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식 대자보', 작성하는 데 이틀 걸렸다"

[이영광의 거침없이 묻는 인터뷰 284] 연세대 대자보 작성자

등록 2015.10.22 15:56수정 2015.10.22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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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교과서 국정화 강행에 반대하는 청년들의 기발한 대자보가 화제다. 연세대학교 학생들은 박근혜 대통령을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에 비유해 비판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강행에 반대하는 청년들의 기발한 대자보가 화제다. 연세대학교 학생들은 박근혜 대통령을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에 비유해 비판했다.트위터 화면갈무리

12일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발표하자 야당과 시민단체는 강력 반발했다. 대학의 사학과 교수들은 집필거부 선언을 했고 대학생들은 대자보를 붙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일 SNS에서는 연세대에 붙은 한 대자보가 주목을 받았다. "민족의 위대한 령도자이신 박근혜 최고 지도자동지께서 얼마 전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선포하셨다"라고 시작하는 이 대자보의 제목은 '국정교과서 찬성하는 우리의 립장'이지만, 실제 내용은 북한 성명서를 페러디해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결정을 비꼬았다.

패러디도 패러디지만 표현이 재밌다. '력사에 길이남을 3.15 부정선거를 만들어내신 위대한 리승만 대통령 각하', '유신체제를 세워 대통령선거 제도 자체를 아예 없애버리신 박정희 대통령 각하' 등의 표현으로 과거 독재정권을 '디스'한다. 압권은 '분노와 경천동지할 불벼락으로 본때를 보여줄 것'이란 대목 아닐까? 북한 성명서에 자주 등장하는 '불벼락'을 하단에 배치에 '빅재미'를 줬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여 수소문 끝에 20일 대자보 작성자를 연세대에서 만나 대자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다음은 대자보 작성자와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평범한 대자보, 대중들은 관심 갖기 어렵다"

- 19일 '국정교과서 찬성하는 우리의 립장'이란 대자보가 주목을 받았어요. 아마 어느 정도 반응을 예상하셨을 것 같아요.
"사람들의 관심을 끌 줄은 예상했지만 이 정도로 반응이 폭발적이어서 기자들에게 연락이 올 줄 몰랐어요. 기분이 좋기도 했지만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던 것 같아요."

- 주위에선 뭐라고 해요?
"대단하다고 격려해주는 친구도 있고 어떤 친구들은 정부나 보수 단체는 별로 안 좋아하니 조심하라는 친구도 있죠."


- 대자보를 쓴 계기에 대해 "지금 국정화에 반대하는 여러 움직임이 있지만 큰 호응을 주지 못한다는 생각에 대자보를 썼다"고 하셨더라고요. 왜 그렇게 판단하셨어요?
"평범한 대자보도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해요. 거기 있는 메시지가 울림이 있는 것도 많아요. 하지만 일반 대중은 정치에 관심 없잖아요. 그러다 보니 평범하게 쓸 경우에 정치에 관심 없는 일반 대중이 관심을 가지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어요. 그래서 풍자와 함께 북한식 (화법)으로 쓰면 다른 사람들이 호응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얻으셨나요?
"우리나라에 보도된 북한 매체들을 보며 얻었어요."


- 한 번에 쓴 것인가요?
"이틀에 걸쳐 쓰고 중간에 단어만 고쳤어요. 같이 도와주는 친구들이 있거든요. 그 친구들이 편집하고 읽기 좋게 꾸며줬어요."

- 이틀이라면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요.
"대중의 시각에서 제 대자보를 바라보느라 좀 오래 걸렸던 거 같아요. 대중의 입맛에 맞아야 하니까요."

- 중간중간 빨간 글씨로 되어 있던데,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혹시나 사람들이 풍자한 걸 잘 모르고 '이 친구는 (국정화에) 찬성하네'라고 착각할까 봐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풍자하는 포인트를 빨간색으로 표시했어요."

