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콘서 나선 주철희 박사는 일본의 군국주의 회귀는 1945년 8월 25일 정오 일황이 히로히토 항복문서에서 시작되었다고 강조했다.
심명남
- 오병종(아래 오PD) : 저자를 소개해 달라."여순사건을 조명한 <불량국민들>을 펴낸후 이번에 또 책을 출간하게 됐다. 현재 순천대학교 지리산권문화연구원 여순연구센터장을 맡고 있다."
- 오PD : 여순연구센터는 어떤 곳인가. "여순사건은 우리지역에서 부정적인 인식을 많이 갖고 있다. 그런데 실제 연구자들의 연구는 굉장히 많이 진보해 있다. 다만 일반 대중들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 연구는 두 가지다. 여순사건을 통한 국가폭력과 지리산과 관련된 빨치산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전남동부지역의 근현대사가 집중 관심분야다."
- 오PD: 이 책도 광복70주년에 맞췄을 텐데 약간 늦었다."일찍 내려고 했는데 조금 늦은 감이 있다."
- 오PD: 책 속에 여수의 역사가 오롯이 담겨 있다. "여수라는 지명은 한때 사라졌다 등장했다. 지금으로부터 118년 전이다. 현재 여수시민의 날(10월 15일)은 여수면이 여수읍으로 승격된 날이다. 여수시민의 날을 바꾸자는 의견이 많은데 여수라는 지명이 없어졌다 다시 복원된 1897년 5월 16일을 여수시민의 날로 바꿨으면 좋겠다. 이 날은 잃어버린 여수를 찾은 날이라 훨씬 의미가 크다."
- 오PD: 여수 와서 돈자랑 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어원이 뭔가."순천 가서는 인물 자랑, 벌교는 주먹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왜 그럴까. 여수서 돈 자랑 말라 하면 1970년대 밀수가 연상되는데 실제 여수에서 돈 자랑 말라는 것은 일제강점기 때 생겨난 말이다.
이말은 원래 여수가 아닌 거문도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당시 거문도에 관해 일본인이 쓴 책을 보면 거문도는 개들도 지폐를 물고 다녔다고 쓰여 있다. 거문도에 고기가 많이 나면서 돈이 많았다. 그것은 수산업인 제빙업이 발달한 탓이다.
아무리 좋은 고기를 잡아도 냉동하지 못하면 썩어버리기 때문에 제빙업이 여수까지 성행했다. 특히 1930년 여수는 전라선 열차가 개통되어 시모노세키까지 정기 연락선이 다녔다. 기후가 온화해 일본인이 굉장히 많이 이주했다."
- 오PD: 책에 다카세 농장(고뢰농장)이 등장한다. "여수의 3지역(관기뜰, 화양뜰, 대포뜰)이 있다. 이곳은 고뢰농장에서 매입해 만들어진 농장이다. 고뢰농장은 1911년 여수에 진출했다고 기록되나 훨씬 일찍 들어왔다. 30년 전인 1881년이다.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은 12개 조항인데 우리가 모르는 내용이 하나 있다. 일본의 침탈의도가 숨어있다. 이 조약을 체결하자말자 일본이 황해도 은율군에 부전농장을 세웠다. 이는 우리나라를 수탈하기 위해 조약을 체결한 거였다. 3년 후 여수에도 고뢰농장을 세웠다. 고뢰농장으로 많은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그 기지가 여수의 다카세 농장이다."
여수에 강제 징용된 중국인 노동자 '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