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여름휴가를? 죽고 싶으면 떠나라

평생 토지에 얽매여 살아야 했던 노비출신 소작농

등록 2015.07.11 18:46수정 2015.07.11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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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시대의 노동자들은 7·8월 휴가 계획을 세울 때, 주민센터나 구청의 승인을 받을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노동자를 포함한 전 국민에 헌법 제14조의 거주·이전의 자유가 보장돼 있기 때문이다.

이런 풍경은 봉건주의 농업경제시대(아래 봉건시대)의 서민들에게는 상당히 낯선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거주·이전의 자유 같은 기본권이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름에 덥다고 해서 함부로 주거지를 떠날 수 없었다. 19세기 이전에는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탓에, 일반 서민이 자기가 사는 군(郡) 단위 지역을 벗어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런 교통 문제와 관계없이, 옛날에는 거주·이전이 제약을 받았기 때문에 소속 행정구역을 떠나 여름휴가를 즐기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한국 역사 속의 봉건시대에는 전체 인구의 절반 정도가 노비였다. 이 비중은 고려시대에는 절반을 상회하고, 조선시대의 상당기간 동안에는 절반 정도였다. 조선 후기인 18세기에는 30%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노비의 대다수는 소작농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봉건시대 노비 출신 소작농은 일반 서민의 대표적인 모습 중 하나였다.

'토지'에 묶여 살아야 했던 서민들

 중국 명나라 화가인 주신의 <유민도>. 농토에서 이탈하여 도시빈민 혹은 유랑민으로 전락한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한국 왕조든 중국 왕조든, 옛날 국가들은 농민이 토지를 떠나 통제불능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가장 경계했다.
중국 명나라 화가인 주신의 <유민도>. 농토에서 이탈하여 도시빈민 혹은 유랑민으로 전락한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한국 왕조든 중국 왕조든, 옛날 국가들은 농민이 토지를 떠나 통제불능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가장 경계했다. 주신

노비 출신 소작농은 평생 토지에 얽매여 살아야 했다. 이들이 토지로부터 마음대로 이탈하면, 국가적 규모의 농업 생산성과 조세 수입이 떨어질 위험이 컸다. 그래서 농민이 토지에 꼭 붙어있는 게 국가나 지주 입장에서 유리했다.

때문에 국가와 지주는 농민이 토지를 벗어나 거주·이전의 자유를 향유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국가는 주요 관문에 병력을 배치해 일반인의 이동을 통제했고, 지주는 주거지를 떠난 노비 출신 소작농을 '도주 노비'로 간주해 관청에 신고하거나 추적했다. 분위기가 이랬기 때문에 더위가 심해 노비 출신 소작농들이 여름철에 가족을 데리고 소속 행정구역을 벗어나 바다·계곡으로 여행을 가는 일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여름휴가는 잘못하면 감옥이나 저세상으로 가는 지름길이었으니까.

자본주의 사회 속 노동자는 토지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래서 국가나 자본가는 노동자를 토지에 묶어둘 필요를 못 느낀다.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에는 노동자를 포함한 전 국민의 이동을 자유롭게 보장해야 국가와 자본가에게 유리하다. 지역별로 발생하는 가변적인 노동 수요를 맞추면서 전국 단위의 생산을 계속 가동하려면, 노동자들이 이곳저곳 옮겨 다닐 수 있는 자유가 보장돼야 하기 때문이다.


18세기나 돼서야 이동의 자유가 생겼다

 농노를 비롯한 서민들이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를 얻은 지는 불과 두 세기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농노를 비롯한 서민들이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를 얻은 지는 불과 두 세기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wiki commons

거주·이전의 자유가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이라는 점은 부르주아 계급이 구체제를 무너뜨리기 전에 이 자유가 제대로 보장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예컨대, 영국은 1215년 대헌장이 공포될 때 처음으로 상인에 한해 이동의 자유를 보장했다.


또 신성로마제국(독일)의 경우에는 1514년이 돼서야 관료에 한해 이동의 자유를 보장했고, 1555년에 이르러서야 신앙의 자유를 찾아 떠나는 이동의 자유를 보장했다. 거주·이전의 자유가 제대로 보장된 것은 18세기 후반에 부르주아계급이 권력 쟁탈에 나선 뒤의 일이었다. 부르주아 계급이 승리한 뒤에야 비로소 자본가의 이윤 향상을 목적으로 거주·이전의 자유를 보장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거주·이전의 자유가 보장됨에 따라 부수적으로 나타난 현상이 바로 여름철에 휴가를 떠나는 노동자들의 모습이었다. 만약 지금이 봉건시대였다면 우리는 한여름 휴가를 생각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봉건시대 당시 노비 출신 소작농이 거주 지역을 벗어났다고 가정해보자. 심한 경우 이 소작농은 주인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려고 몸을 숨겼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더위를 피해 잠깐 놀러 간 것일 뿐"이라고 변명한다고 해도, 관청이나 주인은 피서 목적이 아니라 도망 목적으로 떠났을 거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컸다.

