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Q의 '정신승리법', 패배만 하는 한국 진보의 길?

[서평] 중국 '신좌파'의 리더 왕후이의 <아Q생명의 여섯 순간>

등록 2015.09.07 13:38수정 2015.09.07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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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의 <아Q정전>은 살아있는 고전이다. 가오이한이라는 중국 비평가는 어느 글에서 한 친구가 <아Q정전>을 읽으면서 소설이 흡사 자기 자신을 묘사한 것처럼 느꼈다고 말했다고 한다. 아Q 이야기를 쓴 작가가 누구인지 수소문하려 했다는 일화에서 아Q 이야기가 갖는 보편성의 힘을 읽게 된다.

아Q는 비겁으로 나약을 감추는 우리들의 모습과 흡사하다. 아Q식의 정신승리법이 갖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실패를 부정하는 것이다. 실패가 끊임없이 몰려올 때, 정신승리법은 아Q에게 그것을 부정하는 강력한 심리 기제를 제공한다. 현실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핑곗거리부터 찾는 우리가 그렇지 않은가.


비평가들은 아Q 특유의 정신승리법을 보면서 인간의 보편적 형상을 떠올렸다. 지난 100여 년간 이뤄진 <아Q정전> 논의의 초점도 정신승리법에 놓였다. 중국 신좌파의 리더인 저자 왕후이(汪暉, 1959~)의 기본 전제 역시 아Q의 정신승리법이 중국인의 민족적 병폐를 집중적으로 표현했다고 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책 <아Q생명의 여섯 순간>에서 그런 기본 전제 외에 루쉰이 아Q를 통해 보여주려고 했던 어떤 '가능성'을 찾아보려고 했다. <아Q정전>을 1922년 신해혁명에 대한 '비판적 오마주'처럼 제시함으로써 중국 민족의 가망 없는 '국민성'과 함께 미완의 혁명에 대한 바람을 제시했다.

"나는 분석의 초점을 정신승리법의 우연한 효력 상실에 두고, 아Q의 인생과 그의 성격·운명에 내재된 여섯 가지 주요 순간을 중점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중략) 이러한 순간은 아Q가 자아통제를 상실하는 순간일 뿐만 아니라 정신승리법이 효력을 상실하는 하나의 찰나이기도 하다.

그러나 루쉰은 늘 그런 순간을 은근슬쩍 언급만 하고 지나갈 뿐이다. 이러한 순간을 모두 합친다 해도 1분을 초과할 수 있을지는 나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순간이 아Q와 혁명의 관계해석에 지극히 중요한 요소일 뿐만 아니라 아Q의 인생을 이해하는 측면에서도 필요불가결한 요소임을 확언할 수 있다."(본문 70~71쪽)

저자가 본 "아Q생명의 여섯 순간"은 '실패의 고통', '어디로 가야 할지 모름', 성과 기아, 생존본능의 돌파, '무의미함', 죽음 등이다. 저자는 정신승리법이 효력을 상실하는 이 여섯 순간을 하나하나 분석한 뒤 "<아Q정전>이 정신승리법의 전형을 창조했다고 말하기보다는 정신승리법을 돌파할 계기를 제시했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 것"(122쪽)이라고 보았다.


정신승리법이 효력을 상실하는, 전체로 보면 채 1분도 되지 않는 그 "미미한 (여섯) 순간들이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인간으로서 아Q를 우주 공동(空洞)의 깊은 곳에 아로새겨 놓았다"(123쪽)고 평가했다.

저자가 <아Q생명의 여섯 순간>에서 어떤 '가능성'을 읽어내려고 하는 까닭은 "중국인의 '바탕색'을 찾아 중국의 '이야기'를 다시 빚어내고 중국의 '문제'에 주목"(9쪽)하기 위해서였다. 루쉰은 <'외침' 자서>라는 글에서 20세기 초반의 중국인을 외부와 단절된 '철의 방'에서 자기가 죽는 줄도 모르고 죽어가는 잠에 취한 사람으로 비유했는데, 저자는 오늘날 중국과 중국인이 1세기 전의 그런 상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1세기 전의 루쉰이나 저자의 문제의식은 중국에 국한되지 않는 것 같다. 1925년 5월 30일, 중국 상하이에서 '5.30 참사'가 일어났다. 일본인 방적 공장에서 탄압을 받던 노동자들이 학생들과 연대해 시위를 벌이던 중 영국 경찰이 총격을 가해 13명이 죽고 수십 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이었다. 참사 후 루쉰은 한 평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 나라가 쇠퇴할 때가 되면 언제나 의견이 서로 다른 두 부류가 나타난다. 하나는 민기론자(民氣論者)로 국민의 기개를 중시하고, 또 하나는 민력론자(民力論者)로 국민의 실력을 중시한다. 전자가 많으면 국가가 끝내 쇠퇴하고 후자가 많으면 국가가 장차 강성해진다. 안타깝게도 중국에는 역대로 유독 민기론자만 많았는데,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와 같다."(본문 142쪽)

5.30 참사와 이에 대한 루쉰의 평설을 보면서 우리 시대의 '진보'를 떠올려 보았다. 한국의 '진보'는 '민기론자'일까, '민력론자'일까. 루쉰은 평설의 끝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다.

"중국의 정신문명은 일찌감치 총포에 패배했으며, 수많은 경험을 거쳐 이미 가진 것이라곤 여전히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중략)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이전의 희망 이야기는 전부 쓸어버리고, 그 누구의 것이든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가면은 모두 찢어버리고, 그 누구의 것이든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수단은 모두 배척해야 한다.

요컨대 중화 전통의 약삭빠른 재주는 모두 내던져버리고 자존심을 굽힌 채 우리에게 총격을 가하는 양놈을 배워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새로운 희망의 새싹이 돋기를 바랄 수 있다."(본문 143쪽)

저자는 루쉰의 '민력론'과 연결되는 '생명주의'를 강조하면서, 생명주의가 구차하게 생존을 추구하는 철학이 아니라 '존엄의 정치'를 생산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실력 있는 진보', 그리하여 '승리하는 진보'를 위해 "자존심을 굽"히는 일이 '존엄의 정치'를 구현하는 길이라고 말하면 자칭 '진보주의자'들이 어떻게 대꾸할까.

저자는 아Q가 보인 자아 각성의 순간들에 눈길을 주었다. 그러나 그 시간은 모두 합해 봐야 채 1분이 되지 않았다. 아Q는 나머지 대다수 시간을 정신승리법의 늪에 빠져 지내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진보 민기론자'가 그런 아Q와 비슷한 운명의 길을 걷지 않을까. 무기력하고 분열하는, 그리하여 번연한 '패배'의 길을 걷는 한국 진보의 내일을 우울하게 그려보게 되는 책이다.
덧붙이는 글 <아Q생명의 여섯 순간: 왕후이의 아Q정전 새로 읽기>(왕후이 지음, 김영문 옮김 / 너머북스 / 2015.8.25. / 264쪽 / 1만6000원)
이 글은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싣습니다.

아Q 생명의 여섯 순간 - 왕후이의 아Q정전 새로 읽기

왕후이 지음, 김영문 옮김,
너머북스, 2015


#<아Q생명의 여섯 순간> #루쉰 #<아Q정전> #정신승리법 #한국 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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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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