- 대자보 아래에 '박정희 각하 탄신 98년'이라고 쓰신 건 어떤 의미인가요?
"지금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을 운영함에 있어서 아버지(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제사나 효도란 관점에서 국정을 운영하잖아요. 저는 진심으로 박 대통령 머릿속에는 서기 2015년이 아니라 박정희 탄생 98년이 있을 것으로 생각해요. 그래서 그렇게 쓴 거예요."

"일제강점기 때 역사교과서 있었다면 반드시 국정화했을 것"

-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배우는 학생들은 교과서마다 다르면 공부하기도 힘들 것 같은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역사를 왜곡하기 때문이에요. 일제강점기 때 역사교과서가 있었다면 반드시 국정화했을 거예요. (역사교과서가) 한 가지만 있으면 그것을 쓸 권한을 가진 사람 마음대로 (역사를) 쓸 수가 있어요. 권력자의 의도에 따라 쓰여질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나 국정화가 아니라 여러 권의 검인정 교과서가 있으면 권력자의 의도가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국정화에 반대하죠."

- 고2까지 보수적이었다고 들었어요.
"저희 집안이 보수적이에요. 그럼에도 보수적 입장에서 교과서를 보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거든요. 고2 때 담임 선생님 과목이 역사였거든요. 역사를 자세히 배우면서 보수적인 생각이 깨진 것 같아요. 그리고 고3 때가 선거 국면이었거든요. 당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를 좋아해서 그의 주장이나 토론을 보며 정치적인 각성을 하게 된 것 같아요."

- 역사를 자세히 배우며 보수적인 생각이 깨졌다고 하셨어요. 이전에 알던 지식과 얼마나 차이가 있었나요?
"저는 어렸을 적에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은 선이고 노무현, 김대중 대통령은 악이라고 생각했었어요. 누구보다 <조선일보>를 열심히 봤던 어린이였으니까요. 근데 어떤 대통령이든 공과 과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 처음엔 혼란스러웠을 것 같아요.
"네, 실제로 그랬었습니다. 상당히 혼란스러웠던 게 사실이에요. 그렇지만 그런 과정이 있었기에 흔들리지 않는 가치관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생겼다고 생각해요."

- 아버님이 보수적이라고 하셨는데 부딪히진 않나요?
"아빠는 보수적이긴 하지만 제 의견을 존중해 주시고 저도 아빠 의견을 존중해서 부딪히진 않아요. 예전엔 조금 부딪히긴 했어요."

- 아버님이 대자보 쓴 걸 아세요?
"네 알아요. 처음에 보여드렸어요. 그랬더니 재밌다며 '네가 열심히 한 거니까 네 뜻대로 해라'라고 제 의견을 존중해 주셨어요."

"메신저가 아닌 메시지에 주목해달라"

- '학생들이 덜 성숙했기 때문에 국정화를 해야 한다'는 주장에 "정부가 학생들을 너무 어린애 취급하고 있다. 4.19 때도 그렇고 5.18 때도 어린 학생들이 앞장섰다"고 반박하셨던데, 어쩌면 정부 입장에서는 그래서 더 국정화를 하려고 하지 않을까요(웃음).
"우리나라 학생들, 생각보다 똑똑해요(웃음). 현 정부가 아무리 역사를 자기 입맛에 맞게 바꾸려 하지만 끝끝내 학생들의 역사인식까지 바꿀 수는 없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전 우리나라 학생들을 믿어요(웃음)."

- 원래 시사 문제에 관심이 있었나요?
"네. 원래 관심이 있었지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2012년에 총선과 대선을 지켜보면서 정치적 의사 표현을 할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꼈어요. 왜냐면 정권교체에 대한 열망이 그렇게 강했음에도 결국 문재인 후보가 낙선했잖아요.

