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4일 부산 기장군 도예촌 야구장에서 시범경기를 하고 있는 부산가정법원 보호소년야구단
조호진
- 여러 곳에서 러브콜이 있었는데 왜 고생을 사서 하나?
"박정태는 부산 팬들의 사랑으로 만들어진 이름이다.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았다. 프로구단으로부터 코치 영입, 방송국으로부터 야구 해설가 제안을 받았지만 소외된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을 위한 길이 힘들지만 행복하다. 낮은 곳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게 기쁘다. 박정태라는 이름값을 하려면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하는데, 아직은 멀었다."
- 다문화 아동야구단을 운영하고 있는데 어렵지 않나."처음에는 다문화 가족들이 색안경을 끼고 봤다. '왜 돈도 안 받고 우리 아이들에게 저렇게 잘해주나?' 의심했다. 주위의 눈빛도 차가웠다. 1군 타격코치와 2군 감독할 때까지는 사비를 들여 야구단을 운영했는데 수입이 끊기면서 운영이 힘들어 주위의 도움을 받기 시작했다. 처음엔 도와달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는데 요즘엔 '우리 아이들 도와주세요!' '형, 돈 좀 주세요!'라는 말이 입에 붙었다. 도움이 필요하다."
- 보호소년 야구단 감독은 어떻게 맡게 됐나?"최인석 부산가정법원장과 천종호 부장판사에게 부모 부재 등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비행소년들의 사정을 들었다. 스포츠를 통한 비행 예방과 건강한 사회 복귀 방안을 나누다가 야구단 창단까지 이어졌다. 다문화 소년야구단 창단과 고아 소년들의 야구 지도 경험이 있어서 선뜻 응했다."
- 소년들이 만만치 많을 텐데."옛일을 고백하자면… 나는 비행청소년이었다. 우리 아이들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아였다.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오랜 투병 생활로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형제(3남 5녀)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았다. 어머니(김덕순, 91세)는 막내인 나만 데리고 살면서 장사를 시작하셨는데 집에 가도 어머니께서 안 계셨다. 빈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비행청소년들과 어울리다가 가출도 하고 문제 행동도 꽤 했다."
- 얼마만큼 심했나?"부산중학교 시절엔 제법 센 싸움꾼이었다. 야구보다 싸움을 열심히 했다. 중학교에 가서 주먹이 센 아이들을 만났는데 다 꺾었다. 그다음엔 부산중의 자존심을 걸고 다른 중학교 주먹들과 싸워서 이겼다. 다른 학교 주먹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권투와 태권도를 배웠다. 싸움을 정말 잘했다. 그냥 싸운 게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싸웠다. 그때도 근성이 강했다. 그러다 다른 학교 패거리들과 패싸움을 크게 벌이다 경찰에 붙잡혔다. 만약에 감독님이 지켜주지 않았다면 소년원에 갔을 것이다."
어머니의 눈물... 야구부 회비 못낸 대신 설거지 한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