게 둘, 셋씩 짝지어진 '거고 멘토링' 풍경이 펼쳐진다.
"교과서, 커리큘럼, 학생선발권 등 모두 교육부, 교육청이 전권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 일선 학교가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우리가 제도 안에서 다른 걸 한 게 없다. 있다면 '자율'이라는 방법을 쓴 것이다. 능력도 효율도 예술성도 자율로 길러지지만, 자율만이 윤리적, 인격적 힘을 기를 기회를 제공한다. 전통적으로 거창고는 무감독 시험이었다. 사전도 볼 수 있고 또 교실 밖에서도 쓸 수 있었다.(※내신제가 생기면서 지금은 법적으로 할 수 없게 됐다). 물론 커닝하는 아이도 있고 베껴 쓰는 아이도 있다. 하지만 볼 수도 있고, 보지 않을 수 있는 결정권을 줬을 때 스스로 판단하고 자기 결정에 책임지는 힘이 생긴다. 그 힘이 인격을 형성하는 것이다. 볼 수 있는 걸 막아놓은 상태에서 보지 않는 힘은 길러질 수 없다." 정치권력에 맞서다 세 차례 폐교 위기에 처하기도거창고는 사립학교다. 재단법인 거창고등학회가 운영한다. 이 재단의 학교 운영방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법적 주인인 이사회는 자신들이 세운 교육이념과 교육목적을 잘 구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교장으로 임명한다. 그 교장은 학교운영에 관한 전권을 가진다. 이사회는 교사 채용도 교장에게 일임한다.
교사들의 교무회의는 학사일정, 학급운영, 교과서선택, 교수방식, 평가, 학생지도 등 교육행위에 대한 자율권을 가진다. 학생회는? 앞서 소개한 예술제, 운동회, 소풍 등 학생들이 주관하는 교육활동의 결정권을 가진다. 한마디로, 이사회가 교장에게 학교 운영의 자율권을, 교장이 교사에게 교육기획의 자율권을, 교사가 학생에게 교육행사의 자율권을 주는 체제다.
형식이 거저 내용을 보장한 것은 아니었다. 부단한 60년의 역사가 있었다. 아무도 가지 않던 길을 먼저 가는 고난을 감수했다. 지금은 상식이 된 봄방학을 도입하자 "너무 노는 것 아니냐"는 시선을 감당해야 했고, 학도호국단이 있을 때도 학생회장을 직선으로 뽑고, 교복 자율화가 있기 전 교복, 교모를 폐지하는 선택에는 가시밭길이 뒤따랐다.
특히 정치권력에 맞서다 세 차례 폐교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교장실에 대통령 사진을 걸라'는 지시를 거부한 것은 물론, 3선 개헌 반대 데모에 나선 거창고 학생들을 처벌하라는 교육 당국의 지시를 거부하자 교장이 파면당하기도 했다. 1980년 광주민주항쟁 때는 "국가가 국민에게 거짓말을 할 때 학교는 학생들에게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길을 선택했다.
'전성은 교장' 시절에도 학교는 여러 차례 문 닫을 위기에 처했다.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다. 사회정화의 명목으로 인권유린의 수단이 되었던 삼청교육대는 일반 고등학교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교육청을 통해 재교육시킬 문제 학생을 보내라는 압력이 들어왔지만 "'앉아, 일어서' 같은 훈련과 기합으로는 학생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며 끝까지 버텼다.
전성은은 이 모든 게 교육목표를 지키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회고한다. 거창고등학교의 교육 목표?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민주시민을 양성한다'
차례 |
① 여는 글- "학생이 왕이다, 학교를 탈출하라" ② 자녀교육 즉문즉설- 배웠다는 부모의 주특기 '무언의 압력' ③ 시골학교 이야기- "우린 안 하는 걸 잘한다", 놀면서 성공한 학교 ④ 교사론- "내 교육은 실패했어" ⑤ 해법- "해방 후 지금까지 교육 정책은 없었다" ⑥ 닫는 글- "왜 대안학교의 길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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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안 하는 걸 잘한다", 놀면서 성공한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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