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이라면 기겁을 하는 일본인들인데... 이상하네

[소설]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비극 'Another Holocaust' 34화

등록 2016.01.03 16:40수정 2016.01.03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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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화에서 이어집니다)

다케우치는 다나카와 회의를 마치고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실권에 오르는 마지막 단계라는 느낌이다. 성과지향적 인간의 전형적인 조증(躁症)에 달뜬다. 이 나라의 황제를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있다는 자만감도 감추지 않는다. 인터폰으로 오하라 검사를 찾는다.


"오하라에게 연락해서 들어오라고 해."
"저 실장님, 오하라 검사님 그만두셨다고 검찰 쪽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새로운 연락관 오는 대로 들어온다고 하고요."
"뭐야! 언제 그 소식이 왔나?"
"실장님 회의 중에 왔습니다. 그리고 오하라 검사님께서 실장님께 남긴 편지가 있습니다. 바로 올리겠습니다."

여비서가 편지를 다케우치에게 건넨다. 다케우치는 급하게 편지 봉투를 찢고는 읽기 시작한다. 낯빛이 일그러진다. 편지를 든 손은 부들부들 떨린다.

'무엇으로 불러 드려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다케우치 실장님, 아니면 예전처럼 료, 아니면 다케우치 선배….

이젠 당신과 절연을 했으니 그냥 다케우치씨로 부르겠습니다. 다케우치씨, 이제는 제발 당신 주변 사람은 물론 모든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세요. 이건 부탁이 아니라 협박입니다. 더 이상 당신으로 인해 가슴에 상처 받고, 삶을 잃는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부득이하게 당신을 협박합니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 기억하세요? 훈련소에 왔을 때요. 그때 이후 당신은 나의 소망이자 꿈이었습니다. 당신을 존경했고, 당신처럼 능력 있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던 것도 사실이었고요.


그런 존경은 어느새 저에게 첫사랑으로 바뀌었습니다. 당신이 미국에서 가져왔다는 환각제, LSD였나요? 피로 회복에 도움이 된다던 필로폰이었나요? 환각제에 취했다고는 하지만 저는 난생 처음 내 안 깊숙이 숨어있던 나를 알게 됐습니다. 당신으로 인해서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열게 된 것입니다. 저는 단순히 제가 이성에 크게 관심이 없는 남자라고 생각했지만, 당신은 제 안에 있던 여성이라는 본성을 끌어냈습니다.

이후 당신은 나의 디오니소스가 됐고, 저는 당신을 따르는 하인이었습니다. 무슨 일이든 당신을 위해 했습니다. 당신이 잡아넣으라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함정에 빠뜨리기까지 하면서 파괴했습니다. 그것이 우리 조직의 일과 관련이 전혀 없어도 조직의 행동 요원들을 동원하면서까지요. 심지어 당신이 시키는 대로 당신 이외의 남자들과 당신이 보는 앞에서 사랑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당신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나 당신은 변했습니다. 특히 최고의사결정연구단에 오면서부터 더욱 괴물이 됐습니다. 당신의 요구에 따라 밤을 숱하게 지새우며 여러 가지 아이디어와 시나리오를 만들어 드렸습니다. 하지만 제가 당신에게 헌신하면 할수록 당신은 저를 멀리하고 실망만 안겨줬습니다. 결국 연구단에 온 다음에 한 번도 저를 찾지 않았고요. 다른 여자에게만 달려갔습니다.

제가 모를 줄 알았나요? 당신이 사람들을 미행하고 감시하는 것만큼 저도 당신에게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당신이 미키씨와 결혼할 것이라고 말했을 때도 당신을 용납했습니다. 그래도 먼 훗날 제게 돌아오리라는 믿음이 있어서였죠. 결혼이 깨지면서 미키씨의 연인을 처리하는 것도 제게 맡기셨죠. 그 일을 하면서 저는 당신에게 의심이 들었습니다. 언젠가는 제가 쓸모가 없어지면 저도 미키씨 같이 폐기될 수 있다는 것이었죠.

당신은 변할 생각이 없더군요. 그리고 이제는 변할 수 없게 됐고요. 그런 당신에게 저는 단순히 권력을 향해 접근하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죠.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당신이 변하지 않는다면, 내가 변하자고. 당신을 아무 것도 아닌 사람으로 여기고, 더 이상 당신에게 얽매이지 않기로.

