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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곽장영 님이 빚은 시집 <가끔은 물어본다>(레디앙,2015)를 읽습니다. 노동조합 일을 오랫동안 했다고 하는 곽장영 님은 '일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진보정당' 이야기를 싯말로 삭이고, 틈틈이 멧봉우리를 오르내리면서 마주한 숲바람 이야기를 싯말로 다스립니다. 술 한잔을 부딪히면서 돌아보는 오늘날 한국 사회 이야기도 찬찬히 싯말로 녹입니다. 때로는 이녁 아이하고 벌이는 실랑이가 싯말로 태어납니다.
텔레비전 못 보게 한다고 / 아홉 살 난 / 아들놈이 애비를 / '나쁜 놈'이란다 // 어르고 달래고 / 한 대 쥐어박으며 / '그건 잘못했다'고 인정하래도 / 그럴 수 없단다 (전세 역전)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습니다.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으니, 텔레비전을 놓고 다투는 일이 없습니다. 이것을 보고 싶다든지 저것을 보겠노라느니 하면서 다툴 까닭이 없습니다.
텔레비전이 없는 우리 집에서는 전기삯을 낼 적에 시청료를 안 냅니다. 있지도 않은 텔레비전 때문에 시청료를 물어야 할 일이 없습니다. 시골마을에도 '텔레비전 바꾸라'면서 찾아오는 영업 일꾼이 있으나, 텔레비전을 아예 안 들인 우리 집에서 그분들이 영업을 할 길이란 없습니다.
곽장영 님이 텔레비전을 놓고 아들내미하고 실랑이를 벌인 시를 읽다가 피식 웃으면서 생각에 젖습니다. 집에서 텔레비전을 치운다면, 아들내미하고 함께 시를 쓰면서 논다면, 집에서 연필 한 자루와 종이 한 장으로 글놀이랑 그림놀이를 즐기다가, 함께 집 바깥으로 나간다면, 싱그러운 멧봉우리 나들이를 아이하고 함께 누린다면, 이때에는 어떤 시가 태어날 만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소주 한 잔 마시고 자다가 / 배고 고파 깨어서 / 김치 풀어 / 갱죽을 끓인다 (마늘)얼추 열흘 남짓 우리 시골마을은 농약바람이 불었습니다. 비가 오다 말다 하는 날씨여도, 비가 멎는다 싶으면 농약 헬리콥터가 떠서 항공방제를 합니다. 날이 맑다 싶으면 새벽부터 저녁까지 농약 헬리콥터가 시끄럽습니다. 비가 그쳐서 이불도 널고 빨래도 널려고 마음을 먹으나, 농약바람이 촤르르 부니까, 이불이나 빨래를 섣불리 마당에 널지 못합니다.
농약 헬리콥터가 일을 마쳤는지 바깥이 조용하면, 아이들은 다시 마당으로 나가서 뛰놉니다. 마당에서 놀던 다섯 살 작은아이가 문득 잠자리 한 마리를 주워서 나한테 보여줍니다. "아버지, 여기 잠자리!" 그러네, 그런데 잠자리가 죽었구나. "그래, 잘 했어. 저기 꽃밭 흙에다 놓아 주렴."
아이들도 알리라 느낍니다. 나비하고 잠자리가 왜 죽는지를. 농약 헬리콥터가 떴다 하면, 날마다 우리 집 마당으로 찾아들던 새들이 왜 안 찾아오는지를. 농약 헬리콥터가 농약을 뿌리는 동안 개구리가 왜 노래하지 않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