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 밑 아이들<디지털>육모정에서 고기리로 올라가는 길. 잠시 내려 사진을 찍었다.
안사을
이 글의 주제는 학생들과 함께 떠났던 문학 기행에 대한 것인데 서론이 길다. 그 이유는 나를 비롯한 학생들이 책을 상당히 이질적으로 느끼게 된 나름의 역사와 이유를 조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위에서 밝힌 이유들로 인해 실적이라고는 눈을 씻어도 찾을 수 없었던 2015학년도 1학기의 우리 반 독서 상황을 어떻게 하면 반등시킬까 하는 고민으로 즉흥적인 행사를 기획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이번에 다녀온 가을 문학기행이었다.
평소 스마트폰 대신 책을 손에 잡아보라는 잔소리는 우리 아이들을 변화시키지 못했다. 장장 연설을 고개를 주억거리며 반짝이는 눈빛으로 듣던 아이들은 이내 쉬는 시간이 되면 게임 이야기로 꽃을 피웠고, 여전히 그 다음날 아침이 되면 핸드폰 게임에 마음을 팔았다. 나는 즉흥적으로 대단한 보상을 하나 생각했고, 한 학기 동안 읽은 책을 잘 정리해서 제출하는 학생 중 3명을 뽑아 문학관이나 작가의 생가 등을 견학하는 기행 계획을 세워서 1박 2일로 데려가겠다는 제안을 했다. 그리고 그 1박 2일의 계획 속에는 남성미와 낭만이 물씬 풍기는 야외 바비큐와 캠핑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연히 아이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하루에 한 권씩 읽어도 되냐는둥 엄청난 포부를 비치는 아이도 있었다. 뿌듯했다. 이런 발상의 전환이 아이들의 행동을 변화시키는구나 하는 생각에 웃음이 절로 났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약속된 날 독서상황기록을 제출한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허탈했다. 울분의 잔소리가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꾹 참고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었고, 그 한 번의 기회는 같은 이유로 세 번의 기회가 되었다.
세 번이나 연장한 끝에 결국 입 짧은 아이 어른 수저로 밥 멕이듯 세 명을 뽑았다. 예상보다 늦게 결정된 참여 명단, 명절과 수학여행 등의 일정, 중간고사 등으로 인해 계속 미뤄진 행사는 가을이 겨울로 변모하기 직전의 시간까지 와버렸고 캠핑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어찌할까 고민하다 우리 집을 오픈하기로 했다. 총각 선생의 장점이 십분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바비큐 대신 치킨을 먹기로 했고, 캠핑 대신 청소년 성장영화를 보고 토론을 하기로 했다. 나름 괜찮은 대안이었다.
고민 끝에 '월플라워'라는 영화를 선택했다. '월플라워'는 졸업파티 등의 무도회 때 파트너가 없는 사람을 일컫는다. 트라우마를 가지고 고등학교에 입학한 주인공이 갖은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되었을 그의 친구들을 그린 이야기이다. 엠마 왓슨의 팬인 한 명의 학생을 빼고는 모두가 처음 보는 영화였다.
늦은 시간이었고 자극적인 장면 하나 없는 잔잔한 영화였지만 숨죽이고 보기에 충분히 마음에 와 닿는 영화였다. 청소년기를 훌쩍 넘긴 나에게도 몇 장면과 대사들이 깊숙이 들어왔다. 영화가 끝난 후 몇 가지 질문을 토대로 한 토론은 생각보다 훨씬 길어져서 새벽 한 시가 넘도록 이야기꽃을 피우게 되었다. 학교에서 나누지 못했던 값진 대화들이 오고갔고,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이야기를 오랜만에 꺼내게 된 아이들은 눈시울을 적시기까지 했다.
오고간 대화들은 우리들만의 비밀로 부치기로 한다. 상담의 제1원칙이기도 하거니와 이날 나눈 대화들을 토대로 계속적인 발전을 이루기 위한 필수적인 조치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따뜻하고 벅찬 시간을 보내게 되면 학생들의 손에서 스마트 폰이 잠시라도 놓아지게 될까? 물론 그랬다. 하지만 역시 물론 그 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촉촉한 눈망울로 이야기를 이어가던 아이들은 대화가 끝나자마자 핸드폰을 손에 들고 서로간의 소통을 스스로 단절시켰다. 정말 무서운 습관이다. 아이들의 동의를 얻고 핸드폰을 걷었다. 이거야 원, 수련회나 극기 훈련도 아닌데 핸드폰을 걷어야하는 상황이 스스로도 아리송했지만 1박2일 기행의 취지를 위해서라도 오프라인과 아날로그의 세상이 필요했다.
교장선생님의 결재를 얻은 원래 문서상의 계획은 2일째 아침 기상 시간이 6시였다. 가을 단풍이 절정인 시기에 아침을 먹고 넉넉히 집을 나서면 서울 한복판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의 교통 체증을 시골 한복판에서 만나기 십상이다. 하지만 주말 내내 비 소식이 있었기에 아쉬운 마음으로 뱀사골 산행 계획을 취소한 채 잠이 들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꾸물꾸물한 하늘이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 것 같았지만 빗방울은 다리미 앞의 분무기보다도 얌전했다.
9시 가까이 출발을 하게 되었는데 남원으로 향하는 내내 마음이 달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단 일찍 일어나볼 걸'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이 정도 날씨라면 산행객이 꽤나 있을 것 같았고 오후에 집에 돌아가 다시 학원을 가야하는 학생들의 스케줄을 맞추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 다행히 주말 일기예보가 워낙에 비 소식을 강하게 다루어준 덕택에 길은 한가했고 비가 조금씩 내리긴 했지만 가을의 정취를 방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물기를 먹은 나뭇잎들은 더욱 선명한 색깔을 선사했고 어지간해서는 서정적인 냄새를 풍기지 않는 현대의 십대들조차 감탄에 감탄을 더하면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두 시간을 지체한 상태로 왔기 때문에 천년송까지 계획했던 산행은 하지 못하고 뱀사골의 발목 정도만 오르고 내려왔지만 점점 굵어지는 빗방울 탓에 아쉽지는 않았다. 우리는 남원여고 재직 시절 6년간 꾸준히 나의 단골집이었던 돈가스 집에서 아이들과 점심을 해결하고 사매면에 위치한 '혼불문학관'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