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면영웅을 기다리는 시대, 우리는 불행하다

[국수로 만나는 세상 ①] 복면고수

등록 2015.09.26 19:38수정 2015.10.15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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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지난 4월, 7백만 자영업자 대열에 합류한 초보 국수장사입니다. 새로운 길에서 새로운 세상을 봅니다. 몰랐던 부분을 새롭게 알게 되며, 깊숙히 숨어 있던 실체를 만나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를 이곳 '국수로 만나는 세상'에 풀어 놓겠습니다. -기자 말


'휘리릭~.'

그가 던진 표창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발 앞에 떨어졌다. 복면을 한 그는 스쿠터를 탄 채 한 손으로 목표물을 향해 정확하게 표창을 날린다. 그는 늘 그랬듯이 오늘도 역시 검은 옷에 검은 스쿠터를 타고 나타나 뒷모습만 보인 채 유유히 사라졌다. 그의 별명은 '복면고수'다

발 앞에 떨어진 표창을 주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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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수광고(매일 날아 드는 표창?) 재미로 하나 둘 모으기 시작한 것들이 이리 많다. 종류도 많고 디자인도 참 가지가지다. ⓒ 전병호


'아낌없이 주는 대출' '돈 빌려 드립니다.' '급전 일수 3%' '당일 즉시 대출' '낮은 신용도 가능' '무담보' '무보증' '신용불량자 가능' '업소 종사자, '자영업자99% 대출' '100% 비밀보장' '신분절대보장' '조기 상환 시 이자감액' '급한 돈 저이자'

복면 쓴 그의 정체다.


국숫집 사장이 된 후 새롭게 접하는 것 중에 하나가 시시때때로 나타나는 복면 쓴 사내들이다. 뜻밖에 이 나라에는 복면 쓴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전에는 알지 못했다. 수시로 국숫집 앞을 지나다니는 그들을 보면서 어릴 적 열광했던 복면 쓴 영웅들이 스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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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면고수 그들은 하나 같이 표창의 고수들이다. 한 손으로 스쿠터를 운전하면서 한 손으로 던지는 표창은 목표물에 정확하게 도착한다. ⓒ 전병호


"이 도적놈의 세상~ 지금부터 내가 직접 응징한다."

복면을 쓰고 탐관오리들을 직접 혼내준 '의적 일지매'는 어릴 적 내 우상이었다. 일제강점기 억눌린 백성들의 원한을 탈을 쓰고 혼내주었던 허영만의 만화 <각시탈>의 주인공은 당당하게 TV 드라마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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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면영웅 복면 영웅들은 어릴 적 내 우상들이다 ⓒ 인터넷 화면 갈무리


이렇게 멋진 복면 속 영웅은 비단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검은 복면에 망토를 걸치고 나타나 악당을 물리치는 '쾌걸 조로'가 있었고, 어디선가 무슨 일이 생기면 멋진 배트카를 타고 나타나는 '배트맨'도 있었고, 으슥한 골목에서 약자를 괴롭히는 못된 악당을 거미줄을 타고 내려와 혼내주는 스파이더맨도 있었다.

복면영웅이 필요한 시대는 불행한 시대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복면 쓴 이들이 활약하는 시대는 비정상적이고 불행한 시대다. 우리가 알고 있는 복면 쓴 영웅들이 살던 시대는 모두 그랬다. 법과 제도, 사회규범이 상식적으로 작동 되는 사회에서는 굳이 영웅들은 복면 속에 숨을 필요가 없다. 멀쩡한 얼굴을 감추고 활약해야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돈과 권력을 가진 악의 무리가 힘없는 약자들을 짓밟고 괴롭히는 시대, 정의는 피하고 불의를 보고도 참아야 하는 암울한 시대, 우리들의 영웅은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해 복면을 쓰고 나타났다. 탐욕과 부정부패에 얼룩진 부조리한 세상, 아무도 나서지 않을 때 혜성처럼 나타난 복면 영웅은 우리를 환호케 했다. 아마도 악당을 물리치고 정의가 승리하는 것에서 찾는 대리만족이거나 불편한 현실에 대한 심리적 도피처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리라. 그렇다고 암울한 시대에 복면 쓴 사람이 모두 영웅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복면을 쓴 목적이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해서라면 영웅이 아니라 그저 도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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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면가왕 사람들은 복면 속 실력파 가수들에게 열광한다. ⓒ MBC <복면가왕> 갈무리


