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동에 피는 연꽃, 코를 잃어버린 미완의 부처

[다시보는 우리문화유산의 美/ 경주남산 새갓골]

등록 2015.12.18 13:18수정 2015.12.18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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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가 아흐레 남은 을미년의 끝자락이다. 지난 가을 절정의 붉은 숲은 깊이 잠들고, 한줄기 빈 바람만이 가녀린 나뭇가지를 맴도는 겨울의 초입이다. 때마침 일요일 아침나절 따뜻한 겨울 햇살이 눈부시게 빛난다. 그간 이런저런 일들로 밀린 숙제를 끝낼 요량으로 가벼운 걸음으로 집을 나선다.

오릉사거리를 거쳐 나정과 포석정을 지나는 서남산자락은 요사이 줄지어 들어선 몇몇 상가들 탓에 다소 번잡한 느낌이다. 탱자나무울타리에 포근히 끌어안긴 지마왕릉과 구불구불 천연덕스러운 삼릉의 소나무들은 멀찌감치 떨어져 반가운 수인사를 건넨다. 오늘(13일)은 경주남산의 남쪽계곡인 백운계일대의 새갓곡을 찾아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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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남산 새갓골 가는 길 새갓골 오르는 길은 소나무와 바위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오솔길이 내내 펼쳐진다. ⓒ 남병직


새갓곡은 백운계의 백운암으로 올라가는 길 중 처음 만나는 계곡으로, 열암곡(列巖谷)으로도 불리운다. 새갓곡은 갓 사이의 골짜기, 즉 산사이의 계곡을 의미한다. 새갓곡 입구에는 근래 새로 단장한 대형주차장이 생겨 경주남산을 오르는 등산객들의 차량이 아침부터 북적댄다.

주차장을 돌아 나와 야트막한 산길로 접어드니 계곡의 감춰진 속내가 조금씩 드러난다. 계곡사이로 이어진 조그만 오솔길은 소나무와 나지막한 조릿대가 한데 어우러진 싱그러운 숲길이다. 얼마 전 정토회의 법륜스님께서 경주남산을 오르던 길에 때 아닌 진달래를 보고 깜짝 놀라셨다는 풍문을 들은 바 있다. 오늘 나의 답사 길에도 특종을 포착할 수 있을지 내심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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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활짝 핀 진달래꽃 겨울에 꽃이 피면 나라에 상서로운 징조라 한다. 새갓골 오르는 길에 운 좋게도 활짝 핀 겨울 꽃을 만났다. ⓒ 남병직


열암곡이란 이름처럼 길가에는 드문드문 바위군락이 무리를 이루었다. 모난 바위보다는 둥글고 탐스런 바위들이 눈에 띄는데, 간혹 어떤 것들은 동전크기의 알 구멍이 패인 것도 있어 지난시절 민간에서 치성을 드린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이곳은 남산의 여타 골짜기와 달리 산을 오르는 동안 졸졸졸 시냇물 물소리가 귓전에 울린다. 천태만상 아기자기한 돌들의 향연 가운데 반시간 남짓 즐거운 산행을 이어왔을까?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화강암의 굳건한 성채가 턱하니 눈앞을 가로막는다. 이어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보니 드넓은 소나무 숲의 찬란한 위용이 짙푸른 겨울 하늘아래 물결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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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갓골 석조여래좌상 짙푸른 겨울 하늘아래 소나무 숲을 병풍으로 두른 부처님이 고요하다. ⓒ 남병직


경주남산 정밀학술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백운계 새갓곡에는 총3개의 절터가 분포하는 것으로 조사된 바 있다. 오늘 우리가 찾아온 답사지는 그중 백운계 새갓곡 제3사지(새갓골불상절터)로 석조여래좌상과 마애석불이 자리하고 있다. 마애석불은 2007년 주변정비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된 이래 유적보존에 대한 마땅한 대안이 없어 현재까지 발견상태 그대로 현장보존 중이다.


산비탈에 급경사로 쓰러진 마애석불 주위로 비닐하우스로 된 보호시설을 세우고 상부에는 그늘막을 마련했다. 측면에는 작은 창살하나가 트여있어 기적처럼 발견된 마애불의 상호를 친견할 수 있다. 마애석불의 곳곳에는 암석의 상태조사를 위한 모니터링 장비가 설치되어 가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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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갓골 마애석불 2007년 우연히 발견된 기적의 마애불이다. 하루빨리 기적처럼 일어나 중생을 제도하길 바란다. ⓒ 남병직


바닥암반과 5㎝의 간극으로 마주한 70톤의 육중한 마애석불을 바라보노라면 천년의 시간을 힘겹게 버텨온 신비로움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기적의 마애불로 한동안 세간에 명성이 높았다지만, 조성당시 원래부터 누워있던 와불이 아닌 다음에야 가까운 시일 내에 원형대로 복원되어 사바세계를 굽어 살필 수 있기를 발원해본다.

