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끼 만행사건 현장 공개1976년 8월 18일 도끼 만행의 현장이, 10년 만인 1986년 8월 18일 처음으로 공개됐다. 미루나무는 미군 2명이 살해된 뒤 가지를 모두 잘려 둥지만 남은 채 방부 처리돼 보존되고 있다. 당시 사건을 목격했던 작업원 곽희환씨가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1976년 8월 18일 오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미군 장교 2명이 북한 경비병들에게 살해당하는 사상 초유의 일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우리 측 경비초소의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미군 경비중대장 아서 보니파스 대위와 마크 바레트 중위가 목숨을 잃었다. 이른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은 한반도를 전쟁 직전의 상황으로 몰고 갔다.
휴가차 일본에 가 있던 주한미군 사령관 스틸웰 장군은 전투기 뒷좌석을 얻어 타고 급하게 돌아와 '데프콘3 (Defense Readiness Condition 3)'를 발동하고, 휴가 중이거나 부대를 떠나 있는 모든 미군 장병에게 즉시 복귀하도록 명령했다. 한국전쟁 이후 '데프콘 3'가 발령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에 맞서 북한도 김일성 조선인민군 최고 사령관 명의로 전 인민군과 로농적위대, 붉은 청년 근위대 등에 전투태세를 갖출 것을 명령하는 지시를 하달했다. 북한 전역에 준전시상태를 뜻하는 '북풍 1호'가 선포됐다. 사건 이틀 뒤인 8월 20일, 박정희 대통령은 육군 제3사관학교 졸업 훈시를 통해 "미친개한테는 몽둥이가 필요하다"고 공언했다.
미군 장교 2명이 살해된 사건에 분노한 미국 정부는 미루나무 절단을 결정했다. 도끼질 한 번에 스물세 그루의 나무를 잘라냈다던 미국의 전설적인 나무꾼의 이름을 따 '폴 버니언 작전(Operation Paul Bunyan)'으로 명명된 이 작전은, 8월 21일 전격 실행됐다.
오전 7시, 유엔사 판문점 경비대 1개 소대와 제1 특전여단 64명의 호위를 받으면서 미군 공병대원 16명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으로 진입했다. 이들은 군사분계선 남쪽 '돌아오지 않는 다리'로 가는 도로변 두 개의 북한 측 초소에서 차단기들을 제거하고 문제의 미루나무에 도착해서 나무를 잘라내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미 7함대 소속의 항공모함 미드웨이 전투단이 동해를 북상하여 북한 해역으로 이동했고, 미 본토에서는 F-111 전폭기 20대가 날아왔다. 또 괌에서 B-52 폭격기, 오키나와에서 발진한 F-4 팬텀 전투기 24대가 한반도 상공을 선회했다.
미국은 교전 상황에 대비한 구체적 전쟁계획인 우발계획까지 만들어 놓고 있었다. 이 계획에 따르면 교전 사태가 발생할 경우 한국군과 미군 포병이 개성 인근의 인민군 막사에 대한 포격을 시행하고, 전쟁이 확대될 경우 개성과 연백평야에 대한 탈환, 북한군 기갑부대가 남진할 경우 전술핵의 사용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오전 7시 48분 미루나무는 밑동만 남기고 완전히 제거됐다. 이날 정오, 군사정전위원회 북측 수석대표 한재경 소장은 김일성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명의의 구두 메시지를 UN사 측에 전달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이번에 사건이 일어나서 유감"이라는 김일성 주석의 메시지를 사실상의 사과로 받아들인 미국이 사건을 일단락 지으면서, 휴전 이후 최대의 전쟁위기를 맞았던 한반도는 파국의 위험에서 벗어났다. 이 사건 이후 쌍방은 판문점 공동경비지구를 남과 북으로 분할경비하기로 합의하고, 군사경계선을 표시로 북한군과 유엔군이 각각 경비 책임을 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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