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식당으로 이용한 곳, '세계기념물' 됐다

2016년 월드 트러스트 와치 50곳에 선정된 '심원정' 이야기

등록 2015.10.25 15:17수정 2015.10.26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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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만난 대만인 친구 렉스는 '세계 기념물 기금(WorldMonuments Fund)'에서 일한다. 역사학 박사인 그는 대만 행정부에서 일하다가 이곳에 스카우트되어 뉴욕에 입성했다.

하지만 친구인 나는 렉스가 정확하게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다. 만날 때마다 각종 아시아 역사를 줄줄줄 설명해주는 그의 머릿속 데이터베이스에 놀랄 뿐이었다. 어느 날, 그가 한국 관련 질문을 해왔다.

"심원정이라는 곳 들어봤어요?"
"모르겠는데요."
"한국 경상도에 있는 정자라는데 매우 아름답더군요."

한국보다 외국이 먼저 인정한, '심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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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원정 심원정 25영마다 조병선 선생이 이름을 새긴 각자 또는 표지석을 세워놓았다. ⓒ 한국 내셔널 트러스트


서울에서 나고, 서울에서 일을 해오며, 서울 밖 세상에는 문외한이었던 나는 렉스로부터 '심원정'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자연을 그대로 놔두고 약간의 변형을 가한 '닫힌 정원'같은 곳이라고 했다. 한국의 명소를 뉴욕의 역사학 박사에게 듣고 있는 상황은 재미있었다. 하지만 언제 가볼지 알 수도 없는 곳이라 그리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10월 중순 그에게 연락이 왔다. 반가운 목소리였다.

"우리가 진행하는 '월드 모뉴먼츠 와치(World Monument Watch·세계 기념물 감시)'에 한국 문화재가 들어가게 될 거예요. 기자회견에 오지 않을래요?"

지난 15일 '월드 모뉴먼츠 펀드' 사무실이 있는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에 올랐다. 이 단체가 올해로 50주년을 맞이했다는데, 렉스가 아니었다면 들어볼 일도 없었을 이름이었다.


건네받은 보도자료에는 '월드 모뉴먼츠 와치'로 선정된 50개 사이트의 리스트가 사진과 함께 나열되어 있었다. 렉스에게 얼핏 들었던 한국의 '심원정'을 빼고는 모두 다 낯선 장소였다. 한국·일본·대만 등 아시아뿐만 아니라 미국·영국·알바니아·칠레·쿠바·브라질·레바논· 이태리·모리셔스·그리스·수단·짐바브웨 등 리스트에 오른 나라들도 다양했다.

기자 회견은 버니 본햄 월드 모뉴먼츠 펀드 회장의 성과 보고로 시작되었다. 월드 모뉴먼츠 펀드는 자연재해나 사회적 변화로 망가져 가는 세계의 유적과 명승지 보존에 힘써온 단체였다.


50년 동안 그들은 세계에서 홀대받아온 유적들을 성공적으로 복원해왔다. 핵심 후원자인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American Express Card)'로부터 1600백만 달러가 넘는 지원금을 유치하는 등 재정에 도움을 주지만, 이들의 주요 업무는 '재정 지원'을 넘어 발굴과 발견, 홍보, 복원, 보존에 있다.

특히 1996년부터 주력 프로그램인 월드 모뉴멘츠 와치를 시작하며 2년마다 주요하게 도움이 필요한 장소를 선정해왔다. 선정 과정부터 보존에 이르기까지 그 지역의 지지 단체가 중심이 된다. 역사학자, 고고학자, 인류학자 등이 모여 그 장소를 두루 조사한 후 최종 심사를 거쳐 '월드 모뉴멘트 와치'로 선정하면 그곳은 지역 언론과 학계의 주목을 받는다.

이렇게 장소가 공개됐을 때 그 유명세를 노리고 테러 단체가 해당 장소를 파괴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런 역효과를 우려해 이들은 올해 발표에서 시리아와 이라크 쪽 선정 지역은 비공개로 남겨뒀다.

2016년 월드 모뉴멘츠 와치로 선정된 50곳은 다양한 위기를 겪고 있다. 자연 재해와 전쟁으로 훼손됐지만 지원을 받기 힘든 유적들을 포함해, 지역 사회에서 삶의 구조가 변하면서 철거 대상에 오르거나 재개발 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는다. 또 외딴곳에 떨어져 있어 소홀히 여겨지는 등 다양한 이유로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이 중 하나인 심원정은 한국 유적으로서 처음으로 선정된 곳이다. 렉스는 아시아 유적을 조사하던 중 대학 은사의 도움으로 시민 모금으로 문화유산 지역을 매입해 영구 보존하는 환경 문화 운동 단체인 '한국내셔널트러스트'와 연락이 닿았다고 했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올해 처음으로 월드 트러스트 와치를 알게 됐고, 복구에 힘쓰고 있던 심원정을 후보로 제출했다.

