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돈 만원 게스트하우스, 조건은 하나

전남 제일의 닷새장, 순천 아랫장

등록 2015.09.20 10:03수정 2015.09.23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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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제일의 닷새장, 순천 '아랫장' ⓒ 김종성


이름이 순천(순할 順, 하늘 天)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유순하고 도리를 알 것 같은 도시 전남 순천. 이곳엔 '아랫장'이라는 재미있는 이름의 닷새 장터가 있다. 상설시장이 아니라 5일에 한 번씩 열리는 시장이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 '웃장'도 있다. 아마 전국 닷새장터 가운데 제일 쉽고 정다운 이름이 아닐까 싶다. 인기 아이돌 그룹 EXID의 '위 아래'는 섹시하지만 순천의 웃장, 아랫장은 정겹기만 하다. 원래이름은 북부시장, 남부시장이었다가 웃장, 아랫장으로 불렀다는데 잘 고친 것 같다.

이외에도 순천엔 상설시장으로 역 앞에 있는 역전시장과 원도심에 있는 중앙시장까지 총 4개나 있다. 이마트, 홈플러스 등 너덧 개나 있는 대형마트가 있음에도 여러 시장이 공존하고 있는 보기 드문 도시이기도 하다. 순천의 시장 가운데 매 2일과 7일 날 열리는 아랫장 구경을 갔다(웃장은 매 5일과 10일에 열린다). 전남 최대의 닷새장으로 남도 4대 장이자 전국적으로도 알아주는 풍성한 장이다. 순천뿐 아니라 고흥과 광양, 여수 등 인근 지역에서도 장을 보러 올 만큼 아랫장은 크고 다채로웠다.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기차여행을 즐길 수 있는 남도해양열차 (S-train) ⓒ 김종성


'내일로' 여행자들의 성지, 순천

대전, 전주, 곡성을 지나 여수까지 가는 남도해양열차(S-Train)을 타고 순천으로 향했다. 이 열차는 기차도 하나의 여행 혹은 여정이 되게 해준다. 객차 한량에 편안히 앉아 차를 마실 수 있는 다례실이 있어 꼭 들르게 된다. 2천원이면 마실 수 있는 녹차도 있어 가격 부담도 덜하다.

순천역에 내리니 낯선 풍경이 여행자를 맞이했다. 웬 20대 젊은이들이 홀로 혹은 삼삼오오로 역 대합실과 광장에 가득하다. 여름 휴가철도 아닌데 웬 청년들이 이리 많을까 했는데, 알고 보니 순천은 '내일로' 여행자들의 필수 여행코스란다. '내일로'는 철도공사가 만든 티켓으로, 28살 이하만 이용할 수 있는 자유석·입석 전용 무제한 철도패스다. 내일로 패스 5일권은 5만6500원, 7일권은 6만2700원이다.

KTX를 제외한 전 열차를 무제한으로 탈 수 있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20대 청년에게 닷새나 일주일 동안 전국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것은 큰 매력이다. 일정 금액을 주면 유럽 전역을 기차를 타고 돌아다닐 수 있는 유레일 패스와 비슷하다. 이 패스를 들고 전국을 여행하는 젊은이들을 '내일러'라고 부른다. 더불어 내일러들은 지역 소도시의 맛집, 관광지 사진을 찍어 실시간으로 SNS에 퍼나르는 홍보대사이기도 하다.

여행자의 편안한 쉼터가 된 순천역 앞 광장. ⓒ 김종성


'내일러'들의 성지가 된 순천, 도시가 한결 활기차졌다. ⓒ 김종성


'내일로' 기차여행은 새로운 여행문화를 형성하면서 국내 배낭여행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전남 순천과 충북 단양, 경북 안동 등은 도시가 훨씬 활기차졌고 지역상권 활성화 효과까지 거두고 있단다. 자동차와 달리 기차 타고 온 젊은 여행자들은 순천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SNS나 블로그에서 알게 된 순천 곳곳의 명소들을 버스나 택시를 타고 오가기 마련이니 그럴만했다.