마애석불의 맞은편 언덕위에는 석조여래좌상이 자리한다. 이 불상은 불두와 대좌의 중대석이 결실되고 광배는 여러 조각으로 파손되어 계곡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2005년 주변에서 불두가 우연히 발견되었고,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의해 2007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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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갓골 석조여래좌상 과거 파손되어 여러 조각으로 흩어져 있었으나, 2007년 복원을 통해 새 생명을 얻게 되었다. ⓒ 남병직


비록 파손되어 복원된 불상이지만 불신과 광배, 대좌는 불상의 깊은 내력을 말없이 웅변한다. 화염문과 당초문이 아로새겨진 광배 뒤편을 돌아 아득하게 펼쳐진 드넓은 하늘을 응시한다. 정오의 태양빛이 만들어낸 미묘한 실루엣을 따라 한 송이 연꽃봉우리가 봉긋하게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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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갓골 석조여래좌상의 뒤태 석조여래좌상의 뒤태는 가히 절경이다. 한 송이 연꽃봉우리가 봉긋하게 피어올랐다. ⓒ 남병직


석조여래좌상의 복원에 있어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대좌의 앙련과 복련을 받치고 있는 중대석에서 지난날 돌을 빚던 석공의 간절한 마음을 찾아볼 수 없음이다. 또한 보존처리과정에서 표면오염물제거를 위한 세척으로 겹겹이 쌓인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향후 관련기관의 문화재복원에 있어 전통과 현대의 교감을 위해 절충과 보완이 필요한 부분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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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서 바라본 새갓골 석조여래좌상 석조여래좌상은 불신, 대좌, 광배를 모두 갖추었다. 다만 복원된 중대석은 너무 반듯하여,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 남병직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서서 불상을 살며시 어루만진다. 부드러운 살결은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으로 충만하다. 어깨와 가슴을 타고 흐르는 유려한 옷 주름과 통통하게 살이 오른 몸의 곡선이 따사롭다. 마치 거친 돌덩이에 생명의 약동이 살아 숨 쉬는 듯하다.

마애석불의 경우 오랜 기간 흙속에 파묻혀 오뚝하고 잘생긴 코를 지금껏 간직하고 있다. 그에 반해 석조여래좌상은 아녀자들의 바람으로 불상의 코가 온전히 남아나질 않았다. 득남을 위해 불상의 코를 베어간 민간풍습이 지난날 세간에 유행한 탓이다. 온몸으로 보살행을 이루다 코를 잃어버린 미완의 부처는 오늘도 대자비의 마음으로 다시금 중생의 고통에 가만히 귀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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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를 잃어버린 새갓골 석조여래좌상 석조여래좌상은 민중의 염원으로 코를 잃어버렸다. 그러나 한없이 부드러운 그의 손길은 대자비의 마음으로 중생을 어루만진다. ⓒ 남병직


석조여래좌상이 자리한 언덕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니 거대한 계곡은 바위군단의 열병으로 장중하다. 두 분 부처님을 호위하는 사천왕과 하늘신의 위엄인 듯 거룩한 모습이다. 소나무와 대나무의 푸르름 가운데 집채만한 큼직한 바위가 고요히 잠들어있다. 눈대중으로 보아 어른 10여 명은 너끈히 둘러 앉을 만하다. 순간 번뜩 떠오르는 이름은 좌선바위이다. 태산 같은 좌선바위에 바르게 앉아 옛 선현들의 일호일흡에 적멸을 꿈꾸어본다.

앉을 때는 바위와 같이/
설 때는 큰 소나무와 같이/
누울 때는 활과 같이/
걸을 때는 바람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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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갓골 좌선바위 산을 오르다 보면 마음이 설레는 돌이 있다. 새갓골 좌선바위는 한번쯤 앉고 싶은 믿음직한 돌이다. ⓒ 남병직


마애석불과 석조여래좌상 뒤편으로 새갓골 정상으로 오르는 가파른 산길이 이어진다. 높다란 기암절벽의 끝자락에 올라서니 바위에서 피어난 푸른 소나무가 유유히 하늘을 난다. 엄동의 시린 겨울을 뚫고 활짝 핀 진달래 마냥 오탁악세에도 부처님의 밝은 지혜가 더욱 빛나길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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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갓골 정상에서 바라본 사바세계 물결 같은 산자락이 잔잔하다. 세간에서 지고 온 마음의 짊은 여기 내려놓고 가도 좋을듯하다. ⓒ 남병직


덧붙이는 글 본 기사는 문화유산답사회 우리얼(http://www.uriul.or.kr)의 2015년 경주지역 번개답사의 동행기록입니다.
#경주남산 새갓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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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경북지역 대학생문학연합(효가대 난문학회) 동인/ 문화유산답사회 우리얼 문화지킴이간사/ 국립문화재연구소 복원기술연구실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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