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에 번져 버린 '절교' 유행

[신규교사 생존기 23] 보내기 버튼만 누르면 끝, 안타깝다

등록 2015.11.02 11:01수정 2015.11.02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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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경이가 너무 싫다. 진짜 싫다. 어제 절교했다. 다시는 안 볼 거다."
"갑자기 유진이가 말을 안 건다. 어제 절교를 하자고 했다. 학교 오기가 싫다."


유진이와 재경이의 한 줄 글쓰기는 아침부터 나를 굳어버리게 만드는 한 줄이었다. 평소에도 우리 반에서 둘도 없는 짝꿍으로 유명했던 유진이와 재경이다. 방과 후에도 교실에 마주앉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다 내가 집에 언제 가느냐고 물어보면 그제야 느릿느릿 교실을 나서던 둘이었다. 그 둘이 절교를 했다니. 믿기가 힘들다.

친구(본 기사와는 상관없는 이미지입니다.) ⓒ 고상훈


"유진아, 왜 재경이랑 무슨 일 있었어?"
"걔가 저 재수 없다고 말하고 다닌대요."

재경이가 '재수 없다.'라고 말 하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듣고 유진이가 큰 상처를 받은 모양이다. 그리고 곧장 유진이는 재경이에게 '너랑은 절교야'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그런데 아마 재경이에게는 왜 상처를 받았는지, 왜 우리가 이제 절교를 할 수밖에 없는지 설명하지는 않은 것처럼 보였다. 나는 유진이의 말을 이었다.

"재경이가 그런 말을 하고 다니는구나. 그럼, 재경이에게도 물어봤어?"
"아니요. 그냥 이야기하기가 싫어요."
"재경이가 정말 그렇게 말하고 다녔는지 정도는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근데, 진짜 그렇게 이야기하고 다녔대요."
"그러니까 재경이가 진짜 그랬는지 왜 그랬는지 정도는 물어볼 수 있잖아."

둘도 없는 친구였지만, 유진이는 재경이에게 단 한 번의 해명의 기회도 주지 않고 절교를 선언해버렸다. 벌써 카카오톡 친구 차단까지 해버렸단다. 그것도 건너 건너서 들은 소문만을 믿고 말이다. 하루 내내 모든 신경이 둘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점심시간이 지나자 그런 나를 비웃듯이 언제 그랬냐며 둘은 예전으로 돌아가 있었다. 다행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황당하기도 했다. 방금, 아침 시간만 해도 정말 싫다던 말을 남긴 사이였는데 말이다. 방과 후에 교탁 옆에 앉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웃음꽃을 피우던 둘을 불러 어떻게 된 일인지를 물었다.

사건의 내막은 이러했다. 재경이가 유진이의 욕을 하고 다녔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건 벌써 1년 전 이야기라고 했다. 작년, 4학년 당시에는 서로의 반이 달라 유진이를 잘 몰랐던 재경이는 평소 유진이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친구가 유진이 욕을 하던 것에 의리랍시고 동조를 했던 것이 사건의 시작이었다.

유진이에게 소문을 전달했던 친구는 한참만에야 그때의 이야기를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재경이는 5학년이 되어 같은 반이 되고 나니 유진이가 참 좋은 친구라는 생각을 하며 친하게 지냈고, 5학년 때에는 뒤에서 욕을 해본 적도 없다고 털어 놓았다. 결국, 둘이 서로 잠깐이라도 대화를 나누었다면, 없었을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 일이었구나. 선생님은 걱정 진짜 많이 했어. 그런데, 화가 나기도 해. 둘이 이렇게 친한데, 왜 서로에게 '변명'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지 못하는 걸까? 정말 친한 친구니까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도 기회를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절교'라는 말은 기회를 주고 나서, 그때 고민해서 말해도 될 것 같은데."

유진이와 재경이는 굳어버린 나의 표정에 아무런 말로도 대꾸하지 못했다. 둘 뿐만이 아니다. 요즘 우리 반은 '절교'가 유행이다. 어떻게 절교가 유행일 수 있겠냐고 물으시겠지만, 그렇다. 그러나 재경이와 유진이의 절교 사건처럼 우리 반에서의 절교는 그렇게 무거운 의미는 아니다. 물론, 아이들에게 그 순간에는 힘든 선택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아이들은 습관처럼 절교를 선언한다.

특히나 평일 저녁에도 주말에도 스마트폰으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요즘 아이들에게는 절교는 굳이 만나서 말하지 않아도 키패드로 절교라고 적어 보내기 버튼만 누르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이 되어버렸다. 충분히 대화로 풀어낼 수 있는 일도 아주 사소한 일에도 아이들은 여지없이 절교를 선언한다.

절교가 아직 어떤 의미인지를 모르는 탓일 수도 있다. 혹은, 주변에서 너도 나도 절교를 하니까 나도 화가 난 김에 절교를 해야겠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우리 반의 절교 유행 속에서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자신이 친구에게 실망한 것, 속상한 것을 '대화' 대신 '절교'라는 극단적인 말로 간편하고 단순하게 표현하려 하는 아이들의 모습이다.

아직, 어떤 방법이 이 절교 유행을 끊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나는 '절교'라는 말 자체를 끊으려는 시도 대신 나와 친구의 관계가 '너 아니어도 친구 많아.'라는 듯이 간단하고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전해주려 한다. 친구 사이가 한 번의 말로, 하나의 버튼 클릭으로 끝내버릴 수 있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아이들이 친구를 조금 더 깊게 생각하고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다면, 자연히 절교 유행도 마지막을 맞이하지 않을까 싶다.
덧붙이는 글 2015년 3월 2일부터 시작된 신규교사의 생존기를 그리는 이야기입니다.
#초등학교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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