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의 장준하 선생
장호준
중앙정보부가 장준하 선생님을 감시하고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때는 1963년부터였습니다. 육군소장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찬탈한 후 제일 먼저 만든 기구가 '중앙정보부'(현 국정원의 전신 명칭, 약칭 '중정')인데, 중정은 이후 권력에 도전하는 인사들을 감시하면서 이를 감시한 내용을 '동향 보고'라는 문서로 생산합니다. '장준하 파일'로 이 동향 보고가 생산된 첫 시기가 바로 1963년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중정의 동향보고 문서가 생산되기 이전에도 장준하 선생님에 대한 권력 기관의 감시는 계속 있었습니다. 다만 1963년 이전에는 경찰이 장 선생님을 감시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그러던 장 선생님에 대한 감시를 경찰이 아닌 중정이 직접 담당한 때는 1963년 10월부터로 보입니다.
계기가 있었습니다. 1963년 박정희는 쿠데타 당시 약속했던 '민정 이양'을 깹니다. 군이 아닌 민간인에게 정부를 이양하겠다더니 자신이 공화당을 창당한 후 직접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것입니다. 그러자 장준하 선생님은 이를 강력 비판하며 당시 야당 대통령 후보였던 윤보선씨를 지지하는 유세에 나서게 됩니다. 중정이 장준하 선생님을 직접 감시하고 동향을 파악하는 계기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권력의 탄압 속에서 장준하 선생님의 일생은 말 그대로 '혹독한 겨울의 중심'이었습니다. 서른일곱 번의 연행과 세 번의 구속. 당시 지식인의 표상처럼 여겨지던 <사상계>는 연이은 세무 사찰과 영업 방해 공작으로 부도 처리됐고 학비조차 마련할 수 없었던 장 선생님의 자녀들은 원하는 학업을 마칠 수 없었습니다.
동향 기록에서는 이러한 과정에서 중정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장 선생님이 누구를 만났고, 어떤 대화를 나눴으며, 향후 어떤 행보를 할지에 대한 대책이 담겨 있었습니다. 중정의 감시는 단순히 뒤를 쫓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전화 도청은 물론이었고 자기 집 안방에서 나누는 대화까지도 동향 기록에 담겨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추악한 독재 권력의 탄압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장준하 선생님도 알고 계셨을까요. 알고 계셨습니다. 1974년 1월 초, 장준하 선생님은 박정희 유신 독재에 맞서 악법인 유신 헌법의 철폐를 요구하는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선언하고 이를 주도합니다. 그때 장준하 선생님의 집에 누군가가 전화를 걸어옵니다.
동향 기록에 '미상남'(누구인지 알 수 없는 남자)으로 적혀 있는 이 남자는 장 선생님의 안부를 걱정하며 "어떠시냐"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장 선생님은 "나는 지금 철저히 감시받고 있다, 지금 이 전화도 분명 그들이 듣고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변소 가는 길도 그들에 의해 감시를 받고 있다"라면서 자신을 향한 권력의 탄압에 분노를 표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감시로 인해 장 선생님의 심적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알 수 있는 일화가 또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장준하 선생님이 타고 다니시던 낡은 자동차에 실린 '물건'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몽둥이였습니다. 자신이 감시를 받고 있다는 것, 그래서 언제 어떤 테러를 당할지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에 장 선생님은 늘 자동차 뒷자리에 늘 몽둥이를 두고 다녔다고 합니다.
실제로 자신을 뒤쫓는 정체불명의 차량을 향해 "정체를 밝히라"며 항의를 했다는 동향 보고도 눈에 띄었습니다. 1974년 1월 7일의 일이었습니다.
1974년 1월 7일통일당사 앞에서 미행 감시 차에 대하여 정체를 밝히라고 발악하며 소동을 벌인 바 있음.그리고 이 일이 있고 바로 다음 날인 1월 8일, 박정희는 유신헌법 개헌을 청원하는 민주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긴급조치 1호' 및 '2호'를 선포합니다. 이후 청원운동 주도 세력인 장준하 선생님과 백기완 선생님 등을 대거 구속합니다.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던 장준하 선생님에 대한 처절한 피의 기록, 바로 중정의 동향기록이었습니다.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 다 쓰고 엉엉 운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