김금호 한국내셔널트러스트 국장은 기자와 나눈 이메일 대화에서 "심원정의 홍보와 국내의 보전 인식을 확산하고 세계적 관심을 모으려는 작업의 일환"이었다고 한다. 그는 또한 "심원정은 지난 1937년에 건립되어 비교적 오래지 않은 영남지역을 대표하는 원림(園林)이며 연도가 오래되지 않아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게다가 심원정 일부가 레스토랑으로 운영되면서 주변의 역사적 환경이 훼손 및 변질되는 상황을 맞기도 했다. 김 국장은 "이번 기회를 통해 심원정을 한국내셔널트러스트의 시민 유산으로 기증받아 건립 초기에 가깝게 복원하고, 영남의 역사문화공간으로 활용하고자 추천하게 됐다"며 추천 의도를 덧붙였다.

선비들의 무릉도원, 마침내 시민 유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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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원정 심원정 항공 사진 ⓒ 한국 내셔널 트러스트


발표 이틀 만인 지난 17일, 심원정을 소유한 '기헌선생기념산업회'는 '심원정 시민 유산 헌정식'을 개최해 심원정을 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 기증했다. 문화유산 및 자연환경을 훼손위기로부터 구하고 보존 작업을 하는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심원정을 복원해 나가는 한편 등록 문화재 지정 요청을 벌일 예정이다.

뉴욕에서 알게 된 이슈가 실시간으로 한국에서 마무리 되니 지켜보는 입장에선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심정원을 지켜내고자 노력했을까 헤아려보니 갑자기 먹먹한 감동이 밀려왔다.

렉스는 심원정을 두고 영어로 간단하게 '가든(정원)'이라고 설명했지만, 찾아보니 '원림'이라 불리는 장소였다. 경관이 좋은 자연에 약간의 인공물을 더해 정원을 꾸미는 방식으로, 심원정은 영남 지역에선 유일한 원림이라고 했다.

렉스는 또한 '심원(心遠)'이라는 말의 유래가 도연명의 시구에서 비롯되었다며 '마음이 욕심이나 욕망에서 멀어져서 평화로운 상태'를 뜻한다고 말했다. 기헌 조병선 선생에 의해 지어진 이곳은 속세를 떠난 선비가 자연 속으로 은둔하기 위한 무릉도원이었을까? 한국내셔널트러스트의 심원정 설명글을 읽으며 25개의 풍경으로 이뤄져 있다는 내부의 미학을 상상해본다.

"심원정은 경사지에 터를 닦아 정면 3칸과 측면 3칸 규모의 T자형 건물을 세우고 건물 주변에 토석담을 돌려 정사를 조성하였다. 심원정의 건립 기록인 <심원정수석기>(心遠亭水石記)에는 실내 5곳과 실외의 인공 및 자연 공간 20곳을 정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정해진 실내외 25곳 마다 그를 소재로 한 시가 전해지고 있다. (중략)심원정은 도연명의 전원사상과 주자의 성리학적 바탕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해온 선비의 '은둔과 수신의 공간'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월드 트러스트 와치는 직접적인 재정 지원을 하지 않는다. 이 단체는 정부나 단체에 보존의 중요성을 상기시키고 지지 단체가 원활하게 보존할 수 있도록 후원자를 연결해주거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함께 모색한다. 단체는 수많은 기업과 연구자들, 정치인들과 관계망을 형성해 그 정보와 인적 자원을 문화재 보존하는 데 쏟아붓는다.

이 과정을 잠깐이나마 지켜보며 깨닫게 된 사실은 유적이든, 명승이든 무언가를 소중한 걸 지키려고 노력을 할 때 전 지구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내전으로 얼룩진 아프리카 대륙이 문화재 보존에 힘쓸 여력이 있을까? 문화재가 많은 유럽이나 북미에선 상대적으로 덜 주목 받아 방치되는 문화재가 있다.

가치가 재평가되어야 하는 고성이나, 20세기 역사 연구를 위해 보존되어야 하는 지역도 있다. 특정 장소의 역사적, 인류학적 중요성에 공감한 전 세계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보존의 노력을 펼친다. 보존은 연구를 낳는다.

"이번 기회를 통해 한국의 정원 문화가 전 세계에 홍보되길 희망한다"는 김금호 국장의 바람은 불가능한 바람이 아닐 것이다. 심원정이 문화재 보존을 위한 국제적 협력의 바람직한 실례가 되어 앞으로도 더 많은 잊힌 유적들이 보존의 기회를 얻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심원정 #내셔널 모뉴멘츠 와치 #문화재 #한국 내셔널 트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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