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고 졸업 후 친구들과 함께. 아래 오른쪽이 한도원 박사
한도원
한국 전쟁으로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내몰린 나는 염치를 무릅쓰고 친하게 지내던 급우 집을 찾아가 당분간 머물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다행히 평소 나를 칭찬하고 격려해 주던 '친구 어머니'는 따뜻하게 나를 맞이하여 안심하고 지내라고 했다.
다음 날 아침, 친구와 함께 도둑고양이처럼 길거리에 나가서 상황을 살펴보니 인민군 탱크들이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서울 시내를 구르고 있었다. 관공서뿐 아니라 웬만한 높이의 건물에는 이미 인공기가 걸려 있었고, 잔류한 일부 시민들이 길거리에서 깃발을 흔들며 인민군을 환영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한강 인근에 가보니 이미 다리란 다리는 인민군이 진을 치고 입구에서부터 차단막을 내린 채 지키고 있었다.
친구와 나는 집에 틀어박혀 있어야 했다. 소문에 인민군들이 닥치는 대로 젊은이들을 징집하여 전쟁터로 내보낸다고 했다. 곰곰 생각하던 끝에 우리는 후미진 방 하나를 골라 구들장을 들어내어 땅굴을 만들고는 그 위를 잡동사니로 위장했다. 우리는 땅굴에 들어가 지내며 서울을 빠져나갈 궁리를 했으나 딱히 방도를 찾을 수 없었다.
이렇게 숨어서 몇 날 며칠을 꼬부려 지내는 중에 양식이 거의 바닥나고 있었다. 밖에 나돌아다녀도 양식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터인데, 집에만 박혀 있으니 더더욱 난감한 지경이 된 것이다. 결국, 어떤 결단을 내릴 때가 되었다.
밖에서는 종종 탱크가 굴러가는 소리와 저벅저벅 걷는 소리, 여럿이서 고함치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한참 팔팔한 나이에 며칠 동안을 캄캄한 땅굴에서 지내자니 미칠 것만 같았다. 퀴퀴한 냄새와 탁한 공기를 더 이상 견디다가는 병이 나거나 지레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변소에 가기 위해 밖으로 나오거나 친구 어머니의 신호에 따라 잠시 바람을 쐬러 밖에 나오면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이런 와중에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잠시 시내를 나와 보니 피아간에 혼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멀리서 쿵쿵 포격 소리와 콩을 볶아대는 듯한 총격 소리가 30~40분간 들려왔다가 사라지고 다시 들려오곤 했다. 시내 곳곳에서는 미군 부대가 부산하게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이 곳곳에서 목격되었다. 수색 인근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일대 격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결국, 이 기회를 틈타 친구 집을 빠져나가는 것이 나를 위해서나 친구와 친구 어머니를 위해서도 안전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탈출 계획을 세운 다음 날, 내 계획을 친구 어머니에게 털어놓기 위해 땅굴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갑자기 집안이 조용한 것이 이상했다. 바람을 쐬러 나간 친구는 보이지 않고 그의 어머니만 덩그러니 앉아 내가 나오는 것을 조심스럽게 지켜 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친구가 남겼다는 쪽지를 내게 보여 주셨다.
"친구 도원이를 집에 남겨두고 떠납니다. 남은 식량으로 먹고 자게 해 주세요. 시골에 살고 있는 할머니 집으로 피신해 있다가 조용해 지면 돌아오겠습니다."
평생 못 잊을 우정... 나 대신 먼 길 떠난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