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 홀리데이 홍보 화면 워킹 홀리데이 학생들이 겪는 일상은 이렇게 낭만적이지 않다.
외교부 워킹홀리데이 인포센터
큰 애는 워킹 홀리데이 기간이 끝날 때까지 공부를 선택하지 않았다. 약간의 용돈만 가지고 브리즈번에 도착한 큰 애가 일자리를 구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나는 긴가민가 했다. 정말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까? 자기 힘으로 돈을 벌어서 먹고 살 수 있을까? 나중에 큰애 에게서 들은 내용을 정리하자면 워킹 홀리데이를 하는 한국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의 종류는 크게 3가지다.
먼저 덩치가 있는 아이는 호주인들이 하는 육우 가공 공장이 좋다. 급여가 상대적으로 높고 인간적인 대접을 받을 수 있다. 재빠른 몸이라면 농장도 벌이가 괜찮다. 영어가 영 안 되고, 정보도 없으면 현지 교포들이 운영하는 숍에서 일 할 수밖에 없는데, 이 경우 급여나 다른 대우 측면에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육우 가공 공장은 냉장 창고에 걸어 놓은 육우를 주문서에 따라 대기 중인 트럭에 실어 주는 것이 주된 업무이다. 중량물을 다뤄야 하므로 힘이 좋아야 한다. 딸기 농장으로 대표되는 농장 일은 다 익은 과일을 수확하는 거다. 수확한 만큼 돈을 받을 수 있으므로 잽싸게 움직여야 한다. 한인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설거지, 청소, 서빙 등 주로 식당과 슈퍼마켓과 관련된 일이다.
큰 애는 어찌어찌 백팩커를 찾아서 숙소 문제는 해결했는데, 일자리에 대해서는 내가 수배해 준 사람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처음 얼마 동안은 인터넷을 통해 스스로 일자리를 알아 보려고 했는데 여의치 않았다고 한다. 인터넷으로 접근할 수 있는 한인 소셜 커뮤니티에서 구하는 일자리(큰 애가 '노예 잡'이라 표현한)는 시급이 다른 일의 절반 밖에 안 됐지만 그런 일도 처음에는 구하기가 쉽지 않다.
큰 애는 얼마 동안을 백팩커에서 뒹굴뒹굴 보내다가, 이미 호주 워킹 홀리데이를 거쳐간 누나를 둔 또래 친구와 함께 딸기농장에서 첫 번째 일을 시작했다. 성과급제로 운영되는 딸기 농장은 시즌이 끝나가던 참이라 작황이 시원치 않았고, 일하던 학생들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서 큰 애가 쉽게 취직이 된 것이다. 그러나 덩치가 크고 동작이 굼뜬 편인 큰 애는 끝물인 딸기밭에서 별로 돈 벌이가 되지 못하는 일을 하다가 한 달 만에 다시 시내로 나왔다고 한다.
딸기밭에 가기 전에 브리즈번 직업소개소에 이력서를 내놓았는데, 마침 때가 되어 시내 육우 가공 공장에 일자리를 얻었다. 여기서 열흘 정도 일을 했는데, 평소 하지 않던 일을 하다 보니 손목이 아파 매니저에게 파스 같은 소염제를 달라고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그 정도 이야기는 당연하게 할 수 있는데, 호주에서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공장 관리자들 사이에 심각한 이야기가 오갔고, 손목에 이상이 없다는 의사소견서를 받아 오라고 했단다. 그렇게 얼마간 일을 하다 그 공장도 그만 두었다.
그 다음에는 한인 커뮤니티를 통해 청소 일을 구했는데, 시급이 너무 적어서 두 달 정도 하다가 그만 두었다고 한다. 그렇게 4개월이 지나갔다. 대충 들어봐도 보통 힘든 노동이 아닌 것 같은데, 공부는 그 보다 더 힘든 것이었을까? 나는 워킹 홀리데이를 하는 아들과 메신저로 이야기를 하면서 지금이라도 호주에 있는 학교에 들어 가면 바로 지원을 해주겠다는 신호를 끊임 없이 보냈다. 일단 어학과정이라도 시작해보라고 설득했지만, 큰 애는 워킹 홀리데이 기간이 끝날 때까지 공부를 선택하지 않았다.
예전에 신문에서 정혜신 박사가 쓴 칼럼을 읽은 적이 있다. 지금도 스크랩되어 내 책상 앞에 붙어 있는 그 칼럼의 제목은 '그게 다가 아니다' 이다. 나는 큰 애를 지켜보면서 이 글에 대해 다시 한 번 공감하게 되었다.
"외형상 보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많이 상담한다. 안정된 경제력, 괜찮은 직장, 공부 잘하는 자녀를 둔 사람이 무기력증과 우울증을 호소한다." 부유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은 물신주의 사회에서, 또 다른 무엇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읽을 때마다 공감이 가고, 삶의 다른 측면을 생각하게 한다. 큰 애도 자기에게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히려는 곳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런 힘든 노동을 감수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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