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수난한스 멤링, '예수의 수난', 토리노 사바우다 미술관. 1미터 못되는 작은 화면에 23개에 이르는 예수의 수난 에피소드를 시간 순서로 배치해 놓았습니다.
박용은
1미터가 채 못 되는 그다지 크지 않은 화면에는 15세기 플랑드르의 복잡한 도시 풍경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도시 내부와 외곽 곳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죠. 그런데 자세히 보면 한 부분 한 부분이 모두 하나의 주제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에서부터 빌라도의 재판과 십자가 형벌, 부활까지 이어지는, 바로 '예수의 수난'입니다.
우선 수많은 에피소드로 구성된 예수의 수난을 하나씩 찾아보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성전에서 상인들을 몰아내는 예수, 유다의 배신, 최후의 만찬, 산상 기도, 로마 병사들에게 붙잡히는 예수, 빌라도의 재판, 채찍질 당하는 예수, 면류관을 쓰는 예수, 에케 호모(이 사람을 보라.),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십자가형, 십자가에서 내려짐, 무덤에 안치, 부활, 나를 만지지 마라 등 성경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탓인지 23개의 에피소드 중 내가 찾은 것은 이 정도입니다. 각각 하나의 화폭에 묘사해도 충분한 에피소드들을 이처럼 촘촘하게, 그것도 사실적으로 그려낸 한스 멤링의 솜씨가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한스 멤링은 15세기 중반, 플랑드르의 경제, 문화 중심지였던 브뤼헤(Bruges)에서 주로 활동했던 화가 중 한 명입니다. 당시 브뤼헤는 직물 생산과 교역을 통해 이룬 눈부신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한자동맹의 중심지로, 피렌체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문화 수도로 발돋움하고 있었죠.
이곳에서 얀 반 에이크의 혁신을 이어받은 한스 멤링은 유화 기법을 이용한 리얼리즘과, 이 그림처럼 한 화면에 여러 개의 복잡한 장면들을 구성하는 데 특별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또한 대부분 화려하고, 비교적 소형 패널로 제작된 그의 작품들은 가정의 개인 예배당에 소장하기에 안성맞춤이었죠. 그래서 한스 멤링은 당시 브뤼헤에 줄을 대고 있던 유럽 각지의 상인, 은행가 등 부르주아들에게 최고의 인기 작가로 대접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