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노를 비롯한 서민들이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를 얻은 지는 불과 두 세기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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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이전의 자유가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이라는 점은 부르주아 계급이 구체제를 무너뜨리기 전에 이 자유가 제대로 보장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예컨대, 영국은 1215년 대헌장이 공포될 때 처음으로 상인에 한해 이동의 자유를 보장했다.
또 신성로마제국(독일)의 경우에는 1514년이 돼서야 관료에 한해 이동의 자유를 보장했고, 1555년에 이르러서야 신앙의 자유를 찾아 떠나는 이동의 자유를 보장했다. 거주·이전의 자유가 제대로 보장된 것은 18세기 후반에 부르주아계급이 권력 쟁탈에 나선 뒤의 일이었다. 부르주아 계급이 승리한 뒤에야 비로소 자본가의 이윤 향상을 목적으로 거주·이전의 자유를 보장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거주·이전의 자유가 보장됨에 따라 부수적으로 나타난 현상이 바로 여름철에 휴가를 떠나는 노동자들의 모습이었다. 만약 지금이 봉건시대였다면 우리는 한여름 휴가를 생각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봉건시대 당시 노비 출신 소작농이 거주 지역을 벗어났다고 가정해보자. 심한 경우 이 소작농은 주인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려고 몸을 숨겼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더위를 피해 잠깐 놀러 간 것일 뿐"이라고 변명한다고 해도, 관청이나 주인은 피서 목적이 아니라 도망 목적으로 떠났을 거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컸다.
만약 이런 일로 주인과 다투기라도 한다면? 국가는 거의 여지없이 주인의 편을 들었다. 조선시대 형법전 중 하나인 <대명률직해>는 노비가 주인이나 주인의 가족을 폭행하기만 해도 노비를 참수형에 처한다고 규정해놨다. 주인의 몸에 손을 대는 행위도 해석에 따라서는 폭행죄로 처리될 수 있었다. 주인의 몸에 손을 대지 않고 단순히 욕설만 하는 경우에도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렇게 국가와 법률이 일방적으로 주인 편을 들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주인 몰래 주거지를 이탈해서 여름휴가를 떠났다가 주인과 다투게 된다면 최악의 경우에 참수형이나 교수형으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봉건시대 농민들은 7·8월의 작렬하는 태양을 피하기보다는 그냥 태양의 세례를 받는 게 속 편했을 것이다. 뜨거운 태양을 피하려다가 권력과 지주의 뜨거운 맛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선비나 관원 또는 상인의 경우에는 그런 제약이 상대적으로 약했다. 하지만 일반 농민은 그렇지 않았다. 한여름에도 생산을 위한 활동은 계속돼야 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여름 풍경 "더우면 참외 따고 국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