앞으로 권력 놀음에서 저는 빼주시면 됩니다. 처음에는 저도 무슨 지고지순한 이상이나 커다란 꿈으로 생각했었고, 대업을 이루는 데 헌신하는 사람이라고 저 스스로를 속였어요.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고요. 제가 저지른 모든 일이 사람을 상하게 하고, 사람 마음에 못을 박는 못된 짓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당신을 떠날 권리는 제게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세요. 행여 저를 찾을 생각은 마시고요. 당신의 온갖 악행과 죄악을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으니까요. 저를 찾는다면 그 '판도라의 상자'가 열릴 겁니다. 그리고, 당신이 미키씨와 미키씨 연인에게 한 짓, 그리고 연구단의 음모가 담긴 파일을 미키씨에게 선물로 줄 것입니다. 미키씨에게 저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비는 뜻에서요.

다시 협박합니다. 제발 나쁜 짓을 멈추세요. 모쪼록 당신이 괜히 좋지 않은 일로 언론에 오르내리지 않기를 빌어드릴게요. 편지를 다 읽으시고, 화가 나면 편지를 마음껏 갈기갈기 찢으세요. 당신 스스로를 찢듯. 한때 당신의 사람이었던 오하라 진 올림.'

1995년 영화 <토탈 이클립스>(Total Eclipse)에서 시인 랭보(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동성애 연인 베를렌느(데이비드 듈리스)에게 "세상에서 가장 내가 가장 참을 수 없는 건 참을 수 없다는 게 없다는 거야"라고 자신의 심연에 가득 찬 우울과 심적 갈등을 토해낸다. 동성애조차 시를 위한 경험이라며 기꺼이 몸으로 느꼈던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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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토탈 이클립스'에서 프랑스 시인 랭보(리어나도 디캐프리오)와 동성애 연인 베를렌느(데이비드 듈리스)가 격정적으로 입맞추는 모습. 그들은 관습과 전통을 벗어나야 한다는 문학적 감성을 찾기 위해 동성애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 영화 '토탈 이클립스'


하지만 결국 랭보는 아내와 가정이 있는 베를렌느를 떠난다. 베를렌느는 그를 떠나지 못하게 막는다. 아직도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랭보는 새로운 시상(詩想)을 찾아 멀어져간다.

둘의 애틋한 이별에 비하면 오하라가 다케우치의 별리는 추하다. 다케우치가 오하라에게 안긴 상처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파괴할 정도로 아픈 상흔이 결국 저주와 협박으로 끝난 것이다. 영화보다 처절하고 지저분한 것이 현실이라는, 잊고 있던 진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한다.

다케우치의 눈에는 핏발이 섰다.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한다.

세상에는 비밀은 없다. 비밀은 관념만 있을 뿐이지 비밀이라고 누군가가 말하거나 규정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비밀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텔라의 아버지 엔도 아키라가 명예본부장을 하고 있는 전일공동체본부 김원택 도쿄 지부장이 후쿠시마로 향하고 있다.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복구를 감시하고 있는 동북지부에서 이상한 보고가 들어와 확인 차 방문하기 위해서다. 동북지부의 환경감시반 보고에 따르면, 방호복을 입지 않은 일단의 사람들이 방사능 오염 지역 복구 작업에서 나온 의복과 장비를 분류하고 적재하는 광경이 수차례 목격됐다는 것이다. 요즘은 오염된 흙을 퍼 나른다고 한다.

감시반의 책임자가 이에 대해 알아보려고 했으나 무장을 한 육상자위대원 복장의 감시원들은 이에 대한 설명은커녕 접근조차 막았다는 내용이었다. 분명히 방호복을 착용한다 해도 방사능 피폭지역에서 작업을 꺼려 현장의 복구 작업이 늦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아무래도 특이한 사례고, 작업하는 사람들의 건강이 우려된다는 분석도 덧붙였다.

"처음 발견된 것은 한 2주 전입니다. 그 이후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오전이면 어디선가에서 차량으로 작업자들을 태우고 나타나 작업을 하다가 오후 늦게 철수하는 것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아, 지난주에는 목요일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요. 화요일인 오늘은 벌써 나타나 작업 중에 있습니다."