최근 화제가 되는 예능 중에 <복면가왕>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오로지 노래로만 겨뤄 누가 잘했는지 가려내는 것이 규칙이다. 이런 프로그램에 열광하는 이유 또한 현시대상황의 반영이라는 생각이다.

외모지상주의를 말하지 않더라도 비주얼 안 되는 사람은 아예 가수 되기를 포기하라는 말은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미디어가 주도하는 세상에서 실력보다는 실력 외적인 것이 중요해지기 시작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제 얼굴 한두 군데 성형은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이 일상화 된 지 오래다. 복면가왕에 나오는 가수들은 대부분 저평가 되거나 의외의 인물들이 많다.

노래를 아무리 잘해도 외모나 그동안 이미지로 인해 실력이 저평가 된 가수들은 복면가왕에 나와 자기 자신의 참모습을 보여 주며 관객들에게 놀라움과 색다른 감동을 전해준다.

"어라! 저 사람이 저렇게 노래를 잘했어?"

가면을 벗고 나타난 반전에 사람들은 마치 영웅을 만난 듯 열광한다. 심란한 세상 영웅을 기다리는 마음속에 대리만족을 넣어 주는 것이다. 법망을 피해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악의 무리를 검사는 복면을 쓰고 주먹으로 해결한다는 <복면검사>라는 드라마의 출현도 이와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국민소득 3만 불을 바라보는 OECD 선진국 대한민국. 대한민국에 복면 쓴 이들이 빈번하게 출몰하는 것은 이 나라가 여전히 비정상적이고 불행한 나라라는 반증이다.

'일수, 달 돈, 100% 누구나 대출!'

고금리 사채라고 할 수 있는 일수 이용자가 이리 많다는 것은 분명히 이 사회가 아프다는 증거다. 사상 최저의 1%대 초저금리 시대에도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게 은행의 높은 문턱은 그림의 떡일 뿐이다. 돈 없고 '백' 없는 서민들에게 당장 생계유지를 위해 일수는 좋든 싫든 여전히 버팀목이 된다. 많은 서민이 고금리의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일수'에 의지해야 하는 현실이 국민소득 3만 불에 가까워진 대한민국의 현재 자화상이다.

나는 지금 영웅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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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수, 달돈 힘없는 서민이 기댈 수 있는 곳이 일수밖에 없는 사회는 과연? ⓒ 전병호


세월호, 메르스, 초기대응 실패, 예고된 인재, 경기침체, 위기의 자영업자, 가계부채증가, 전셋값 폭등, 출산율저하, 삼포 세대, 자살률 1위, 행복지수 꼴찌, 헬조선…. 최근까지 이어진 신문 머리기사들이다. 듣기만 해도 머리가 아파오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하루의 문을 여는 아침, 오늘도 역시 복면고수는 나타났다. '복면고수'의 뒷모습을 보며 문득 정의의 이름으로 악의 무리를 응징해 줄 '우리들의 영웅은 어디에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렇게 하루하루 복면 영웅을 기다리는 것은 비단 나만의 마음일까? 영웅이 나타나지 않는 시대 나라도 복면을 쓰고 싶어지는 아침이다.

'휘리릭~.'

공상을 하는 사이 표창은 어김없이 발 앞에 날아든다.

'일수, 비타민 같은 일수대출.'

공상은 깨지고 또 다시 열린 하루를 시작한다.

 "그나저나 오늘은 장사가 잘 돼야 할 텐데…."
#국수만세 #복면영웅 #복면곡수 #일수 #대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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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공작소장, 에세이스트, 춤꾼, 어제 보다 나은 오늘, 오늘 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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