순천시의 노력도 돋보였다. 넓지만 썰렁했던 역 앞 광장은 쉬어가기 좋은 정원처럼 꾸며놓았다. 역 앞 광장에 자전거 보관소와 대여소가 있는데 자전거 하루 대여료가 무려 천 원이었다. 순천은 너무 크지도 그렇다고 너무 작지도 않은 도시라 자전거로 돌아보기 좋은 곳이다. 순천만 자연생태공원으로 흐르는 동천에도 자전거길이 나 있다. 역 광장에 있는 널찍한 관광안내소도 오후 10시까지 운영한다. 순천역 주변 거리는 과거 역 앞의 칙칙한 구도심 풍경에서 젊음의 거리로 변해가고 있었다.

역 주변 골목에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저렴한 숙소인 게스트하우스들도 많이 생겨났는데, 특히 순천시내의 모텔들이 게스트하우스로 바뀌고 있단다. 순천역 앞 어느 게스트하우스는 내일로 패스를 소지한 손님에게 하루 만 원의 숙박비를 받고 있었다. 게스트하우스는 여행자들이 도미토리 형태의 방에서 자면서 휴게실과 식당을 공유한다. 자연스럽게 여행 정보를 나누고 동행을 만날 수 있어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한다.


순천을 품고 흐르는 정겨운 하천 동천가에 아랫장이 열린다. ⓒ 김종성


전남의 으뜸 닷새장, 순천 아랫장

순천역은 도시와 외떨어진 기차역이 아니라 더욱 좋다. 순천만 자연생태공원을 향해 흘러가는 정겨운 하천 동천, 역전 시장과 5일장인 아랫장 등이 가깝다. 순천역에서 동천쪽으로 10분 정도만 걸어가면 풍덕교라는 다리가 나오는데 이 다리만 건너면 아랫장(순천시 풍덕동)이 시작된다.

전남 제일이라는 닷새장인 아랫장엔  먹거리, 살거리, 구경거리가 넘친다. 장이 도로변, 주택골목까지 점령했다. 좀처럼 교통체증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통팔달의 도시 순천에서 장날만큼은 차가 막히고, 사람이 붐비는 진귀한 풍경이 펼쳐진다. 주말에 닷새장이 열리면 그야말로 미어터진다고. 그래도 오일장이 열리는 날은 불편하기보다는 구경하는 재미가 더 쏠쏠하겠다.

순천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면 하나의 큰 축제처럼 정말 많은 사람들이 운집한다. 이처럼 규모가 크다 보니 장날이면 다른 순천의 시장은 휴업할 정도. 인근의 구례, 보성, 하동, 진주에서 오는 상인과 주민까지 약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는다고 한다. 해산물과 공산품, 약재 등 다양한 물건들이 총집합하고 곡물 시장과 수산시장도 따로 있다. 매 2일과 7일에 열리는 아랫장은 그야말로 난전의 천국이다. 남도 각 가정의 풍요로운 밥상과 남도 식당들의 인심은 이 풍성한 장터에서 나오지 싶다.

이름도 정다운 닷새장 '아랫장' ⓒ 김종성


주민들, 상인들이 질펀하게 나누는 남도 사투리에 더욱 흥미로운 장터. ⓒ 김종성


먼저 아침 겸 점심으로 무얼 먹을까 두리번거리며 시장통 안으로 들어갔다. 시장통 양편에서 들려오는 주민들과 상인들의 질펀한 대화소리에 남도에 왔구나 실감이 들면서 배실배실 웃음이 났다.

"워메, 그러니까. 내 말이 그런당께"
"아따메 징허요. 참말로 지랄맞당께"

대학시절 동아리 활동을 하다 눈이 맞아 한 여학생을 사귀게 되었다. 그녀의 집은 전남 광주였지만 서울말을 자연스럽게 쓰길래 그러려니 했다. 광주에 산다고 다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건 아니니까. 어느 날 공중전화박스에서 그녀가 광주에 사는 가족들과 통화하는 걸 듣게 되었다. 가녀린 몸매에 오목조목한 입술에서 나오는 질펀한 남도 사투리에 그만 놀라 몸이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첫사랑 이야기가 나오는 영화 <건축학 개론>의 수지가 전라도 사투리로 얘기를 한다고 상상하면 된다(실제로 수지의 고향도 전남 광주다). 나이를 먹을수록 남도 사투리가 정답고 친근하게 느껴지게 되었지만, 서울에서만 갇혀 살던 갓 스무 살 청년에게 일종의 문화적인 충격이었다. 지나고 보니 그건 아마도 시대의 상황과 관련이 깊지 싶다.