저는 그때, 정권교체를 바랐던 사람들이 그저 관망하는 지지에 그치지 않고 2002년 노사모처럼 옆 사람을 설득한다든지, 전화를 돌린다든지 실질적인 행동을 했더라면 분명 이겼을 거라 생각해요. 그래서 실질적인 행동, 실질적인 의사 표현이 중요하다고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고려대 학생 커뮤니티인 고파스에 올라온 게시글.
고려대 학생 커뮤니티인 고파스에 올라온 게시글.고파스 갈무리

- 고려대에도 비슷한 대자보가 붙었는데, 어떻게 보셨어요?
"저는 긍정적으로 봐요. 저는 제가 주목받는 걸 원하지 않고 제가 쓴 메시지가 주목받길 원해요. 또한, 점점 다른 사람들이 창조적으로 자기만의 메시지를 내놓길 원하거든요. 그런 관점에서 굉장히 좋다고 생각해요. 그런 메시지들을 대학생이 내놓으면 좋겠어요."

- 자신이 주목받는 걸 원하지 않고 메시지가 주목받길 원한다고 하셨잖아요. 익명으로 하신 것도 그런 맥락인가요?
"맞아요. 예전에 고려대의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 기억하시죠? 그게 처음엔 메시지가 주목을 받았잖아요. 그러나 나중에 관심을 못 받은 이유가, 보수언론이 메신저가 노동당이니 순수하지 못하다는 식으로 깠어요. 그래서 본질이 흐려졌거든요. 저는 그걸 반면교사 삼아서 만약 제가 주목받으면 메시지가 흐려진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메신저인 제가 아니라 메시지를 주목받게 하려고 익명으로 했어요."

-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겁쟁이라 피해 입을까 봐 이름 안 밝힌 건 아니냐'고 주장할 수도 있는데.
"그런 비판이나 지적이 충분히 타당하다고 생각해요. 다만, 이 메시지가 널리 퍼지고 다른 학생들도 메시지를 내놓는 과정이 끝나면 그때 제 이름과 이 대자보를 쓴 취지 등을 밝히려고 해요. 저는 때가 되면 신분을 밝힐 테니 기다려 주시고 각자의 메시지를 내놔 주시면 좋겠어요."

- 지금 상황으로 보면 국정화를 막긴 어려울 것으로 보이는데.
"이건 행정부에서 밀어붙이면 답이 없는 것이라 어쩔 수 없긴 하지만 그래도 저희는 역사가 왜곡되는 걸 막기 위해서 올해는 물론 내년과 국정화가 시행되는 2017년까지 계속 싸울 생각이에요."

- 야당의 대응은 어떻게 보세요?
"잘 대응하고 있는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문재인 대표가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 국정화 반대 목소리를 낸 것은 참 잘한 결정이었다고 봐요. 앞으로도 그런 울림을 주는 행보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대학생 내에서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대해 어떤 얘기가 있나요?
"같이 활동하는 친구가 150명 정도 있어요. 그 친구들 사이에서는 어떻게든 막자는 취지에서 여러 가지 서명운동도 받고 국정교과서 집필 참여를 거부한 연세대 사학과 교수님 있잖아요. 그분들을 응원하는 메시지도 받아요. 다만 일반 학생들 쪽에서는 아직 관심이 덜한 것 같아요. 물론 이게 잘못 되었다는 걸 알긴 하지만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진 않는 듯한 느낌은 들어요."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하고 싶은 말인데, 아버지를 사랑하는 만큼 아버지를 넘어서서 민주주의 국가의 지도자가 되어 달라고 말하고 싶어요. 아버지를 사랑하는 건 저도 이해해요. 또한, 박정희 대통령이 공과 과가 있다고 저도 생각해요. 그러나 아버지 좋은 면만 보려고 하는 게 과연 옳은지 의문이에요. 그러면서 따라 하는 건 나쁜 점이잖아요. 그런 건 전 옳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꼭 실어주세요."

○ 편집ㅣ홍현진 기자

#역사교과서 #국정화 #연세대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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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의 궁금증을 속시원하게 풀어주는 이영광의 거침없이 묻는 인터뷰와 이영광의 '온에어'를 연재히고 있는 이영광 시민기자입니다.


이 기사는 연재 역사교과서 국정화 회귀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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