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0월 27일 국회 본회의에서 2016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통해 자라날 세대들에게 역사 공부를 열심히 시켜보겠다는 심사일까? 이미 세계 최고의 학습노동에 시달리는 우리나라 학생들이다.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한국사 공부를 아니 할 도리가 없는데, 외눈박인 사관으로 쓰인 책만을 공부하라는 국가의 명령 앞에서 말을 잃는다.
대통령은 입만 열면 국가관, 역사관, 통일 시대, 올바른 등등 입을 열지만 정작 그 실체는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가르치는 대로, 떠먹이는 대로 단일 가치에 의한 국사 교과서로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태도나 다름없다. 오만이 느껴진다.
백성을 무지한 존재로 인식하고, 가르치는 대로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계몽의 대상으로 여긴다. 국민은, 학생들은 자기 눈으로 자기 스스로 조상들이 살아온 시대와 역사의 흐름을 왜 알아서 공부할 수 없는가. 이는 군사 독재정권 시절 국민을 계몽의 대상으로 여겨 국민교육헌장을 도입하고 강제로 암기시킨 박정희의 망령을 떠올리게 한다.
이는 국민의 계몽이 아니라 우민화다. 상대를 무지한 계몽의 대상으로 여겨 가르치는 대로 배우라는 것도 한심한 발상인데, 거기에 친일, 독재 미화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국정 교과서를 준다면? 국민은 진정 올바른 역사관이 아니라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종속되는 노예적인 역사관에 빠지고 만다. 이 어찌 21세기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있을 법한 일인가.
1968년 10월 유신의 장기집권을 앞둔 박정희는 어용학자 박종홍 등을 시켜 국민교육헌장을 만들었다. 1994년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정부에 와서야 초등학교가 사라지고 국민교육헌장이 폐지되었다. 1970·1980년대 초·중·고를 다닌 학생이었다면 지금도 입에서 줄줄 외는 국민교육헌장. <응답하라 1994> 이후 세대들에게는 낯설고 기이한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전형인 국민교육헌장이 오늘날 국정교과서로 부활하는 느낌이다.
1972년 초등학교(당시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987년에 대학을 졸업한 나의 경우, 초·중학생 시절의 국민교육헌장은 해마다 국가 이데올로기에 대한 충성심을 시험받는 기준이었다. 교사마다 다르긴 했지만, 국민교육헌장을 제대로 외지 못한 학생들에게 가해지는 물리적·정신적 폭력은 국민교육헌장이 추구하는 자유민주주의 이상과는 너무 거리가 먼 것이었다.
대한민국 국적을 지닌 시민들이 같은 시대,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국민이지만 누구나 민족중흥 역사적 사명과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해야 할 의무는 없다. 일본의 교육칙어가 보여주는 군국주의, 국가주의의 아류로 탄생한 국민교육헌장은 구시대 침략주의와 제국주의의 유물이다.
국민교육헌장은 일제 교육칙어와 이광수의 국민개조론을 박정희식으로 변형한 결과물이다. 국정 교과서는 무엇인가? 국민교육헌장을 통해서 국민을 획일화시키고 국론을 분열시킨 국민교육헌장의 변형이다. 국민을 무지한 계몽의 대상으로 낙인찍고 국가가 지표를 제시할 테니 국민은 모두 그것을 외우고 따르라는 압력이다. 자율, 소통, 다양성의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공부를 국시화한 영조, 교과서를 국정화하는 박근혜 대통령. 둘이 어딘가 닮지 않았는가. 국민교육헌장이 발표되고 나서 4년 뒤에 장기집권과 국민탄압이 본격화되는 시월유신이 단행됐다. 국정교과서는 단순히 교과서만의 문제일까? 국민이 이를 통해 획일화, 우민화된다면? 국시를 강요해서 아들을 역도로 몰아 죽인 아비의 비극을 생각할 때, 국정화를 반대하는 국민을 비국민, 반역자로 몰아 희생자로 몰아가는 비극이 없을 것인가.
떳떳함과 부끄러움의 정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