갓 튀겨낸 뻥튀기처럼 구수한 웃음을 지닌 뻥튀기 장수 아저씨. ⓒ 김종성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정적 김대중을 극복하기 위해 시작된 전라도 사람 차별 정책은 전라도 말에도 이어졌다. 흔하게 들리던 경상도 사투리와 달리 전라도 사투리는 TV나 라디오에 나올 수 없었고, 가끔 나오더라도 주로 조폭이나 사기꾼들이 쓰는 말로 나오곤 했다. 그런 일이 권력층에 의해 수십 년을 이어지다보니 나도 모르게 전라도 말에 거부감을 갖게 된 것이다. 요즘 연예인들이 TV에서 전라도 사투리를 자연스럽게 말하게 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부부처럼 가까운 사이가 된 연인이 방귀를 트듯, 말을 튼 우리. 얼마 후, 나도 "음마? 고건 뭐더게(무엇하게) 물어봐싸?" 정도의 남도 사투리를 구사할 무렵 그녀를 따라 광주 집에 놀러갔다. 넙죽 첫 인사를 드리자 "밥은 묵었는가?" 물어보시던 어머니. 푸짐하게 한상 차려주시면서 했던 말은 오래 가슴속에 남는다.

"차린 게 없어서 미안시러와 어찌까."

아랫장의 이채로운 먹거리들

천정이 있는 장옥시장 가운데 식당들이 모여 있었다. 닷새장에 오면 보통 장터국밥집을 찾게 되는데, 지글지글 소리와 냄새에 맨 먼저 눈길 가는 곳이 전 가게였다. 호박전, 파전, 버섯전, 산적... 그 가운데 노랗게 계란을 입힌 전이 유난히 크고 두꺼워 물어보았다. 이름 하여 '명태대가리전' 순천 아랫장에서만 먹어 볼 수 있는 주전부리다.

보통 명태 살로만 하는 생선전과 달리 명태의 대가리로 전을 부친다(명태 갈비살전도 있다). 생선 맛도 맛이지만 명태 대가리 살 발라먹는 재미가 제법이다. 바지락 조개를 부친 바지락전도 침을 삼키게 했다. 모두 2500원으로 값도 싸다. 건너편 가게의 국수집 짜장면은 2500원, 짬뽕은 3500원이다.

순천 아랫장에서만 먹을 수 있는 두툼한 '명태 대가리전' ⓒ 김종성


아랫장의 이채로운 먹거리 가운데 하나인 찔룩게(칠게) 튀김. ⓒ 김종성


명태 대가리전, 바지락전 만큼이나 처음 본 음식이 '찔룩게 튀김'이다. 찔룩게는 칠게의 남도 사투리로 순천만 갯벌에 서식하는 짱뚱어와 함께 순천만의 별미란다. 게장과 볶음 등 다양한 요리로 즐겨먹는 찔룩게는 일반 게와 달리 튀김으로 껍질 채 먹을 수 있어서 칼슘과 키토산을 그대로 섭취할 수 있어 좋다고.

게장을 잘 안 먹는 내게도 찔룩게 튀김엔 젓가락이 자꾸만 갔다. 단 돈 만 원도 안 되는 값에 명태전, 찔룩게 튀김에 막걸리까지 배불리 먹었다. 저렴한 가격에 잘 먹었다고 돈을 내며 인사치례를 했다. 전 집 아주머니의 남도 사투리가 정겨우면서도 쿨하다.

"맛있게 먹어주면 그것으로 그만이제."

삶은 그 터의 기운을 받는다고 했던가. 시장통 한구석에서 주민들이 가져온 각종 곡식을 튀겨내고 있는 뻥튀기 장수 아저씨. 수십 년간 닷새장을 돌아다니며 곡식을 튀겨온 아저씨는 때 묻지 않고 순박한 인상이 푸근하고 천연스러웠다. 사진 모델 부탁에도 어색해 하지 않고 갓 튀겨낸 뻥튀기처럼 구수하고 따스한 웃음을 보여 주셨다. 국밥골목으로 유명한 닷새장 '웃장'은 또 어떤 정경을 보여줄지 궁금하기 만한 순천여행이다.
덧붙이는 글 ㅇ 지난 9월 2일에 다녀 왔습니다.
#순천여행 #아랫장 #오일장 #찔룩게 튀김 #명태대가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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