환경감시반 책임자의 안내에 따라 작업장으로 몰래 접근했다. 보고된 것처럼 감시원들은 방호복을 입었지만 작업자들은 방호복도 없이 작업을 하고 있는 장면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김원택은 망원 렌즈를 통해 여러 컷 사진을 찍었다. 영락없이 감옥이나 수용소 같은 곳에서 나온 작업자들 같이 보인다. 사진이 그 장면을 충분히 설명해 주고 있다. 작업자들은 한눈에 봐도 작업하기 싫어하는 표정과 약간은 겁먹은 얼굴이 역력하다. 이럴 때는 직접 부딪혀 보는 게 상책이다. 작업자들에게 다가가 말을 건다.

"저기요. 어디서 나온 분들이십니까?"

방호복을 입은 감시원이 김원택을 제지한다.

"접근하지 마십시오. 작업 중 접근 금지입니다."
"알았어요. 그런데 어디서 오셨냐고요? 저희들은 이곳 방사능 피폭지역의 복구를 감시하고 있는 전일본공동체본부 산하 감시반입니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돌아가세요!"
"아니, 일본 국민이 어디를 가든 당신들이 오라 가라 할 일은 아니잖아요!"

"동북수용소에 수감돼 있는 재소자들입니다. 그러니 그만 돌아가세요. 재소자들의 작업 공간에는 민간인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렇다 치고. 그런데 왜 이 사람들은 방호복도 입지 않고 작업을 합니까? 감시하는 사람들과 차량 운전자까지 모두 방호복을 갖춰 입었는데?"
"더 이상 아무 것도 답해 줄 수 없습니다. 돌아가세요!"

자칫하면 공무집행 방해 운운하면서 총으로 제지할 분위기다. 김원택은 이제 철수하자는 뜻을 눈으로 전달한다.

김원택은 가까운 후쿠시마 감시반 사무실로 한달음에 달려간다.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노트북을 켜고 인터넷에 접속한다. 동북수용소를 검색한다. 그러나 동북수용소라는 공식적인 곳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도쿄의 본부에 전화를 해서 법무성과 경시청에 있는 지인을 통해 수소문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역시 마찬가지 답이었다. '동북수용소'라는 이름과 비슷한 곳은 어디에도  없다. 결국 공식적인 기관이 아니라는 얘기다.

김원택은 전일본공동체본부 사이트에 로그인한다. '시민기자' 카테고리에서 지금까지 입수한 내용과 사진을 기사로 올린다. 현장의 대화 내용 영상도 편집을 마쳤다. '후쿠시마 방사능 피폭 현장­동북수용소 수감자들, 방호복 없이 작업'이라는 제목을 단다.

같은 내용을 '야후 재팬' 게시판과 뉴스, 그리고 여러 블로그에도 올린다. 아울러 공동체본부 사이트에 '전회원, 방호복 없는 방사능 작업 기사 및 게시판 게재, 긴급-대량 전파 요청!'이라는 내용의 알림 팝업을 설정한다.

낚싯대를 모두 던져 놓은 김원택은 한숨을 돌리며 담배를 입에 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한 일이다. 건강이라는 문제에는 온 일본 사회가 극성을 부린다. 중국으로부터 한국을 거쳐 황사가 온다든지, 유행성 독감 소식이라도 들리면 미세먼지를 걸러주는 마스크다, 손에서 독감 바이러스를 제거한다는 '핸드젤'이다 뭐다 소란을 떠는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지역에 사는 사람들도 모르는 동북수용소라는 곳의 재소자들이, 방호복도 입지 않고 방사능 오염지역에서 잔류 방사능이 잔뜩 묻은 옷과 장비들, 그리고 오염된 흙을 정리 작업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의문을 지우지 못한 김원택은 도쿄로 돌아간다.

(* 다음 화에 계속)
#조증 #토탈 이클립스 #랭보 #마들렌느 #방사능 방호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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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Bella Vita! 인생은 아름답다며, 글쓰기로 먹고 살기 위해 애쓰는 여러분의 이웃입니다. 세계일보, 머니투데이, 한경비즈니스, 이코노미조선 등에서 기자로 일했습니다. 2019년 '아산문학' 공모전에서 '그는 제바닷타였을까'라는 단편소설로 대상을 받고, 전업작가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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