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승과 오광 민란이 일어났다고 전해지는 안휘 성 중심에 위치한 천주산. 천주산은 고대에 완산(?山)이라 불렸으며 안휘 성 별칭을 '완'이라고 부르게 된 까닭이다.
최종명
구(篝)는 허신(許慎)의 <설문(說文)>에 따르면 곧 대나무 죽(竹)이다. 화약이 없던 시절의 폭죽(爆竹)은 바로 대나무를 태우며 귀신을 쫓던 행사를 말한다. 중국에서는 춘절(春節)뿐 아니라 혼례를 치르거나, 진학이나 승진, 건물 낙성식, 가게 개장에도 폭죽을 터트린다. 서기 6세기경 남북조 시대에 편찬된 책으로 초나라 지방의 명절 풍습을 담은 종름(宗懔)의 <형초세시기(荆楚歲時記)>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부터 정월 초 하루, 첫닭이 울 때 모든 가족이 문 밖에 나와 폭죽을 터트렸다고 전한다. 대나무가 불에 타면서 터질 박烞(pò), 불 활활 탈 필熚(bì) 자와 비슷한 소리가 난다고 했다.
새해의 풍요를 기원하며 귀신을 쫓는 의식이었는데 화약과 종이가 발명되기 전이었으니 대나무를 불에 태우면 꽤 커다란 소리가 났던 것에 착안했다. 중국사람들의 민간풍속인 '개문폭죽開門爆竹'은 복이나 재물을 바라는 신앙이 반영된 것이다. 단순한 폭죽놀이가 아니라 민간 풍속이며 기복이자 귀신을 쫓는 신념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진승과 오광의 민란 전술은 대중적인 관점을 지닌 멋진 아이디어였다.
지금의 소림사 부근 하남 양성(陽城) 사람으로 소작농이던 진승은 평소에 포부가 남다르고 의리도 많아 훗날 크게 부유해진다면 가난했던 시절의 형제들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늘 호기를 부렸다. 봉건제 신분사회에서 허풍치고는 꽤 인간적인 면모였다. 주변 사람들이 당연히 비웃었을 것인데 그때마다 "어찌 제비나 참새 따위가 기러기와 고니의 뜻을 알까?"라고 했다.
기러기와 고니처럼 고귀하고 원대한 포부인 '홍곡지지鴻鵠之志'를 진승의 캐릭터로 둔갑했던 것도 당시 농민반란이 가져다 준 사회적 영향이 폭풍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대형사고를 친 인물은 늘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이 어울릴 터이니 후대에 이르러 진승의 반란으로 인해 큰 혜택을 본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의 어린 시절을 영웅스토리로 담았을 것이 분명하다.
물고기를 영물로 둔갑시키고 대나무로 도깨비 불을 피우며 '왕'의 도래를 알린 후 진승과 오광은 보다 명확하게 목표와 전략을 드러냈다. 진나라는 전국을 통일한 후 영토를 군과 현으로 나누어 관리를 중앙에서 직접 내려 보내 통치를 펼치게 된다. 춘추전국 시대 이래 왕과 제후, 지방 대부 등은 모두 하늘에서 내린 권력이자 세습이라 생각했던 사람들 앞에 생판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관리가 파견 와서 농민들을 수탈했던 것이다.
신권이건 왕권이건 하늘에서 오는 줄 알았던 허위를 일깨운 건, 어쩌면 진나라의 군현제이기도 했다. 진승이 외친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어찌 씨가 따로 있겠는가?"는 메시지치고는 원자폭탄이었다. 모두 떨쳐 일어나서 누구든지 왕이 될 수 있다는 논리는 폭약만큼 폭발적이었으며 농민반란군에게는 군현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어 본 회심의 한 수였다. 이제 그들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중국 역사의 신기원을 이루기 위해 떨쳐 일어났다.
거사, 인간해방을 선언하다디데이는 정해졌다. 평소에 대인관계가 좋은 오광은 진 나라 호위 무관들을 자극한 후 다툼을 벌여 일부러 채찍질을 당했다. 안 그래도 서럽고 억울했던 농민들은 흥분했으며 분위기가 고조되자 오광은 검을 높이 들어 무관들을 찔러 죽였으며 동시에 진승도 합세해 진나라 관리 및 무관들을 모두 제압했다. 농민들이 함성으로 호응하자 진승은 큰 목소리로 "죽어도 명성을 남기고 죽자! 왕과 제후, 장수와 재상의 씨를 하늘이 내려주기라도 하는가?"라고 외쳤다.
부소와 항연을 잇는다고 설파하고 가독(苛毒)한 요역(徭役)을 거부하고 떨쳐 일어서자고 설득했다. 농민들의 동조를 얻자 바로 연단을 세우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나라를 세울 것을 선포했다. 굴욕의 허울을 벗어 제키듯 한쪽 웃통을 벗고 나섰으며 적나라하게 드러난 구리 빛 몸통은 순백의 양심으로 절규하는 몸짓처럼 멋지게 보였다. 나라의 독립과 재건을 꿈 꾼 진승과 오광은 드디어 민란의 주동자로 화려하게 탄생했다.
용농(傭農) 진승은 장군(將軍)으로, 빈농(貧農) 오광은 군대를 지휘하는 도위(都尉)가 돼 군대 조직을 갖추고 반진(反秦)의 기치를 높이 들었으며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중국 최초의 농민주도의 혁명군이 탄생한 것이다. 춘추전국 시대를 거치며 왕과 제후의 전쟁 놀이의 소모품이자 군수물자 생산을 위해 뼈를 깎는 노력으로만 겨우 존재 가치를 증명했던 농민은 스스로 주인을 자처하는 거사를 일으켰다. 이것이 인간해방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진승이 제단을 쌓고 '인간해방'을 동맹했던 제대(祭台)는 지금도 안휘 성 숙주(宿州) 기현(蘄县)에 남아있는데 진승의 자인 섭을 따서 섭고대(涉故台)라 부른다. 사마천의 <사기> "진섭세가" 편에 진승의 자가 기재돼 있는데 언뜻 보면 진승에게도 자가 있었다는 것은 다소 이상하다.
고대 사람들은 이름 '명名'과 '자字'를 함께 썼으며 현대 중국인들은 이름이 무엇인지 물어볼 때 '밍쯔(名字)?'라 한다. 태어나자 마자 이름을 얻는 것을 취명(取名)이라 하고 남자가 20세 성인이 되는 관례를 올릴 때 이름을 얻는 것은 표자(表字)라 했다. 또한, 남송 역사학자인 정초(鄭樵)가 편찬한 <통지(通志)> '씨족략氏族略'에 따르면 씨족이 후손을 잇는 개념으로 모계사회의 영향은 성(姓), 이후 부계사회는 씨(氏)로부터 나왔다 하고 성씨를 설명하면서 귀한 이는 씨가 있고 천한 이는 씨가 없고 이름만 있다고 했다. 하층민이던 진승과 오광에게도 성과 이름뿐 아니라 자도 원래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후대에 부여한 것인지는 아마 사마천에게 물어봐야 할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