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백의 꿈, 커닝 때문에 무너졌습니다

[공모-도둑들] 가족의 박장대소를 불러일으킨 내 인생의 최초의 도둑질

등록 2015.10.01 17:51수정 2015.10.01 17:51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경기도 광명에서 서울 강남으로 이사하고 나서 얼마 안 돼서였다. 1980년대 후반, 내가 초등학교 2학년, 언니는 5학년이었을 때였다. 우리 집에 놀러온 어떤 분께서 언니와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강남 애들은 공부 잘하는데, 너희처럼 변두리에서 온 애들이 잘 버틸 수 있을까 모르겠네." (지금 생각해보면 엄청난 지역차별을 조성하는 말도 안되는 멘트!) 

어렸을 때의 기억이지만, 자존심이 많이 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고보니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은 언니와 나 뿐이기는 했다. 동네의 수많은 아이들은 다들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엄마는 퇴근길,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우리를 불렀다. "집에 들어가자~" 나중에 엄마는 우리가 다 컸을 때 이렇게 말했다.

"너희만 놀이터에서 놀아서 안쓰러웠어. 그때 집 사느라 대출을 받아서 한 푼이 아까울 때였거든."

어쨌든 우리는 변두리에서 온 티를 내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자존심이 셌던 우리 언니는 기말고사 시험대비 문제집을 사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나도 덩달아 공부를 했던 것 같다. 강남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보는 첫 시험이었으니까.

답지 보고 베겨쓴 두 글자 '생략'


그런데 생각보다 공부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초등학교 1학년은 마냥 즐겁게만 보냈던터라, 학교 수업만 듣고 중간만 했었다. 물론 성적이 좋지 않으면 혼나기는 했지만 받아쓰기 외에는 딱히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나 부모님 모두 초등학교 선생님이어서 성적이 좋지 않으면 눈치가 보였기 때문에, 시험 때가 되면 으레 공부를 했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되고 중간, 기말시험을 보면서 (요즘 초등학교는 시험을 따로 보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성적관리는 해야 했다. 9살, 공부하는 것이 재밌을 나이는 아니니 나는 쉽다고 생각한 단원은 종종 답지를 베끼곤 했다. 나는 우리 집 '꾀보'였으니까.

그런데 이 답지를 베끼는 것이 후유증을 낳기도 했다. 국어 과목에 '짧은 글 짓기' 문제는 답지에 '생략'이라고 되어 있고 해설에 그 답안이 써 있는 경우가 있었는데, 나는 그 뜻을 몰라 '생략'마저 베낀 아이가 되었다. 채점하던 엄마와 옆에서 지켜보던 언니는 박장대소를 했고, 나는 해답지 베끼기 사건은 이렇게 '망신'으로 끝났다.

잘못된 도둑질 '커닝'... 결과는 처참했다

a

알송달송 수직선 문제 저를 시험에 들게 했던 문제가 바로 이런 문제입니다. 지금은 초등학교 1학년에서 주로 이런 문제를 푸나봅니다. ⓒ 강서희


초등학교 2학년 수학문제는 지금 들여다보면 하나도 어렵지 않지만, 당시 수직선 문제는 너무 어려웠다. 덧셈과 뺄셈 수식을 수직선에 표현하거나, 수직선에 표현된 덧셈과 뺄셈을 식으로 다시 표현하는 문제였는데 이 문제는 정말 자주 틀리기도 했다.

기말시험에 등장한 수직선 문제는 나를 또 시험에 들게 하였다. 아직도 문제가 기억난다. 3+2=5인 것인지, 5-3=2인 것인지 고민하던 나의 모습도 생각난다. 자신있게 답을 쓰고, 시험지를 제출하던 찰라, 옆에 앉아 있던 친구의 답이 보이고 말았다.

나는 순간 나의 답을 포기하고 빛의 속도로 지우개로 나의 답을 지운 뒤, 친구의 답을 썼다. 결과는 처참했다. 며칠이 지나고 시험지를 받아드는 순간 포기한 나의 답은 맞았고, 친구의 답은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강남 아이들(옆자리 친구)이 공부를 잘한다는 나의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그리고 우리 집에 왔던 말도 안 되는 그 분의 이야기를 나도 모르게 믿었던 것은 아닐까.

최초의 나의 커닝 사건은 막을 내렸다. 강남 전학 이후의 '올백'을 꿈꿨던 어린 시절의 꿈은 이 문제 하나로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나는 이 문제를 제외한 모든 문제는 모두 맞췄다. 심지어 내 초등학교 시절 중 가장 성적이 좋았던 때였다.)

9살의 아픈 기억은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를 부정행위의 시험에 들지 않게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어디에서도 '강남 아이들이 공부를 잘해'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상처난 자존심이 도둑질을 불러일으켰으니 말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기사공모 '도둑들' 응모글입니다.
#도둑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샌디에이고에 부는 'K-아줌마' 돌풍, 심상치 않네
  2. 2 황석영 작가 "윤 대통령, 차라리 빨리 하야해야"
  3. 3 경찰서에서 고3 아들에 보낸 우편물의 전말
  4. 4 '25만원 지원' 효과? 이 나라에서 이미 효과가 검증되었다
  5. 5 "윤 대통령, 류희림 해촉하고 영수회담 때 언론탄압 사과해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