만약 이런 일로 주인과 다투기라도 한다면? 국가는 거의 여지없이 주인의 편을 들었다. 조선시대 형법전 중 하나인 <대명률직해>는 노비가 주인이나 주인의 가족을 폭행하기만 해도 노비를 참수형에 처한다고 규정해놨다. 주인의 몸에 손을 대는 행위도 해석에 따라서는 폭행죄로 처리될 수 있었다. 주인의 몸에 손을 대지 않고 단순히 욕설만 하는 경우에도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렇게 국가와 법률이 일방적으로 주인 편을 들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주인 몰래 주거지를 이탈해서 여름휴가를 떠났다가 주인과 다투게 된다면 최악의 경우에 참수형이나 교수형으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봉건시대 농민들은 7·8월의 작렬하는 태양을 피하기보다는 그냥 태양의 세례를 받는 게 속 편했을 것이다. 뜨거운 태양을 피하려다가 권력과 지주의 뜨거운 맛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선비나 관원 또는 상인의 경우에는 그런 제약이 상대적으로 약했다. 하지만 일반 농민은 그렇지 않았다. 한여름에도 생산을 위한 활동은 계속돼야 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여름 풍경 "더우면 참외 따고 국수나..."

 옛날 서민들은 한여름에도 노동을 권유당했다. 이미지는 김홍도의 <논갈이>
옛날 서민들은 한여름에도 노동을 권유당했다. 이미지는 김홍도의 <논갈이>자료사진

국가와 지주는 서민들이 한여름에도 오로지 생산에만 전념하도록 권장했다. 이런 의도는 각 시기의 권농정책을 통해 표현되기도 했다. 그런 노력이 19세기 헌종 때 이르러서는 노랫말의 형태로도 표현됐다. 농민들이 월별로 해야 할 일을 노랫말로 만들어 널리 유포한 것이다. <농가월령가>가 바로 그것이다. 

<농가월령가>는 한여름에 해당하는 음력 6월에 관한 6월령(六月令) 부분에서 쉬지 말고 열심히 일할 것을 독려한다. 한 대목을 살펴보자.

"(음력) 6월이라… 더위도 극심하다. (중략) 기력을 쉬지 말고 극진히 (농작물을) 다스리라."

그런 다음에 "틈틈이 나물 밭도 북돋아 매 가꾸고 / 습한 울 밑 돌아가며 잡풀을 없게 하고"라면서 각종 일거리를 잔뜩 부여한다. 이후 "정자나무 그늘 밑에 자리를 정한 뒤에 점심 그릇 열어 놓고 보리단술 먼저 먹세"라면서 "(이것이) 잠깐 동안의 낙이로다"라고 노래했다. 열심히 노동한 뒤 그 자리에서 휴식을 취하도록 권하는 게다.

농민들이 너무 고달파서 일손을 놓을 경우도 있을 법하다. <농가월령가>는 "하다가 고달프면 목침 베고 허리를 쉴 것"을 권한다. 또 삼복 더위를 빙자해서 아예 일터를 떠날 것을 우려했는지 "(삼복 더위에는) 원두밭에 참외 따고 밀 갈아 국수 하여 사당에 바치고 한때나마 음식을 즐겨보세"라고 부추긴다. 어느 경우에도 농민이 농토 주변을 떠나지 않도록 유도하고 있다는 걸 엿볼 수 있다. 어디 먼 데 좀 가서 쉬었다 오라는 이야기는 없다.

옛날 사람들이 지금 시대 휴가 풍경을 본다면?

 조선시대 농민들의 모습. 서울시 광화문광장의 지하 공간에서 찍은 사진.
조선시대 농민들의 모습. 서울시 광화문광장의 지하 공간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물론 열심히 노동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하지만 노동의 결과물이 지주와 국가의 수중에 거의 다 떨어지고 정작 잘 먹어야 하는 농민은 배를 움켜쥐어야 하는 상황에서, 한여름에도 땀을 흘리며 오로지 일만 생각하라고 권하는 것은 파렴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옛날 서민들은 한여름에도 노동을 권유당했다. 휴식마저도 동네 정자나무 같은 데서 하라는 이야기까지 들어야 했다. 시대 분위기가 이랬기 때문에 농민들은 한여름에도 오로지 일만 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며 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일부 소작농들은 국가와 지주의 명령에 대항하기도 했지만, 대다수 서민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만약 그런 시대를 살았던 옛날 사람들이 지금 노동자들의 여름 휴가를 관찰한다면 아마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저 많은 사람들이 저렇게 대규모로 직장에서 이탈하고도 제대로 복귀를 할까? 저 사람들, 혹시 도망가는 것 아니야? 어쩌면 그들은 이런 의구심을 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산성 향상을 위한 거주·이전의 자유가 보장되고 그 파생물로서 여행의 자유가 보장됐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옛날 노동자들은 '우리 시대 국가와 고용주는 어리숙한 편이었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들이 봉건시대 농민들보다 처지가 나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노동자들이 이전보다 훨씬 교묘하게 착취당한다는 점을 미뤄봤을 때 옛날 사람들은 "한여름에도 '방콕' 신세인 우리가 차라리 좀 더 낫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 편집ㅣ김지현 기자

#여름휴가 #여행의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 #이동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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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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